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01.석가족

1. 석가족

대왕이시여, 저 히마반트(雪山)의 기슭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하는 땅에 재물과 용맹을 아울러 갖춘 한 단정한 부족(部族)이 삽니다.

그들은 ‘태양의 후예’라 일컬어지고 내 생족(生族)의 이름은 사캬, 대왕이시여,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온갖 욕망을 쫒고자 했음이 아니라. (「經集」 3:1 出家經)

기원전 5세기경, 히말라야 기슭의 고원 지대, 오늘날의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카피라바투(Kapilavatthu)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었다. 중국의 역경자들이 ‘가비라위(迦毘羅衛)’라고 번역한 고장이다. 붓다는 이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살던 사캬 족의 크샤트리아(Ksatriya)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왕족 계급이었으며, 고타마(Gotama)가 그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경전은 자주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Gotama Sakya-putta)’라고 붓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물아홉 살쯤 되었을 때, 집을 나와서 사문(沙門)이 되었다. 그는 곧 갠지스 강(恒河)을 건너 남방에 있는 마가다(Magadha) 국으로 갔다. 마가다 국은 당시 신흥 국가여서 모든 면에 활발한 생기가 돌았으며, 그 수도 라자가하(王舍城,Raja-gaha)에는 자연히 새로운 사상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도 또한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사상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겠다.

한 경(「경집」 3:1 출가경)은 그 무렵 어느 날의 붓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붓다는 성도(成道)하시기 전 마가다국의 산에 에워싸인 서울로 가셨다.
참으로 아리따운 상호(相好)에 빛나시며 탁발(托鉢)을 위해 라자가하의 거리로 드셨다.

※ 상호 : 용모·형상. ‘상’은 드러나게 잘 생긴 부분. ‘호’는 그 세부적인 것. 붓다는 32상·80 종호를 갖추었다 한다.
※ 탁발 : 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는 것.

사문이란 팔리 어의 사마나(Samana), 또는 산수크리트의 슈라마나(Sra- mana)의 음사(音寫)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 무렵의 새 사상가와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모두 집에서 나와 전통적인 사회의 구속을 벗어난 다음, 자유로이 행동하고 사색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적으로 탁발과 공양(供養, 음식이나 옷 같은 것을 붓다나 수도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날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도 역시 사문의 이런 관행에 따라 라자가하의 거리에 나타나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Bimbisara)였다. 왕은 높은 다락에서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가, 이윽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경전은 그 전문을 게(偈, 불교의 이치를 나타낸 운문)로 기록하고 있거니와, 그것을 산문으로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모두들 저 사람을 똑똑히 보아라. 의젓하지 않은가! 그 용모와 행동거지로 볼 때, 아마 천한 출신은 아닌 것 같구나. 곧 누가 가서 저 사람 있는 곳을 알아 가지고 오너라.”

명을 받은 사신은 그 뒤를 밝았다. 그 사람은 탁발을 마치자, 교외에 있는 ‘판다라’라는 산의 동굴로 돌아갔다. 그 산은 라자가하를 에워싼 다섯 산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산에 에워싸인 서울(Giri -bbaja)’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왕이시여, 그 사문은 판다바의 전면에 있는 암굴 속에 호랑이처럼 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더이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직접 동굴로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주앉아 ‘즐거운 인사’를 나눈 다음,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젊도다, 늙지 않았고 양양한 전도를 지니고 있도다. 꽃 같은 청춘이 그대 것이요 유서 있는 가문에 태어난 듯 하도다.

나는 주리니 바라는 녹(祿)을. 그대여 오라 코끼리 떼 앞세운 내 막강한 군대에 참가하라. 나는 묻노니, 그대여 내력을 말하라.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붓다는 크샤트리아 출신이다. 어엿한 왕족·무사의 가문이다. 지금은 삭발하고 가사를 걸쳐 사문의 몸이 되어 있거니와, 타고난 의젓함은 아직도 그 몸에 넘치고 있었으리라. 왕은 벼슬하기를 권하며 그 내력을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앞에 인용한 두 절로 된 운문이다. 거기에는 사캬족 이야기가 나온다. 히마반트의 기슭에서 사는 한 부족이라고……….

히마반트란 눈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히말라야를 말한다. 그 고장은 또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해 왔다고도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속하는’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 어로는 niketa 라고 하여, ‘그 휘하에’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사캬 족의 정치적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거기에는 부족의 칭호로서‘태양의 후예’라는 말이 나와 있고, 생족의 이름은 ‘사캬’라고 한다는 것이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사아캬(Sakiya) 또는 사캬(Sakya)는 코리아(拘利,Koliya)족과 함께 ‘태양의 후예(Adicca – bandh -u)’라고 불리는 부족에 속하는 포족(胞族, phratry)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사캬 족이라는 이름은 붓다 –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 – 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붓다를 일컬어 ‘사캬족에서 나와 출가한 사문’이라고 하거나, ‘사캬 족의 아들인 사문 고타마’라고 했다. 우리 후세 사람들도 이 분을 우러러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또는 석존(釋尊)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명칭에 의해 사캬 족의 이름은 불교의 문헌뿐 아니라 널리 일반에게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캬 족 전체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밖에는 알 수가 없다.

또 후세 사람들이 사캬 족에 관해 기록한 것들은 그 진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신빙성이 없다. 다행히도 여기에 붓다 자신에 의해 설해졌다는 2절의 게가 전해 오므로, 이 성자를 낳은 부족에 대한 믿을만한 소식을 그나마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왕이시여, 저 히마반트(雪山)의 기슭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하는 땅에 재물과 용맹을 아울러 갖춘 한 단정한 부족(部族)이 삽니다.

그들은 ‘태양의 후예’라 일컬어지고 내 생족(生族)의 이름은 사캬, 대왕이시여,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온갖 욕망을 쫒고자 했음이 아니라. (「經集」 3:1 出家經)

기원전 5세기경, 히말라야 기슭의 고원 지대, 오늘날의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카피라바투(Kapilavatthu)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었다. 중국의 역경자들이 ‘가비라위(迦毘羅衛)’라고 번역한 고장이다. 붓다는 이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살던 사캬 족의 크샤트리아(Ksatriya)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왕족 계급이었으며, 고타마(Gotama)가 그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경전은 자주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Gotama Sakya-putta)’라고 붓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물아홉 살쯤 되었을 때, 집을 나와서 사문(沙門)이 되었다. 그는 곧 갠지스 강(恒河)을 건너 남방에 있는 마가다(Magadha) 국으로 갔다. 마가다 국은 당시 신흥 국가여서 모든 면에 활발한 생기가 돌았으며, 그 수도 라자가하(王舍城,Raja-gaha)에는 자연히 새로운 사상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도 또한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사상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겠다.

한 경(「경집」 3:1 출가경)은 그 무렵 어느 날의 붓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붓다는 성도(成道)하시기 전 마가다국의 산에 에워싸인 서울로 가셨다.
참으로 아리따운 상호(相好)에 빛나시며 탁발(托鉢)을 위해 라자가하의 거리로 드셨다.

※ 상호 : 용모·형상. ‘상’은 드러나게 잘 생긴 부분. ‘호’는 그 세부적인 것. 붓다는 32상·80 종호를 갖추었다 한다.
※ 탁발 : 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는 것.

사문이란 팔리 어의 사마나(Samana), 또는 산수크리트의 슈라마나(Sra- mana)의 음사(音寫)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 무렵의 새 사상가와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모두 집에서 나와 전통적인 사회의 구속을 벗어난 다음, 자유로이 행동하고 사색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적으로 탁발과 공양(供養, 음식이나 옷 같은 것을 붓다나 수도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날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도 역시 사문의 이런 관행에 따라 라자가하의 거리에 나타나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Bimbisara)였다. 왕은 높은 다락에서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가, 이윽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경전은 그 전문을 게(偈, 불교의 이치를 나타낸 운문)로 기록하고 있거니와, 그것을 산문으로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모두들 저 사람을 똑똑히 보아라. 의젓하지 않은가! 그 용모와 행동거지로 볼 때, 아마 천한 출신은 아닌 것 같구나. 곧 누가 가서 저 사람 있는 곳을 알아 가지고 오너라.”

명을 받은 사신은 그 뒤를 밝았다. 그 사람은 탁발을 마치자, 교외에 있는 ‘판다라’라는 산의 동굴로 돌아갔다. 그 산은 라자가하를 에워싼 다섯 산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까닭에 ‘산에 에워싸인 서울(Giri -bbaja)’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왕이시여, 그 사문은 판다바의 전면에 있는 암굴 속에 호랑이처럼 소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더이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직접 동굴로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주앉아 ‘즐거운 인사’를 나눈 다음,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젊도다, 늙지 않았고 양양한 전도를 지니고 있도다. 꽃 같은 청춘이 그대 것이요 유서 있는 가문에 태어난 듯 하도다.

나는 주리니 바라는 녹(祿)을. 그대여 오라 코끼리 떼 앞세운 내 막강한 군대에 참가하라. 나는 묻노니, 그대여 내력을 말하라.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붓다는 크샤트리아 출신이다. 어엿한 왕족·무사의 가문이다. 지금은 삭발하고 가사를 걸쳐 사문의 몸이 되어 있거니와, 타고난 의젓함은 아직도 그 몸에 넘치고 있었으리라. 왕은 벼슬하기를 권하며 그 내력을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앞에 인용한 두 절로 된 운문이다. 거기에는 사캬족 이야기가 나온다. 히마반트의 기슭에서 사는 한 부족이라고……….

히마반트란 눈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히말라야를 말한다. 그 고장은 또 예전부터 코사라 국에 속해 왔다고도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속하는’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 어로는 niketa 라고 하여, ‘그 휘하에’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사캬 족의 정치적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거기에는 부족의 칭호로서‘태양의 후예’라는 말이 나와 있고, 생족의 이름은 ‘사캬’라고 한다는 것이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사아캬(Sakiya) 또는 사캬(Sakya)는 코리아(拘利,Koliya)족과 함께 ‘태양의 후예(Adicca – bandh -u)’라고 불리는 부족에 속하는 포족(胞族, phratry)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사캬 족이라는 이름은 붓다 –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 – 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붓다를 일컬어 ‘사캬족에서 나와 출가한 사문’이라고 하거나, ‘사캬 족의 아들인 사문 고타마’라고 했다. 우리 후세 사람들도 이 분을 우러러서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또는 석존(釋尊)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명칭에 의해 사캬 족의 이름은 불교의 문헌뿐 아니라 널리 일반에게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캬 족 전체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밖에는 알 수가 없다.

또 후세 사람들이 사캬 족에 관해 기록한 것들은 그 진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신빙성이 없다. 다행히도 여기에 붓다 자신에 의해 설해졌다는 2절의 게가 전해 오므로, 이 성자를 낳은 부족에 대한 믿을만한 소식을 그나마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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