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 『천수경』이란 것은 앞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천수경』의 첫 마디가 <정구업진언>이란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정구업진언>의 글자 그대로의 뜻을 풀이하면 ‘입으로 지은 없을 깨끗이 하는 참된 말’이란 뜻입니다.
불교인들은 업에 대해서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업은 여러 수십억 년이 지난다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인연을 만나는 어느 순간에 자기가 지은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불교인들은 업을 잘 지어야 합니다.
일생을 통해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일은 참으로 훌륭한 업을 짓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스승 중의 스승이시며, 가장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셨기에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과 업을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업을 짓는 일입니다.
안개 속을 지나와도 옷이 촉촉이 젖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몸에 스며드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은 업이란 우리가 절에 와서 절을 거듭 하는 사이에, 또 법문을 여러 차례 듣는 사이에 그것이 쌓여서 커다란 공덕이 되고 지혜의 큰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의 인연 맺음은 우리의 삶을 밝게 열어가는 훌륭한 업을 쌓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공덕으로 인하여 마음이 정화되고, 마음에 선업이 쌓여서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업과 연관된 우리가 잘 아는 고사(古事)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흔히 공교로운 시간에 같은 일이 함께 겹쳐 일어난다는 말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의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이 말은 불교경전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은 그 뒤에 ‘그 배가 떨어지면서 마침 지나가던 뱀의 머리를 맞추어 뱀이 죽었다’는 뜻의 ‘파사두(破巳頭)’라는 구절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 고사성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과응보의 업연(業緣)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오비이락 파사두야’의 고사 이야기는 다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우연히 떨어진 배에 맞아 죽게 된 뱀은 죽어서 다시 산돼지로 태어났습니다. 또 배에 앉아 있던 까마귀는 죽어서 꿩이 되었습니다. 이른 봄에 꿩이 양지 쪽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산비탈을 지나던 산돼지가 그만 돌을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그 돌은 굴러서 양지 쪽에 앉아 있던 꿩을 치여 죽이고 만것입니다. 처음에는 까마귀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뱀이 다시 산돼지로 변하여 까마귀가 죽어서 된 꿩을 다시 죽이게 된 것입니다.
다시 꿩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 사냥꾼이 되었는데 어느 날 산에서 우연히 산돼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그 산돼지를 쏘려고 하니 그 산돼지는 마침 근처에 있던 조그만 암자로 숨어 들었습니다.
그 암자에는 지혜의 눈이 열린 도인 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가만히 앉아 참선을 하고 있으려니 절 주위에서 죽고 죽이는 과거의 원한 관계가 뒤엉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도인 스님은 사냥꾼에게 가서 산돼지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숙명통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서로의 원한 관계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냥꾼은 마침내 발심하여 불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경전에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모르고 지은 업보이지만 언젠가는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불교경전 속에서 업이라고 하는 문제는 굉장히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풀리는가 하고 한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도 따지고 보면 전생부터 지은 업장 때문입니다. 결국 지은 업대로 그 과보를 받는다는 원리를 이해하면 자기의 행동이나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좋은 업을 쌓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업을 쌓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믿음이 철저할 때 우리가 속한 이 사회는 보다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업의 중요성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은 반드시 자기가 받는다는 뜻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도 있습니다. 또 업감연기(業感緣起)라고 하여 업은 인과(因果)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그 업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업의 굴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 바로 업감연기의 법칙입니다. 업으로 인해서 생겨나고 업으로 인해서 소멸되는 일이 모두 업의 소치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시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계(환경)가 모두 업의 인연에 의해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동업중생(同業衆生)이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닮아가는 이유도 같은 환경에서 같은 업을 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결국 업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스스로 끊으려 해도 잘 안 되는 것은 업장(業章)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업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인물로 김유신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고 늘 타고 다니던 말이 무의식 중에 매번 기생집으로 향하므로 말의 목을 벤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업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져 버리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업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업, 청정한 업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일 뿐입니다. 부모를 원망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합니다. 세상이란 각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이며, 그 곳에 나란 존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업에 대해서 제대로 깨닫고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면 불교를 다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업에 대한 이해는 비단 불교인 뿐만 아니라 다 알아야할 이치입니다. 업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세상에 험악한 일이란 일어나지 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업의 결과가 두려워서라도 포악한 행동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회법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업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정화하는 길은 업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이해하여 실천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행한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하는데, 업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身)·구(口)·의(意)·삼업(三業)으로,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위이든 이 셋의 범주 안에 들어있습니다.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이라 하고,입으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 하며,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미워한다고 할 때, 마음 속으로 미운 생각을 하든지 말로써 그를 비난하든지 아니면 손으로 상대방을 직접 때리든지 하는 신·구·의 삼업 중에서 이루어집니다.
『천수경』에서는 그 첫 머리에 삼업 중의 구업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업의 대부분은 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입을 삐죽거린다거나 먹지 않아야 할 음식을 먹는 일도 구업을 짓는 일에 해당됩니다. 구업의 뜻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결국 ‘입조심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구업을 다시 악구(惡口)·양설(兩舌)·기어(綺語)·망어(妄語)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악구는 악담 또는 나쁜 말을 하는 것이며, 양설은 남을 서로 이간질시키는 이중적인 말을 하는 것이며, 기어는 비단결처럼 교묘하게 꾸며서 하는 말이며, 망어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엄청한 구업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첫 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말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반면에 마음에 업는 소리라도 비난의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때때로 말 한 마디 때문에 운명이 바뀌어지기도 하고, 목숨이 걸려 있는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말에 얽힌 이야기나 경고, 명언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처럼 말이란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생활 가운데서 말을 적절하게 잘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습니다. 처음 대하는 사람일지라도 몇 마디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또 착한 일을 하여 많은 공덕을 쌓아 놓고도 경솔한 말로 인해서 그 공덕을 무너뜨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무리 해도 부족합니다. 옛 사람들은 ‘만 가지 화(禍)의 근본이 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하여 항상 말조심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 ‘입 지키기를 병마개 닫듯이 하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말이란 꼭 필요할 때만 하고 그 나머지는 침묵을 지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의 첫 마디가 ‘말조심하라’는 것은 결국 ‘말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며, 나아가서 ‘잘못된 말은 참회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구업을 깨끗이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경전 곳곳에서 강조하고 계시며, 특히 『천수경』의 첫 머리에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만큼 좋은 기도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이나 신장님께 매달리면서도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면 그분들의 참다운 뜻을 잊어버리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둡고 부정적이며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 한 마디 때문에 온 집안을 그늘로 뒤엎이게 하는 수도 많습니다. 좋지 못한 말은 공들여 이루어놓은 기도에 먹칠을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사람과 사람끼리 주고 받는 말을 통해서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그것이 기도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생활에서 밝은 말, 고운 말, 긍정적인 말, 원만히 성취되도록 하는 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뜻입니다.
시험을 앞둔 자녀들에게, 승진을 앞둔 남편이나 친척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말을 해 주는 것보다 더 훌륭한 기도는 없습니다. <정구업진언>의 원리도 깨닫고 보면 그와 통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밝고 고운 말 한마디가 주위를 태양처럼 밝게 비춘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자식을, 이웃을, 나아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바로 말 한 마디에 달려 있습니다. 밝고 따뜻한 말 한 마디는 그것이 태양이 되어 그 빛을 향해 모든 사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또 말에 만족하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상냥하고 온화한 말에 만족을 느낍니다. 마음이 담긴 말 한 마디만 적절하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성취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말이 저절로 나오는 사람이 되도록 각자가 힘써야 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그 마음이 우리의 일상에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세음보살을 대하듯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정구업진언>의 원리도 여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돌아가서, <정구업진언>이라고 할 때의 <진언>은 인도말로 만트라(mantra)라고 하는 것인데, 장소에 따라 주문, 다라니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반야심경』에서처럼 짧은 것일 경우에는 주문이라 하고, 『천수경』에서처럼 내용이 길면 다라니라고 합니다. 진언, 다라니, 주문이란 뜻은 번역하여 ‘모두 지녀 가졌다’고 해서 총지(摠持)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정신의 세계, 영혼의 세계, 귀신의 세계, 불보살의 세계 등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큽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뜻도 알 수 없는 진언을 자꾸 외우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진언은 인도말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 뜻을 쉽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진언을 잘 번역하지 않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것을 잘못 번역함으로써 뜻이 틀려져 버리거나, 설사 번역한다고 해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언은 그 뜻을 모르고 외워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진언이 얼마나 영험이 있는가에 대해 흥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에 장안의 유명한 거지가 중국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간 김에 거짓말을 꾸며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변방의 어느 고을에 가서 자기는 왕의 조카라고 속이고 칙사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는 자기가 왕족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늘 반찬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귀족취급을 해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국의 사신 한 명이 중국에 볼 일이 있어서 우연히 그 고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 고을 원님은 사신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의 조카가 중국으로 여행을 왔다면 그 사신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인데 자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신이 왕의 조카라고 하는 이에게 나아가 인사를 하려고 보니 그는 장안의 이름난 거지였던 것입니다. 고을 원님에게 그가 거지라고 한다면 그는 당장에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신은 현명한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사신은 고을 원님에게 그가 반찬투정을 할 때마다 자기가 말을 한 마디 일러줄테니 그 말을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이었는데, 중국 사람은 그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사신이 떠나고 난 후 왕의 조카란 자가 반찬투정을 할 때마다 원님은 뜻도 모르고 ‘거지인 주제에’하고 외웠습니다. 그렇게 무심코 뜻도 모르고 내뱉은 말이지만 진짜 거지가 듣고는 완전히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뜻도 모르고 외었지만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이 진짜 거지에게는 엄청난 영험을 발휘한 것입니다. ‘진짜 거지에게는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은 자기의 생명을 오락가락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언은 모르고 외워도 신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앙적인 면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