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05.실제에 들어감

05.실제에 들어감

그 때에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이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면 가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후세의 그릇된 때에 진여에 응하여 설법하면 때(時)의 이익이 갖추어지지 않겠지만, 순(順)으로도 말하고 역(逆)으로도 말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고 여실한 말로써 온갖 가지 情과 지혜를 가진 유정들을 이끌어서 살바야의 바다(薩波若海, 일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여, 제도 받을 만한 중생들로 하여금 저(六진 경계의 헛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하고, 모두 한맛의 대 열반을 바라게 하여야 한다.

세간은 세간이 아니고 머무는 곳은 머무를 곳이 아니므로, 五空에 출입하되 취함과 버림이 없게 한다. 그 까닭은, 모든 법의 空相은 성품이 有.無가 아니고, 無.不無(없지 않음)도 아니며, 無(없음)도 아니고 有(있음)도 아닌 것은 결정된 성품이 없어서, 있다(有). 없다(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저 有.無는 범부와 二승 성인의 지혜로써 능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 모든 보살들이 이 요체(利)를 알면 곧 정각을 얻는다.’

그 때에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대력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五空에 출·입하되 취사함이 없다]하셨는데, 어떤 것이 五空이기에 취사하지 아니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五空이란 (一) 三有가 空 (二) 六도의 영상(影像)이 空 (三) 法相이 空 (四) 名·相이 空 (五) 심식의 의미가 空이다. 보살이여, 이런 것 등의 空은 空이 空에 머물지 않고, 空은 空相이 없어서 모양 없는 법이거늘 어떻게 취함과 버림이 있겠는가! 취함 없는 경지(無取地)에 들어가면 곧 三空에 든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三空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三空이란 (一) 공한 모양(空相)이 空함 (二) 공이라는 공(空空)이 空함 (三) 공 하다는 것(所空)도 空함이다. 이러한 공들은 세 가지 모양(즉, 三空相)에 머물지 않으며 진실이 없지 않으나 글과 말의 道가 끊어졌으므로 헤아릴 수 없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이 모양(즉, 三空相)은 응당 있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음(無)은 없음(無)에 머물지 않고, 있음(有)은 있음(有)에 머물지 않으므로, 없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다. 있지 않은 法이라고 곧 無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없지 않은 相이라고 곧 有에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有.無로써 설명하여 道의 이치를 취할 수는 없다. 보살이여, 이름과 의미가 없는 모양은 불가사의하니, 그 까닭은 이름 없는 이름이라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의미 없는 의미라고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의미는 진실한 진여의 相이며 여래의 진여의 相이나, 진여는 진여에 머물지 않고 진여는 진여의 相이 없사옵니다. 진여의 相에는 진여가 없다고해서 여래 아닌 것이 아니고, 중생의 心相은 心相 역시 여래이므로 중생의 마음도 응당 다른 경계가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그 까닭은,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리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六진에 물들었기 때문에 三界라 하고, 三계의 마음을 다른 경계라 부르지만 이 경계는 허망하여서 마음에서 변화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도 없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경계가 나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청정할 때 응당 三계도 없을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마음이 경계를 내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에서 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이는 마음이므로 마음이 幻같이 변화하지 않으면 곧 보이는 것도 없어진다. 보살이 안으로 중생이 없고 三性이 공하고 고요하면 곧 自性중생도 없고 다른 중생도 없으며,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 이르면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이익을 얻으면 곧 三界가 없어진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들어감이길래 마음을 내지 않사옵니까? 마음은 본래 나지 않거늘 어찌하여 들어감이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들어감이란 (一)이치로 들어감(理入) (二) 행으로 들어감(行人)이다.

첫째, 이치로 들어감이란, 중생(의 성품)이 참 성품(眞性)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고 한가지도 아닌 것은 다만 객진(客塵)에 가리워있기 때문임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게 마음을 모아 각관에 머물러 불성을 자세히 관찰하되 [(불성은)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님]을 알아서 금강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고 함이 없이(無爲)하고 분별을 없앰인데, 이것을 이치로 들어감이라 한다.

둘째, 행으로 들어감이란, 마음을 기울이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마음의) 영상을 흘리거나 바꿈이 없으며, 있는 처소에서 생각을 고요히 하고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 듯 쳐도 움직이지 않기를 大地와 같이 하며, 마음과 나를 버리고 여이어서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며, 生도 없고 相도 없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음이다.

보살이여, 마음은 드나듦(出入)이 없고 드나듦이 없는 마음은 들어감이 아니지만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보살이여, 이렇게 법에 들면(진여의) 法相은 공하지 않으며, 공하지 않은 법은 헛되거나 버릴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없지 아니한 법은 공덕이 구족하여,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법 그대로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법 그대로가 청정한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한 진여의 법은 마음과 식의 법(心識法)이 아니며, 마음의 부림에 딸린 법(心所法)이 아니며, 공 모양의 법(空相法)이 아니며, 색 모양의 법(色相法)이 아니며, 마음의 유위의 불상응법(心有爲不相應法)이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心無爲相應法)이 아니며, 나타난

영상(所現影)도 아니며, 드러내 보여진 것(所顯示)도 아니며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의미에는 진여가 없기 때문이다.

진여가 없는 법은 또한 진여가 없다는 것도 없고, 진여가 없다는 것도 없으므로 진여가 없다는 것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근본이치의 법은 이치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며 그 모양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맑은 법은 나게함으로써 나는 것이 아니며, 멸하게함으로써 멸하는 것이 아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이러한 (진여의)법상은 합하여 이룬 것 아니고 홀로 이룬 것 아니며, 굴레 씌운 것 아니고 옭아맨 것 아니며, 모은 것 아니고 흩어진 것 아니며, 나는 것 아니고 멸하는것 아니며, 또한 오는 모양과 가는 모양이 없으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부사의한 마음은 마음역시 그러하니, 그 까닭은 진여는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진여]이기 때문이다. 중생과 불성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성품이 본래 열반(=적멸)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본래 진여이니 진여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法相이 인연따라 생김이 없고, 생기는 法相의 성품도 진여이니 진여는 움직여짐이 없기 때문이다. 인연의 性.相은 性.相이 본래 空하고 없으며, 인연과 인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법이 인연에서 생김이 없다.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이 허망하게 본 것이므로 나타난 것은 본래 나지 않음이니, 인연은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진여법의 이치는 자체가 空.無함이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본래 머무는 곳이 없다.

범부들은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보지만 如如(=眞如)의 모양은 본래 있다. 없다가 아니다. 있다.없다의 모양은 오직 보이는 심식일 따름이다. 보살이여, 이러한 마음진여법은 자체가 없음도 아니고 자체가 있음도 아니므로,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다.

보살이여, 없거나 없지 아니한 모양은 말의 경지가 아니다. 그 까닭은, 진여의 법은 허공같이 광대하며 모양이 없으므로 二승들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허공 경계는 內外를 헤아릴 수 없으므로 六行의 선비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六行이온지 원컨대 말씀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 십(十)신행

둘째, 십(十)주행

셋째, 십(十)행행

넷째, 십(十)회향행

다섯째, 십(十)지행

여섯째, 등각행 이다. 이러한 수행자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드나듦이 없지만 어떠한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 수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은 그 법이 끝이 없으므로 끝없는 마음으로라야 곧 실제에 들 수 있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끝없는 마음의 지혜는 그 지혜가 끝이 없고, 끝이 없는 마음은 자재함을 얻을 것이요, 자재한 지혜로써 실제에 들어갈 것이옵니다. 저 범부들처럼 마음이 약한 중생들은 그 마음에 헐떡거림이 많으니, 어떠한 법으로써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얻어 실제에 들게 하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마음이 헐떡거리는 이는 안과 밖의 부리움 때문인데, 부리움에 따라 (식의 종자가) 흘러 들어가 방울방울이 모여 (장식에서 번뇌의) 바다를 이룬다. 큰 바람이 북치듯이 불어 (식의) 물결이 치면 (무명식심) 큰 용(大龍)이 크게 놀라는데, 이 놀라는 마음 때문에 헐떡거림이 많은 것이다. 보살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셋을 있게 하고 하나를 지켜서 여래선(如來禪)에 들게 하면, 선정으로 인해서 마음의 헐떡거림이 곧 없어진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셋을 있게 하고 하나를 지켜서 여래선에 드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있게 한다는 것은 三해탈을 있게 함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한 마음의 진여를 이치로 관찰함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면 곧 실제에 든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三해탈법이란 어떤 것이며, 이치로 관찰하는 삼매(理觀三昧)는 어떠한 법으로부터 들어가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三해탈이란 첫째, 허공해탈. 둘째, 금강해탈. 셋째, 반야해탈이고, 마음을 이치로 관찰한다 함은 마음을 이치와 같이 맑혀서 마음 아닌 것이 없게 함이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해탈의 효용이며 어떤 것이 관찰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실사(實事)가 둘이 아니면 이것을 해탈의 효용이라 하고, 안의 행과 밖의 행, 낢과 듦이 둘이 아니며, 한 모양(一相)에도 머물지 않으며, 마음에 얻고 잃음이 없으며,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경지(一不一地)에 맑은 마음으로 흘러듦을 관찰(觀)이라 한다.

보살이여, 이러한 사람은 두 형상(二相)에 있지 않으니, 비록 출가한 것이 아니지만 재가(在家)에 머물지 않으며, 비록 법복이 없고 파라제목차계(戒)를 지니지 않으며, 포살에 들지 않지만, 능히 자기의 마음으로써 무위이고 자유롭게하여 거룩한 과(聖果)를 얻어, 二승에 머무르지 않고 보살도에 들며, 뒤에 보살지를 다 채우고나서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출가한 것도 아니고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니옵니다. 그 까닭은, 열반의 집에 들어, 여래의 옷을 입고, 깨달음의 자리에 앉은 때문이니, 이러한 사람은 사문들까지라도 응당 공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그러한 사람은)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으로 三界를 초월하고, 여래의 옷을 입고, 법이 공한 곳에 들어, 깨달음의 자리에 앉아서 정각의 첫 지위(正覺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으로 二승을 초월하였거늘 어찌 사문인들 공경하고 공양하지 않으랴!’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그와 같은 정각의 첫 지위와 공의 바다(空海)는 二승들이 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二승들은 삼매에 맛들여 집착하고, 삼매의 몸(三昧身, 멸진정에 들어 유루의 智.心을 멸하여 생긴 멸진정의 몸)을 얻어, 저 空海의 한 경지에서-마치 술병(酒病)을 얻어서 잔뜩 취하여 깨지 못함 같이-(삼매의 술에 잔뜩 취해서 깨어나지 못하여) 몇 겁을 지나도록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삼매의 술 기운이 가신 뒤에 비로소 깨닫고는, 바야흐로 이러한 六行을 닦고나서 부처의 몸(佛身)을 얻는다.

저와 같은 사람(즉, 六行의 大士)은 일천제에서 벗어나 바로 六行에 들어가서, 행하는 경지에서 한 생각 맑은 마음이 경정명백하면, 금강같은 지혜의 힘으로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되 자비심이 끝이 없으리라.’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응당 계를 지니지 않으리니, 저러한 사문은 응당 공경하고 우러러보지 말아야 하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말하는 것은 착하지 못함(不善)과 아만(我慢) 때문이며 마음바다(心海)의 파랑(波浪) 때문이지만, 저러한 사람의 마음자리는 八식의 바다가 맑고 고요하며 (등渟)은 九식의 흐름이 맑아서, 바람도 움직이지 못하고 파랑도 일지 않는다.

계의 성품은 허공과 같으므로 지니는 이는 미혹하고 뒤바뀌거니와, 저러한 사람은 七.六식이 나지 않으며 모든 쌓임(集, 五온)이 멸하여 안정되었으며, 세 부처님(三佛)을 여이지 않고 깨달음을 내며, 세가지 모양 없음(三無相) 가운데서 마음을 길들이어 깊은 곳에 들어가며, 깊이 三보를 공경하여 위의를 잃지 않으므로, 저러한 사문에게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보살이여, 저 어진이는 세간의 동법.부동법에 머물지 않고, 三空에 들어가 三계의 마음을 멸하였다.’

대력보살이 사뢰었다.

‘저 어진이는 (一) 과만족덕불 (二) 여래장불 (三) 형상불 등 이러한 부처님들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내고 三취계에 들어갔으나 그 계의 모양에 머무르지 않으며, 三有의 마음을 멸하였으나 적멸한 경지에서 살지 않고, 제도할 만한 중생을 버리지 않아 고르지 못한 땅(즉, 六도의 거치른 땅)에 들어가오니, 실로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그 때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반야의 바다를 구족하시고도 열반성에는

안 머무시니 흡사 미묘한 연꽃이

높은 땅에서 아니남 같네.

모든 부처님은 한량없는 겁에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건진 뒤 얻으시니 진흙에서

연꽃이 핌과 같도다.

저와 같은 六行의 경지는

보살들이 닦을 바요 저러한 三空의 모임은

보리의 참된 도이어라.

나는 이제, 머물고 안 머물기를 부처님

말씀대로 하리니 온 곳으로 되돌아 와서

구족한 연후에 벗어나리라.

다시 모든 중생들이 나와 같게 하리니

앞에 오는 자나 뒤에 오는 이들

모두 정각에 오르게 하리.

그 때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헤아릴 수 없구나. 너는 반드시, 오는 세상에 보리도를 완성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고통바다(生死苦海)에서 뛰어넘게 하리라.’

그 때에 대승의 무리들은 모두 보리를 깨달았고, 뭇 소승의 무리들은 五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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