인생과 불교

인생과 불교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인생도 둘이 아니며 불교와 우리 각자는 둘이 아니다.

또한 석가모니불이 깨친 진리와 우리가 자신의 밑바탕의 부처를 찾아 깨치려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내가 오늘 저녁에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 은 부디 딴짓 마라. 극락도 있는 거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 있으니 잘 명심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 인류가 불교에 들어오면 전쟁이 없어지고 약소민족들은 완전히 해방이 되어 영원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사상이 불교에 있다.

아! 그것이 그러하건대 개가 되어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저희들끼리 물고 싸우는가 하면 개미가 되어가지고 저희끼리 싸우고 일체중생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싸우며 헤메이고 있다. 이러고 보니 참으로 부처님 말씀대로 가련하고 슬픈 것이다 어리석음에 의한 슬픔이 얼마나 슬픔의 존재가 되겠는가.

예수님이나 공자님은 박애니 인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지 우리 부처님과 같이 가련함을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하시었다.

박애나 인은 부처님의 자비의 설법인 사랑의 자심에 해당하고 슬프고 가련하게 여기시는 비심의 설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하시었다. (반야심경)의 요지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도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나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이다.

이 손이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지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라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자면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고,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져야 한다. 정각이란 인생의 고를 벗어버리는 문제의 해결이다. 이 문제의 해결 속에 오늘의 불교의 존재 이유가 있다.

불교사상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그러면 가정도 편해지고 내 맘도 편해지고 이렇게 맘이 편하면 전세계가 편해진다. 내 맘이 더러우면 온 중생이 다 더러운 사람이 되고, 내 맘이 청정해지면 온 국민이 다 청정해진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자유평화롭게 하려거던 네 맘부터 바로 잡아라. 공연히 세상이 냉혹하다 국가가 어떻다 정치하는 사람 나쁘고 부패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나쁘다고 해봤자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우선 너부터 고치면 모두 좋은 사람 되간다. 그러니 저만 착해지면 모두 착해진다. 우선 너부터 나쁜 데 가담하지 말고, 저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산이다 물이다 하며, 보이는 대로 높다 깊다 하고, 분명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주관의 본체인 이 마음이 모든 생각을 쉬었을 때에는 쉬었다는 것까지도 없어져서 청정하고 순진한 이것만이 독립하여 이렇게 이러한 것을 부득이 하여 법이라고 하며, 이 법을 얻어보았으되, 보이는 것은 없으므로 이것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나를 잊어버리면 곧 그것이 불도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생각하거나 따지는 것은 마귀의 친속인 것이다. 이 마음은 비록 그대가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때라고 할지라도 변하거나 잃어진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은 때라고 할지라도 마치 손에 쥔 물건을 찾는 것과 같아거 새삼스레이 딴 곳에서 얻어온 것도 아닌 것이다.

변할 수 없는 천진자성의 마음은 흩어져 때가 묻거나 닦아 고쳐서 성해질 수가 없는 것이오. 내가 공연한 착각으로 보는 저 무한대의 허공체가 온통 그대로 이 마음 하나뿐인 것이다.

유와 무의 상대적 입장에서 본말과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의논의 말을 끝맺을 수가 없는 농담 희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똥과 같은 것이니 담아다가 버리게 한 것이다. 우리의 여래장인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며, 비교 고요하여서 한 법도 간직한 것이 없으므로, 또한 불성도 마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저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그것이 또한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누가 불도를 배우고 닦아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소견이라는 불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어떤 바보가 있어서 말하되 내기 이러이러한 기회에 어느 선지식을 만나서 그 스님이 눈썹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문득 도를 알았다고 하며 달마선의 이치를 증오체득하였다 하여 풍을 치고 도인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선지식을 만나서는 한 마디도 입을 벌리지 못하고 도무지 마음이 깜깜하여 칠흑같이 되고말며,그러나 어쩌하다가 한 마디의 맞은 듯 하며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날뒤며, 만약에 대답을 못하고 남에게 눌리고 꺾였을 때에는 그 마음이 불안하여 어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나니 그러한 덜된 정신을 가지고 달마선을 배워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경우도 닿지 아니하는 일이다.

만사에 등한하여 무사히 지내가며 쓸데없는 망상을 내지 말며, 또한 진리를 구하지도 말고 다만 무슨 소견이든지 다 버려라. 버리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안으로 이 마음을 살피려는 소견이나 밖으로 진리를 구하려는 생각까지도 버려라.

마도나 불도나 할것없이 다 악도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유무만유를 통 묶어서 그것이 오직 하나뿐인 이 마음의 살림살이인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는 부처님에 대한 소견을 막 내자마자 홀연히 그 몸이 철위산속에 빠져 있어 보인 것이다.

문수보살은 큰 진리의 실지이며 보현살은 방편의 권지이라. 보현보살은 권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고 문수보살은 실지로써 그 마음을 다스렸지만 필경에는 권지와 실지가 다 이 평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애초에 부처도 중생도 아니어서 아무 분별이 없는 청청한 진리이기 때문에 만약에 부처의 소견을 일으킨다면 문득 중생의 소견이 앞선다.

유무이거나 단상이거나 한 소견의 주관을 일으키면 곧 객관의 세계가 벌어진다. 주관 객관은 곧 한 물건의 양면인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소승, 대승 나누는데 소승의 아라한도는 소승불교의 성위로서 곧 번뇌를 끊어가지고 망상을 쉬고 쉬고 하여 번뇌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남음이 없으면 이것이 나한인데 소승은 이것을 소승열반이라 하는데 대승에 비해 마음의 경계가 적으므로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소승이라 한 것이다. 이들은 번뇌망상만 끊으면 된다는 지론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 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다. 선지식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그런 사상이다. 완전한 대성자가 되기 전에는 감기몸살이 들면 쌍화탕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모든 소득이 있는 것이 목표다. 나머지는 다 허튼소리고 육도만행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서 다른 종교처럼 천당에 가서 늘 편안하게 살려고 하느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가 되기 위해서는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이다.

대승불법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다 되어 있으니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쉬라는 것이다. 소승불법모양 저 혼자 나한이 되어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초견성만 해도 할 수 있다. 남의 상좌가 잘못하면 때리고 그런 가운데 그걸 초월해서 종일 만나 시비를 하였지만 나는 만나 일 없고 시비한 일없고 그런 심정에서 얘기해 주고 가르쳐준다. 그 사람은 물론 얘기해도 안한거고 얘기 안해도 안한 것도 없다. 이것이 대승불법이다.

대승불교의 이런 큰 불법을 성취하려면 이 몸뚱이를 초월하여 남 잘되면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도대체 남의 말 잘안 듣는 그런 중생들 틈에 끼어 그 사람들을 착하게만 만들고 불법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 그 공이 내게 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무주상보시하라. 이것이 대상사상이다.

세존께서 49년간이나 어두운 중생들을 위하사 일러주신 진리의 불법을 자세히 듣고 철처히 배우자. 그리고 또한 깊이 생각하여 밝게 따져서 할 일과 하지 못할 일을 철저히 분간한 다음에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개척할 것은 개척하여 하루빨리 중생을 구제하며 대도를 성취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

불교는 신비 속에 숨어 있는 객관성의 진리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이 마음이 곧 불교이기 때문이다. 왜? 이 마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 마음!마음!마음!과연 알기 어렵다. 모든 일에 주체성일 뿐이다. 이 마음! 아예 마음 깨달음을 말라. 이 마음!알고자 하면 벌써 둘이 된다.

둘이면서 또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이나 말이다. 어렵다. 어렵지만 신비는 아니다.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 마음 바로 이놈 보고 안 생각하면 된다. 곧 이놈이다. 이 마음이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아니한 이 마음!이놈!물질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다. 유무를 초월했다.

무엇인고! 알고자 하면 이 마음은 생각으로 변한다. 그러나 변한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살피자, 곳 그것이다. 이놈이다. 어렵다. 어려워! 그러나 어렵게 되어서 어렵게 된 것은 아니다. 쉬울 것도 없이 쉬운 것이다. 왜? 곧 너고 나다. 주인고이여! 주체성이여! 살펴라 챙겨라 너다 나다 이러고 보니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무사태평이다. 뛰고 놀아라 춤추고 노래부르자. 천지의 근원이요 만물의 바탕이다. 제발 이 주인공님아!

이 세상이 다 무상하고 여기는 고해고 불붙은 집이고 그러니 아예 방심하지 말고 네 일좀 해야지 만날 육체, 몸뚱이 그렇게 가꾸어줘 봐야 갈 때는 헛수고했다고 인사도 안하고 나를 배반하고 가는 놈이니 그놈만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아라. 나도 평생에 염불해서 이런 좋은 수가 있지 않느냐. 90장수도 하고 병 안앓고 꼬부라지지도 않고 그리고 가는 날짜 알고 내가 지금 말만 떨어지면 간다.

곧 갈 시간이 되었어. 이러니 너희들도 그랬으면 좀 좋겠느냐. 2달이고 1년이고 드러누워 똥을 받아내고 이래 놓으면 그 무슨 꼴이냐. 너희한테도 벌어먹을 것도 못 벌어먹고 모자간에 사로 정도 떨어지고 얼마나 나쁘냐. 부디 신심으로 염불도 하고 부디 그렇게 해라.

일체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부터 대학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개체성장이 확실히 있다. 그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평생토록 기억하여 이용을 해야 하는 소득이 있다. 그렇지만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 자부터, 소승불교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학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을 목표로 한다.

중생들이 탐진치삼독주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하고 온갖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가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아공이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런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이다.
부처님의 법공이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자식을 다 놓아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리가 나타난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니다.

이렇께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이다. 오래 익혀온 모든 지식과 사상과 고집물을 남김없이 모조리 버려야 한다. 유마 거사는 (나는 모든 소유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법화경)에는 (과거 20년동안 의 설법은 우선 집안의 똥이나 치우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마음 가운데에 지니고 있던 모든 생각과 소견이나 일체 주의주장을 몽땅 버리게 하신 말씀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의 본래 마음자리가 곧 도인 것을 잊어버리고, 또리어 이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부정하고 드디어 달리 따로 법을 구하여 깨달으려고 한다. 온갖 공을 들여 갖은 수행을 다 닦아서 점차로 도를 깨쳐가자고 한다면 아러한 사람은 억만겁을 부지런히 닦아도 영원히 불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망상과 욕심으로 먹는 것이요, 둘째는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 것이다.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다는 것은 육신을 거두기 위하여 주는 대로 생기는 대로 받아 먹을 뿐이고, 평생에 별로 음식에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망상과 욕심으로 맛좋은 음식만 찻아서 온갖 망상으로 오직 입에 맞는 것만 찾아서 양껏 먹고도 허덕거리는 것을 말한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만 보아도 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곧 이 마음이 청정하여 한 생각의 망상도 일어나지 않으며, 무엇이나 애착하는 일이 없으면 모든 망상이 봄바람에 눈 녹아내리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에 생멸하는 잡념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곧 부처이다. 부처님께서 8만4천법을 마련하신 것은 저 어두운 중생들의 8만4천의 사견망상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저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여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을 메꾸어야 한다.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어서 거금이 아니고 현장이 아니고 모두가 아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데 우주 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아고 저기 선 것이 여기다.

이와 같이 포개 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힌 신통이다.

淸潭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