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리수 밑에서의 생각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 미묘하니 어찌 알리오. 격정에 매이고 무명에 덮인 사람은 이 법(法)을 깨닫기 어려우리라. (『相應部經典』6:1 勸請)
보리수 밑에서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도 붓다는 얼마 동안을 그 고장에 머물렀다. 그 기간은 아마 몇 주일에 지나지 않았으려니와, 그 동안 붓다의 가슴을 오고 간 생각 중에는 참으로 중대하고 흥미진진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첫째 것은 깨달은 내용을 마음속에서 반복 음미하여 정리해간 일이다. 그때 붓다의 가슴속을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지혜의 즐거움’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사람으로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 중에서 최고의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역시 지혜에서 오는 즐거움일 터이다. 그것은 제한 없는 즐거움이요, 순수한 즐거움이요, 또 고요한 즐거움이다. 경전은 그 당시의 붓다에 대하여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성취하신 세존(世尊 ; 붓다를 일컫는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뜻)께서는 우루 베라의 네란자라 강기슭에 있는 보리수 밑에서 결가부좌(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자세) 하신 채, 이레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시면서 앉아 계셨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고요한 즐거움은 이 담담한 표현의 행간에서도 배어 나오는 듯 느껴진다.
붓다 정각의 사상적인 내용은 앞에 든 『자설경』의 게에 의하건대 연기의 법칙(sahetu dhamma)이었다고 한다. 그 상세한 것은 뒤로 미루겠으나,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관계성의 법칙이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며, 원인 · 결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법칙성의 것이라면 그것을 사실에 맞추어 보아서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의 며칠 동안을 붓다는 이런 음미로 소일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일체의 존재는 남김없이 이 법칙에 의존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 다시 이것을 인간 존재에 적용시켰더니 그것 역시 환히 풀렸다. 이리하여 ‘지혜의 즐거움’은 마치 샘물처럼 끝없이 솟구쳐 나왔던 것이겠다.
그러나 이런 어느 날 붓다의 가슴속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불안이 그림자를 나타냈다. 경전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존경할 데가 없이 사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또는 바라문을 존경하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다. 특히 후세의 불교인들의 상식에서 본다면, 정각을 성취한 붓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존경하고 섬길 사람이 없는 생활은 괴롭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이 경(『상응부 경전』6:2 공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44:11 존중)을 문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잘 음미해 보면 거기에는 중대하고 미묘한 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종래의 불교인들은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지는 못한다. 물질 면에서도 그러려니와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 · 동정 · 공명 · 이해,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사막처럼 쓸쓸해지고 말 것이다. 문학이니 예술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도 혼자서라면 처음부터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 비록 어떤 기막힌 사상이 어느 사람의 머리속에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 표현 · 전달되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것은 무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표현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누군가에게 이해될 때 비로소 사상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인간과 인간의 세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제 붓다는 가리는 것이 없는 눈으로 일체 만유의 진상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이 정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 한 사람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이른바 내증(內證 ; 내적 체험)이다.
그 내증을 가만히 맛보고 고요한 즐거움에 잠기면서도 그는 갑자기 이상한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만약 자기와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에게 찾아가서 함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어쩌랴.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스스로 깨달은 법(진리)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여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는 것, 그것만이 인간 고타마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었다. 이에 전도의 문제, 즉 설법의 문제가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 장(章)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2절의 운문을 되새겨 주시기 바란다. 거기에는 고생 끝에 겨우겨우 얻은 이것을 어이 또 남들에게 설해야 되랴. 라는 구절이 있었다. 붓다는 설법의 문제를 앞에 놓고 우선 주저했음이 명백하다. 이것 또한 후세의 불교인들의 상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리라. 왜냐 하면 그들은 붓다가 중생 제도를 위해서 출가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기와 결과를 엇바꾸고 있음이 분명하다.
붓다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그 어깨에 걸머지고 있던 것은 분명히 자기의 문제, 자기의 고민이었다. 최근의 정밀한 연구로 밝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문구가, 바꾸어 말하면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표방하는 말이 비로소 경전에 나타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는 점이다. 최초의 설법이 베풀어지고 제자들도 이미 60명으로 불어나 전도를 위해 그들을 처음으로 떠나보낼 때, 붓다의 말씀 속에 이 구절이 비로소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출가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드디어 크나큰 해탈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직 이 문제는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것이 갑자기 설법의 형태로서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붓다의 마음이 먼저 부정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게의 뜻이기도 하다. 같은 경에서는 또 그때 세존의 마음은 침묵으로 기울고 설법으로는 기울지 않았다. 고도 말하고 있다.
그 주저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앞에 든 운문의 후반 부분의 내용이다. 만약 법을 설한다 해도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붓다가 깨달은 사상의 내용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세상의 상식을 뒤엎은 그것, 심심(深甚)미묘 정세하니 어찌 알리오.
이렇게 어려운데도 세상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고 격정과 무명에 덮여 있다. 그렇다면 내가 기껏 설해 보았자 나만 지치고 말리라, 그것이 붓다의 심정이었던 것이다. 설법이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도 이렇게 붓다의 마음은 쉽사리 그쪽으로는 기울지 않았다.
그것을 뒤집어 마침내 설법의 결심으로까지 이끌고 간 소식을 이 경은 신화적인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른바 ‘범천권청’의 설화가 그것이다.
범천(梵天)이란 만유의 근원이라는 범(梵), 즉 브라만(Brahman)을 신격화한 인도의 신이다. 그것이 불교에도 섞여 들어와서 교법 수호의 신으로서 자주 경전에도 나타나거니와, 지금도 붓다가 설법을 주저하고 있음을 안 범천은 그래서는 세상이 망하리라고 걱정한 나머지 급히 붓다 앞에 나타나서 권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법을 설하시옵소서. 이 세상에는 눈이 티끌로 가려짐이 적은 사람도 있아옵는 바, 그들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망하지 않겠나이까? 그들은 법을 듣는다면 필시 깨달음에 이르오리다.”
그래서 붓다는 다시 한 번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때 붓다의 눈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경전은 연꽃에 비유하여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
못 속에는 온갖 빛깔의 연꽃이 핀다. 어떤 것은 아직도 흙탕물 속에 잠겨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아름답게 피어 있다.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그것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아주 맑은 꽃을 피운다. 그것과 같이 세상 사람들도 가지각색임을 관찰한 붓다는 마침내 설법을 결심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이는 들으라, 낡은 믿음 버리고.
붓다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만일 그 사실이 없다면 오늘의 불교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내용이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되었다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왜냐 하면 이것 없이는 불교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설법의 결심도 그 보리수 밑에서 차차 익어 갔음을 보았거니와, 붓다는 여전히 그 밑에 앉아서 움직이려고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