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각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自說經』 1:1 菩提品)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마가다국에 머물면서 7년 동안이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런 끝에 라자가하(王舍城)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루베라의 네란자라 강(尼連禪江)기슭에 있는 핍파라(pip -pala) 나무 밑에서 마침내 그는 크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보리수 밑의 정각(正覺) 또는 대각 성취(大覺成就)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와 아울러 불교의 모든 흐름이 그 순간에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졌는가? 또 어떤 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 무릇 불교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이제 나는 새로운 시각에서 구명해 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내가 취택한 한 경전(「자설경」)은 그 결정적 순간의 그의 모습과 생각을 묘사한 다음 앞에 든 운문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나는 그 운문을 될 수 있는 대로 직역해 놓았거니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심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삼라만상이 그 진상을 드러냈을 때 의혹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주의해서 읽어 보면, 여기에 불교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명료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이라는 말을 음미 해 보자. 이 말의 원어는 avijja 이며, 그것은 무지·미망을 나타내는 말이거니와, 그것을 표현하는데 ‘무(蕪)’를 뜻하는 ‘a’와 ‘명(明)’을 뜻하는 ‘vijja’를 연결했다는 것은 무지(無智)란 곧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세의 불교 문헌들은 이런 생각을 “광명이 오면 어둠이 사라진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십이장경(四十二章輕)』의 일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대저 도(道)를 봄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어두운 방에 들어갈 때, 그 어둠이 없어지고 광명만이 남는 것과 같으니라.”
또 후세의 선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관타좌(只管打坐; 선종의 말. 오직 앉는 것뿐이라는 뜻. 즉 좌선에 임해서 깨닫겠다든지 무엇을 해결하겠다든지 하는 노력을 떠나, 무심히 그저 앉아 있을 때 그것이 도리어 참된 경지가 된다는 뜻)하여 신심 탈락(身心脫落;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할 때,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서(도홍유록(桃紅柳綠)에서 나온 말 ; 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바로 진리라는 뜻.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말) 삼라만상은 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일관하는 진리관이다. 이것은 고독한 사색가가 그 머리 속에서 얽어 낸 종류와는 다르다. 또는 흥분한 예언자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과도 다르다. 오직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 ;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며,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거니와, 이런 진리의 관념은 결코 불교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말하는 진리의 관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나(aletheia)’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덮여 있는 것(letheia)’에 부정의 접두사‘a’를 붙인 것이어서, ‘덮여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거기서도 역시 가려 있지 않은 존재의 진상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대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어떻게 함으로써 가려지지 않은 눈을 얻었고, 어떻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상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보리수 밑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7년에 걸친 긴 수행 기간을 별로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이것을 구명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마지막의 크나큰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시 한 번 이 장기에 걸친 수행을 돌아보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긴 수행 기간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출가의 단계이다. 오래 된 경전은 자주 “집에서 나와 집 없는 사문이 되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은 가정생활을 버리는 것과 함께 가사를 걸치고 사문으로서 살아감을 뜻하는바, 그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풍족한 가정생활의 포기요, 또 하나는 고귀한 사회생활의 포기이다. 고타마의 가정생활은 부유하고 행복했으며, 그 사회적인 신분은 크샤트리아에 속해 있었다. 만약 마음만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자진하여 버렸다는 것은 쉽지 않은 포기였음이 분명하다. 유럽의 불교 학자가 고타마의 출가를 번역하면서, 자주 ‘크나큰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라는 말을 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크나큰 포기’에 의해서 그는 우선 가정과 카스트(caste ; 사회 계급)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둘째 단계는 여러 도인들을 찾아 공부한 기간이다. 오래 된 경전에는 아라라 카라마(Alara-Kalama)와 웃다카 라마푸타(Uddaka-Rama putta)가 그의 스승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이른바 육사외도(六師外道 ; 붓다 당시의 여섯 명의 사상가. 그것이 정도(正道)가 아니라 하여 불교 쪽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그들 또한 그 당시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새 사상가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낡은 사상의 계보에 속하는 바라문(‘바라문’을 가리킴이니, 인도 고대의 정통적인 종교. 절대자인 브라만과 자아인 아트만의 합치를 주장했다)을 찾았다는 기록은 전혀 안 보이므로, 그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사상의 조류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이나 사상의 세계에서는 스승도 또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제자가 언제까지나 ‘스승의 제자’로서 멈추어 있어서는 사상의 새로운 전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타마는 차례차례 어느 스승이나 버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개척해 가고자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또한 보리수 밑의 정각에 이르는 필연의 과정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각을 향한 길이 곧바로 열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고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스승의 곁을 떠난 고타마는 꽤 오랫동안 고행에 의해 목적을 달성해 보려 애썼다. 고행이란 육체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신의 힘을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수행이다. 고대에는 어느 민족이나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인도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고질이라 해도 좋을 것이어서, 현재도 이러한 병폐는 그들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는 여러 가지 고행을 했다. 또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것을 행했다. 그러나 뛰어난 경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손발은 겨릅처럼 바짝 야위어 갔다. 뱃가죽은 등에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아마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고행이 정각에 이르는 정당한 방법일 수 없음을 간파(看破)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고행을 버리고 우유로 쑨 죽을 먹고 또 밥도 먹었다. 그것은 매우 중대한 단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행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사회에서 그 불합리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껏 그에 대해 찬탄해 마지않던 사람들도 그가 고행을 중지한 것을 보고는, 타락했느니 사치해졌느니 하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그런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체력을 회복하여 마가다국의 여기저기를 순회한 다음, 우루베라의 네란자라 강기슭에 이르러 그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앉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자리에서 크나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후세의 불교인들은 그가 깔았던 풀을 ‘길상초(吉祥草)’라 부르고, 그 않았던 자리를 ‘금강좌(金剛座)’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 앉은 다음부터 대각을 성취하기까지의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미망 즉 가려져 있던 것들은 이미 차례차례로 제거되고 말아, 그 자리에 앉은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의 눈을 가리는 것이라고는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던 까닭이다. 오래 된 경전은 흔히 이 사실을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리하여 가려진 것들이 제거됨으로써 활짝 열린 눈앞에 존재가 그 진상을 드러내 보일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저 결정적인 순간에만 넋을 빼앗겨서는 안 되리라. 오히려 눈을 돌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어떠한 장애물이 그의 눈으로부터 제거되었는지를 고요히 생각해야 할 줄로 아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