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03.생각 없는 행

03.생각 없는 행

그 때에 심왕보살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三계를 벗어나 불가사의한 경지에 들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물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세상에서 벗어나 모양 없으니

모든 중생들이 누구나 다 번뇌의 흐름을 끊어오리다.

번뇌의 결박 끊어 마음과 내가 공하면

이것이 곧 남이 없음(無生)인데

어찌하여, 남이 없는데 남이 없음을

앎(無生忍)을 얻사옵니까?

그 때에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무생법인이라 함은 법이 본래 무생이고 모든 행이 무생(임을 앎)인데, 生과 行이 없지 않은데 무생인을 얻는다는 것은 허망하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인을 얻음이 허망하다면, 얻음도 없고 앎도 없으면 응당 허망치 않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까닭은, 얻음도 없고.앎도 없다하면 이는 곧 얻음이 있음이니, 얻음이 있고 앎이 있으면 이는 곧 유생(有生)이다. 얻음에서 生이 있으므로 얻는 바가 있는 법은 모두 허망하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앎이 없고. 남이 없는 마음이길래 허망치 않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없고 남이 없는 마음은 마음의 형단(形段=形體)이 없음이 마치 불의 성품과 같다. 불의 성품이 비록 나무 가운데 있으나 그 처소는 결정성이 없는 까닭에 다만 이름과 글자만 있을 뿐 성품은 얻을 수 없고, 그 이치를 설명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이름을 말하나 이름조차 얻을 수 없다. 마음의 모양도 역시 그러하여 처소를 볼 수 없다. 마음이 이와 같음을 앎이 곧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을 앎이다. 선남자야, 이 마음의 性과 相은 또한 아마륵 열매와 같으니, 아마륵 열매는 본래 스스로 생긴 것 아니고, 다른 것에 따라 생긴 것 아니며, 함께 생긴 것 아니고, 因에서 생긴 것 아니며, 無生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연은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생겼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멸하는 것 아니니, 숨고 나타남이 모양이 없고, 근본이치는 적멸하며 있는 처소가 없고 머무는 곳은 볼 수 없으나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된 성품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끊어짐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니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네가지 비방(즉, 一. 異, 斷. 常, 入. 出, 生. 滅)을 여이어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 無生心 (生함 없는 마음)의 성품도 역시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난다. 안난다, 안다. 모른다라고 말하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은 얻을 수 있고, 머무를 수 있고, 볼 수 있다’ 고 한다면, 이는 아누다라샴먁삼보리 반야를 얻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길고 긴 밤이다.

마음의 성품(心性)을 요별하여 心性이 이와 같음을 알고 心性이 또한 이와 같으면, 이것이 生함과 行함이 없음(無生行)이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만일 본래 진여라면 行을 냄이 없고 모든 行이 남이 없을 것이니, 生과 行이 나지 않아서, 나지 않고.行이 없음이 無生行이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무생으로써 무생함을 깨닫겠는가?’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아니옵니다. 그 까닭은, 진여의 무생행은 性과 相이 공하고 고요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말도 없고. 말함도 없고, 앎도 없고. 모양도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거늘 어떻게 깨달음을 취하겠사옵니까? 만일 깨달음을 취한다면 곧 다투고 논함(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만 무생행일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없사옵니다. 그 까닭은, 보리(覺)의 성품 가운데는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고, 분별의 모양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분별없는 가운데가 곧 청정한 성품이며, 청정한 성품은 사이와 잡물이 없고, 말과 말함이 없고,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앎도 아니고, 알지 못함도 아니옵니다. 온갖 좋은 法行도 역시 이와 같사옵니다.

그 까닭은, 일체의 좋은 법행은 처소를 볼 수 없으나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얻음과. 얻지 못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일체의 心行은 모양 없음(無相)에 지나지 않고 자체가 空하고 고요하여 無生이며, 모든 식(識)도 역시 그러하다. 그 까닭은, 눈. 눈의 닿음이 모두 공하고 고요하며 눈알음(眼識)도 역시 공하고 고요하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 없으며, 안으로 세 느낌(三受, 苦受樂, 受捨受)이 없고 세 느낌이 적멸하며 귀 코 혀 몸, 심. 의. 의식, 그리고 말나 아뢰야도 역시 그러하여 모두 나지 않으면 적멸한 마음(寂滅心)이요 무생의 마음(無生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적멸하다는 마음을 내거나 무생이라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有生行이지 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三受와 三行과 三戒가 생긴다. 만일 적멸이 생기어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고, 功도 없고 用도 없으며, 적멸相을 깨닫지도 않고 또한 깨달음이 업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가히 無住에 처하여 無相을 거두어지니면 곧 三受가 없고, 三受. 三行. 三戒가 모두 적멸하면 청정하여 머무름이 없고, 삼매에 들지 않고 좌선에 머무르지 않으면 生도 없고 行도 없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선(禪)은 능히 요동을 거두고 모든 환난(幻亂, 환술같은 어지러움)을 고요히 그치게 하거늘, 어찌하여 선을 하지 않는다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선(禪)이 곧 동(動)이므로, 動하지 않고.禪하지 않는 것이 無生의 禪이다. 선의 성품은 無生이므로 선을 내는 모양을 떠나야 하고, 선의 성품은 無住이므로 선에 머무르려는 움직임을 떠나야 한다. 만일 선의 성품은 動.靜이 없음을 알면 곧 無生을 얻는다. 무생의 반야는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고 마음도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로써 무생의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심왕보살이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생의 반야는 온갖 곳에 머무름도 없고 온갖 곳을 떠남도 없으며, 마음도 머무는 곳이 없고 마음을 머물 곳도 없사옵니다. 머무름 없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나거나 머뭄이 없사옵니다. 이와같이 마음을 머뭄이 곧 無生에 머뭄 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無生에 머뭄은 불가사의한데, 불가사의한 가운데는 가히 말할 수 없겠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심왕보살이 이와같은 말씀을 듣고, 미증유한 일(=일찍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지혜 만족하신 세존께옵서

널리 무생법을 말씀하시니

일찍 못 들은 것 들었고

말하지 않으신 것 말씀하셨네.

마치 청정한 단이슬(甘露)이

때때로 한 번 나오듯

만나기도 어렵고 생각키도

어려우며 듣기도 역시 어렵다네.

위 없는 좋은 복밭은

최상의 승묘한 약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방금 말씀하셨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모두 無生과 무생반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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