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31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여 삼계의 중생들이
세간에서 견도문(見道門)을 수행할 적에 끊어야 할 의혹을 없앴다.
그러나 아직도 여섯 가지의 감각중에 오랫동안 생긴 과거로부터의
허망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그 습관은 수도를 통하여 끊어야만 되는 것이니, 그 가운데 나고
머무르고 변하고 없어지는 분제(分劑)와 두수(頭數)이겠느냐?
너는 또다시 살펴 보아라.
앞에 나타난 여섯 가지 감각은 하나이냐 여섯이냐?
아난아!
만약 하나라면 귀로는 왜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왜 듣지 못하며,
머리로는 왜 다니지 못하고 발은 왜 말하지 못하느냐?
만약, 여섯 가지 감각이 여섯을 이룬다면, 내가 지금 이 모임에서
너희에게 미묘한 법문을 말할 때 너의 여섯 가지 감각중에 어느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난이 대답하기를
“저는 귀로써 듣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귀가 저절로 듣는데 몸과 입은 무슨 관계로 입으로 질문할 top
때 몸은 일어나서 공경하여 받드느냐?
그러므로 당연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 여섯이며 여섯이 아니라 하나이니,
너의 여섯 가지의 감각과 그 앞에 나타나는 대상이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당연히 알아야 한다. 이 여섯 개의 감각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 과거로부터 뒤바뀌어 빠져왔으므로 원만한
맑음에서 一이니 六이니 하는 것이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으로 비록 여섯 가지는 소멸하였으나 아직 한가지는
없어지지 못하였느니라.
큰 허공을 여러가지 다른 모양의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허공도 다르다고 하다가 그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 허공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허공이야 어떻게 너를 위하여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느냐? 더구나 어떻게 하나다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겠느냐?
네가 아는 여섯 가지 감각수용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어두움과 밝음, 두 가지가 서로 나타나므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보이나니, 보는 것은 빛을 비추어
그 빛이 맺혀져서 눈이 되니 그 눈의 근원은 청정사대로 이루어졌고, top
눈의 실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포도알과 같아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라 빛을 따라
흘러 달아나느니라.
움직이고 고요한 두 가지가 서로 부딛침으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듣는 것이 생기나니 듣는 것은
소리에 비치고 그 소리가 말려서 근(根)이 된다.
그 근원은 청정한 사대로 이루어졌고 그를 이름하여 이체(耳體)라
하니, 마치 새로 돋아나는 권이(券耳)의 잎새와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므로 소리를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통하고 막히는 두 가지가 서로 드러남으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냄새를 맡나니, 맡는 것이 향기에 비쳐
그 향기를 받아들여 근(根)이 되니, 그 근원은 청정한 사대로
이루었고, 비체(鼻體)라고도 하니, 이는 마치 두 개의 오이가
드리운 것과 같다.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므로
향기를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그대로 있거나 변화하는 두 가지가 서로 섞여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맛을 보나니 맡보는 것은 맛에
비쳐 그 맛을 짜내어 근(根)이 되니, 그 근원은 청정한 사대로
이루었고 설체(舌體)라고도 하니 이는마치 초생달과 같다.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므로 맛을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떠나거나 합하는 두 가지가 서로 부딪침으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느낌이 생기나니, 느끼는 것은
접촉에 비추고 그 접촉이 뭉쳐 근(根)이 되니, 그 근원은 청정한
사대로 이루었고 신체(身體)라고 하니, 이는 마치 장구통과 같다.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므로 감촉을 따라
치닫느니라.
나고 없어지는 두 가지가 서로 이어지므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top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깨닫게 되나니, 깨닫는 정기가 법에
비추어 그 법을 잡아 근(根)이 되고, 그 근원은 청정한 사대로
이루었고 의사(意思)라고 하니 마치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다.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이므로 법을 따라 치닫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은 밝은 깨달음의 밝음이 있는 밝혀야 할
깨달음으로 미세하고 또렷함을 잃고 허망한데 붙어서 빛을 발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밝음과 어두움을 여의면 보는 실체가 없을
것이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여의면 원래 듣는 바탕이 없을 것이며,
통하고 막힘이 없으면 맡는 성품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여의고
합함이 아니면 부딪쳐 느낌이 반드시 없을 것이며, 나고 죽음이
없으면 깨달음이 어디에 붙어 있겠느냐?
네가 밝고 어두움, 통하고 막힘, 그대로 있고 변함, 합하고 여윔,
나고 없어짐의 열 두 가지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을 따르지 아니하면
마음데로 한 감각을 골라 거기에 집착된 것을 벗겨내고 속으로
굴복시켜 이를 본래의 참된 상태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니 밝은 성품이 환하게 밝아지면 나머지 다섯 가지 집착도
선택에 따라 원만하게 벗겨질 것이다.
앞에 나타난 대상이 일으킨 지견(知見)을 따르지 아니하여 밝음이
감각을 따르지 않고, 그 감각에 의탁하여 밝음이 발생하면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감각이 서로 서로 작용하나니라.
아난아! 네가 어찌 알지 못하랴?
지금 이 모임 가운데의 아나율타는 눈이 없이도 볼 수 있고
발난타룡은 귀가 없이도 들을 수 있으며, 긍가신녀는 코가 없어도
냄새를 맡고 교범바제는 혀가 다른데도 맛을 알며, 순야다신은
몸이 없이도 감촉을 느끼나니, 여래의 광명이 비치므로 잠깐
나타나기는 하지만 본래가 바람의 체질이므로 그 몸은 원래
없으며, 멸진정(滅盡定)을 닦아 고요함을 깨달아 성문이 된
이 모임의 마하가섭 같은 이는 오래전부터 의근(意根)이 없어졌어도 top
원만하고 밝게 깨달아 앎에 있어 마음을 쓰지 아니하나니라.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각에서 원만하게 벗어나면 안으로 환하게 광명을
발하여 이러한 부질없는 대상과 기세간(器世間)의 모든 변화하는
현상들이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는 듯해서 생각을 따라 위없
는 깨달음을 이루리라.
아난아! 저 세상 사람들이 보는 힘을 눈에 집중시켰다가 갑자기
눈을 감으면 어두운 현상이 앞에 나타나 여섯 가지 감각이
캄캄하여 머리나 발과 같으리니,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더듬으면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인지 발인지를
분별하여 아는 것은 마찬가지니, 대상을 보는 것은 밝음을
인해야 하고 어두우면 볼 수 없거니와 밝지 않더라도 스스로
발하면 모든 어두운 현상이 영원히 어둡지 않으리니 감각과
그 대상이 이미 소멸되면 어찌하여 밝은 깨달음이 원만하고
오묘함을 이루지 못 하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처음 수행할 때의 깨닫는
마음으로 항상 머무르기를 구하고자 하면 과위(果位)의 명목과
서로 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 중에 보리와 열반, 진여와 불성, 암마라식과
공여래장, 대원경지등 일곱 가지 명칭이 그 이름은 각기 다르나
청정하고 원만해서 그 자체의 성품이 단단하게 엉킴은 마치
금강왕(金剛王)이 항상 머물러서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보고 듣는 것이 밝고 어둡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통하고
막힘을 여의면 실체가 없음이 생각하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는
대상을 여의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끈어 버리는 것을 수행하는 원인으로 삼아 여래의 일곱가지
항상 머무는 과업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만약 밝고 어두움을 여의면 보는 것이 공(空)하게 되어 앞에
나타나는 대상이 없는 것과 같으며, 생각의 자성이 없어진 것과
같으니, 이리 저리 순환하면서 미세하게 추구하여도 본래 나의
마음과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을지니 무엇으로 원인을 삼아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여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맑고 정밀한 것이 원만하고 항상하다’
고 하시더니 그것이 진실한 말씀이 못되고 농담같은 말씀이 되었으니
어떻게 여래가 진실한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데,
큰 자비를 베푸시여,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