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04.근본 깨달음의 이익

04.근본 깨달음의 이익

그 때에 무주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맛 진실 불가사의한 법문을 들으면서, 먼곳에서부터 가까이에 와서 여래의 자리 근처에서 전렴(專念)하여 자세히 듣고, 청백(淸白)한 경지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로부터 와서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근본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지금 근본 없는 곳에 이르렀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본래 어디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또한 어디에 이른 것도 아니다. 너는 본각의 이익인 불가사의함을 얻은 대보살마하살이로다.’

곧 큰 광명을 놓아서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거룩하다 보살이여!

지혜가 원만 구족하여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네.

네 가지 위의에서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온갖 중생을 인도하여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게 하네.

그 때에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이익으로 운전하여 중생들이 온갖 情과 識을 굴리어 암마라식에 들게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여래는 항상, 하나인 각(一覺)으로써(중생들의) 모든 식을 굴리어 암마라에 들게 하시는데,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의 본래의 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항상 一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깨우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하고, 모든 情과 識이 공하고 고요하며 無生임을 깨닫게 한다. 그 까닭은, 결정된 본 성품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식은 모두 경계를 인연하여 일어나거늘 어찌하여 (결정된 본성품이) 움직이지 않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가 본래 공하고, 일체의 식이 본래 공하며, 공한 것은 인연의 성품이 없거늘 어찌하여 인연에서 일어나랴.’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다면 어찌하여 보임이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이 곧 허망하다. 그 까닭은, 일체 만유(=온갖 존재)가 生함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본래 제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두 다 공하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法相도 역시 그러하고, 일체의 중생의 몸도 역시 그러하다. 몸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어찌하여 보임이 있으랴.’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고, 일체의 몸이 공하고, 일체의 식이 공하다면 각도 응당 공 하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一각은 헐지도 못하고 깨뜨리지도 못하는 결정된 성품이므로, 空함도 아니고 不空함도 아니어서 空.不空이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모든 경계도 역시 그러하여 空相도 아니고, 無空相도 아니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경계라는 것은 성품이 본래 경정되었으며, 경정된 성품의 근본은 처소가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깨달음도 역시 그러하여 처소가 없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깨달음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한 것은 깨달음이 없다. 사물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청정한 것은 形色이 없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마음과 눈과 식도 역시 그러하여 불가사의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눈과 식도 역시 그러하여 불가사의하다. 그 까닭은, 形色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봄(見)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마음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위가 없으므로 일어나는 곳이 없고, 식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반연하고 분별함이 없다. (六진.六근.마음.식의) 성품이 모두 공적하며 성품은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깨달음이 된다.

선남자야,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모든 식이 곧 들어간다. 그 까닭은, 금강지혜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가 (모든 식의 종자를) 끊기 때문이다. 끊고나면 머무름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心識의) 출.입이 없고 마음의 처함이 없는 경정된 성품의 경지는 그 경지가 청정함이 맑은 유리와 같고(大圓鏡智), 성품이 항상 평등함이 저 大地와 같고(平等性智), 깨닫고 묘하게 관찰함이 지혜의 햇빛과 같고(妙觀察智), 이익을 이루어 본각을 얻게함이 큰 법비(大法雨)와 같다(成所作智).

이러한 지혜에 든 이는 부처의 지혜 경지(佛智地)에 든 것인데, 이 지혜의 경지에 든 이는 모든 식이 나지 않는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一각의 거룩한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는 곧 일체 중생의 本根인 각(本覺)의 이익이옵니다.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의 몸 가운데에 본래부터 원만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 까닭은, 일체 중생이 본래 무루(無漏)이고 모든 좋은 이익의 근본이지만 지금은 항복시키지 못한 탐욕의 가시가 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만일 중생이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서 오히려 (번뇌와 업의 종자를) 캐 모으고 있다면, 어찌하여야 조복받기 어려운 것을 항복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번뇌와 업의 종자)를 모으거나 홀로 행하면서, 분별하거나 물들거나 하면, 정신을 돌려 공의 굴(空窟)에 두면, 조복받기 어려운 것을 항복받고 모든 탐욕의 가시를 멀리 여이어 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연히 노지(露地)에 앉아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리라.’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오직 一각뿐이고 諸識이 없으므로, 항상 열반에 머뭄이 응당 해탈이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무름은 [열반에 얽매임]이다. 그 까닭은, 열반은 본각의 이익이고 각의 이익은 본래의 열반이며, 열반은 각의 공덕 즉 본각의 공덕이고, 각의 성품은 다르지 않고 열반도 다름이 없으며, 각은 본래 무생이고 열반도 무생이며, 각은 본래 무멸이고 열반도 무멸이며, 열반과 각은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얻을 것 없는 것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얻을 것도 없거늘 어찌하여 머물 것이 있으랴.

선남자야, 깨달은 이는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그 까닭은 본래 무생임을 깨달아서 중생의 때(垢)를 여의었고, 본래 무적(無寂)임을 깨달아서 열반에의 움직임을 여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 머물면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고 드나듦(出入)이 없어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암마라식은 들어갈 곳이라면, 곳이란 얻을 바가 있으므로 이것은 얻는 법(得法)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까닭은, 비유하면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시방을 두루 떠돌아다니면서 五十년이 지나도록 빈궁하고 곤고하여 오로지 먹을 것만 구하여 몸을 보양하려 하였으나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보고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돈을 쥐고 있으면서도 왜 쓰지 않는가? 네 뜻대로 필요한 것을 모두 충족시키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깨닫고 보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어리석은 아들아, 너는 너무 기뻐하지 말아라. 네가 지닌 돈은 네게 본래 있던 재물이고 새삼스럽게 얻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기뻐하는가?’ 함과 같다. 선남자야, 암마라식도 역시 그러하여 본래 나간 모양(出相)이 없고 지금도 들어감이 아니다.

예전에 모를 때도 없는 것이 아니었고, 지금 깨달았다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저 사람의 아버지가 그 아들의 미혹함을 알았다면 어째서 五十년이 지나도록 시방으로 헤매면서 빈궁하고 곤고한 뒤에야 비로소 말하였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五十년을 지냈다함은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말하고, 시방에 헤맸다 함은 멀리 변계(=쓸데없는 분별)를 부린 것을 말한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임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생각의 마음이 움직이면 五음이 함께 나고, 五음이 함께 나는 중에는 五十가지 악(惡)이 갖추어져 있다.’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멀리 변계를 부리어 시방을 헤매고, 한 생각의 마음을 움직임에 五十가지 악이 갖추어진다면, 어찌하면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한 생각도 남이 없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어 금강地에 머무르게 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고 일어남이 없게하며,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평하게 하면 곧 한 생각도 남이 없게 되리라.’

무주보살이 사뢰었다.

‘불가사의 하옵니다. 깨닫고 생각함이 나지 않으면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함이 곧 본각의 이익이옵니다. 본각의 이익은 변동이 없으므로 항상 있어서 없어지지 않으며, 있는 것은 없으나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은 아니나 깨달을 것도 아니옵니다. 깨달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본래의 이익인 본각 이옵니다. 각은 청정하고 물듦이 없으며, 변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결정된 성품이므로 불가의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무주보살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 일찍 없던 것을 얻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거룩하신 대각 세존께옵서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말씀하셨네.

생각 없고 생멸 없는 마음은 마음이

항상하고 무궁하여 멸치 않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모든 본각자를 이롭게 하나,

마치 돈을 얻었다는 이와 같아서

얻은 것이 얻은 것 아니라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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