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경-경전펼치기
(원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번)
(옮김) 말로 지은 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
1)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이 부분은 ‘천수경’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을 독송할 때 맨 먼저 독송하는 부분으로 송경의식(誦經儀式)에 해당합니다. 경전을 독송한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경전을 독송하기 전에 입으로 지은 갖가지 죄업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은 진리를 전달하는 문(門)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업을 입으로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남을 속이기도 하고(妄語), 험한 말로 남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고(惡口),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화합을 깨뜨리기도 하고(兩舌), 뒤에서는 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당사자 앞에서는 마음에 없는 칭찬을 늘어놓기도(綺語)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입으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
망어(妄語) 거짓말. 남을 속이는 말
악구(惡口) 욕지꺼리. 험한 말
양설(兩舌) 두 가지 말.남을 이간질 시키는 말
기어(綺語) 발림말. 겉과 속이 다른 말
2) 입은 화의 근원
업에는 세 가지 종류(三業)가 있습니다. 몸으로 세 가지 업(身三業)을 짓고, 마음으로 세 가지 업(意三業)을 짓고, 그리고 입으로 네 가지 업(口四業)을 짓습니다. 이를 모두 합쳐 ‘열가지 업(十業)’이라고 합니다. 나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업을 ‘십악업(十惡業)’이라 하고 착한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 업을 ‘십선업(十善業)’이라고 합니다. 그 열 가지 업 가운데 작은 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고 해서 입을 화의 근원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언어가 좌우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을 독송하기 전에는 이렇게 입으로 지은 모든 악업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 ‘정구업진언’을 먼저 독송하고 나서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을 독경하는 것입니다.
3) Om과 Svaha
진언에 있어서 옴과 스바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옴은 매우 신성한 뜻을 간직한 소리(音)라 해서 인도에서는 모든 종교의식에서 꼭 제창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옴 옴”하고 옴만 외우는 것을 수행으로 삼기도 한다고 합니다.
옴의 뜻은 ‘귀의(歸依)’ 또는 ‘공양(供養)’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스바하는 ‘원만히 성취됨(圓滿, 成就)’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천수경이나 밀교 경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진언은 ‘옴’으로 시작해서 ‘스바하’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내가 이제 부처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독송하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공양하오니 제가 소원하는 바가 모두 원만히 성취되기를 비옵니다’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진언의 형식입니다.
4) 진언의 의미
진언(眞言, Mantra)이란 말 그대로 ‘진실된 말’이란 뜻입니다. 어떤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업이라면 참되고 진실된 것을 밀교에서는 ‘밀(密:Guhya)’이라고 합니다. 입으로 짓는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구업이라면 반대로 선과 악의 행위를 떠난 ‘진리의 언어’를 진언(眞言)이라고 부릅니다. 진언은 업이 아니라 진실한 언어이므로 구밀(口密)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과 입으로 짓는 삼업(三業)도 그것이 선과 악이라는 인과의 산물이 된다면 삼업이 되지만 그것을 초월한 진실한 행위가 될 때에 그것은 세 가지 비밀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三密)이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과 입으로 밀을 갖추는 것을 삼밀가지(三密加持)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말을 떠나 있는 것이며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不在文字, 知者不言). 즉 참된 진리는 말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인 진언은 일상적 언어처럼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언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구마라습과 현장과 같은 역대의 대 역경승들도 이 진언부분에 이르러서는 붓을 놓았다고 합니다.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듯 진언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언이 어떤 개념을 내포한 말로 표현되고 상식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진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언은 비밀한 것이며 그것은 선악이라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은 업의 범주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5) 개념의 틀을 뛰어넘는 진언
사람을 흔히 언어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내포하고 의사를 전달하며 문화적 활동과 지식을 후대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지식은 언어를 통해 축적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언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핵심은 언어로 된 경전밖에 있는 것이며 언어에 근거하지 않았다(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해서 언어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노자같은 경우에도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며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라며 언어의 해악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진언도 그 자체가 가진 힘을 말의 개념 속으로 이해하려 할 때 이미 진언으로써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 진언은 상식과 제한된 개념을 뛰어넘고 있으며 그것은 작은 개념의 틀로 담을 수 없는 광대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 말은 사고를 결정한다.
언어의 엄밀한 논리적 분석을 추구하는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에서는 말이 없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 생각보다 앞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언어 생활이 그 사람의 건전한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로 지은 업’이 다른 모든 업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모든 업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진언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훈습(燻習)이란 말이 있습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에 오래 앉아 있으며 옷에 담배 연기가 배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반복되는 언어는 마치 담배연기가 옷에 배어들듯 그 사람의 사고에 훈습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까지 합니다.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나오는 여덟 가지 실천(八正道)에도 올바른 언어생활(正語)을 중요한 수행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을 참답게 함으로써 인간과 그 마음을 참답게 하는 것이 진언밀교(眞言密敎)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밀교 경전인 ‘천수경’에서도 ‘정구업진언’을 맨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 인간의 사고를 형성하고, 그 언어의 행위자를 역으로 결정짓는다는 전제하에 참된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방의 모든 신들을 편안케 하는 진언
(원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3번)
(옮김) 오방의 선신들을 편안케 하는 진언
1) 오방의 신들
오방(五方)이란 동서남북과 그 가운데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방의 모든 신들’이란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화엄경’에 나오는 ‘화엄성중(華嚴聖衆)’들을 말합니다.
이들 오방의 모든 신들은 원래 바라문교에서 신봉하는 신이었지만 불교가 인도의 대표적 종교로 성장하면서 불교를 외호하는 신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이를 습합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개방적 종교성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칠성이나 산신 등 우리의 토속적인 신앙이 불교에 흡수된 것도 종교적 습합의 좋은 예입니다.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신들은 절대적 권능의 신이 아니라 대부분 불교를 외호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진리에 안주하는 신들
불교에서는 불법의 세계로 수용된 이들 신들이 부처님의 진리에 안주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늘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부처님께 공양과 예불을 올린 뒤에는 화엄성중들이 모셔진 신중(神衆)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라는 뜻입니다. ‘안위(安慰)’는 편안히 안주하라는 뜻입니다.
3. 개경게(開經偈) – 경전을 펴는 게송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義
가장 높고 미묘하며 깊고 깊은 부처님 법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저는 이제 다행히도 보고 듣고 지니오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합니다.
1)게송
게송(偈頌)이란 산스크리트어 Gatha를 음역한 것으로 ‘가요, 성가, 시구’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2) 가장 높고 미묘한 법
여기서 말하는 ‘가장 높고 미묘한 법’이란 천수경의 핵심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자비의 어머니인 관세음보살님의 다라니입니다. 그렇다면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가장 높은 진리라는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판단 근거를 듭니다.
첫째: 성언량(聖言量), 불언량(佛言量)
진언은 범인(凡人)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귀의하는 부처님과 옛 성인들이 가장 높은 법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둘째: 만 중생을 위한 자비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衆生)이란 개념에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 나가서 산천초목과 기와 조각과 벽돌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들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산과 들 그리고 심지어는 기와조각 같은 자연과 무생물도 설법(說法) 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높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중생이라는 말이 됩니다. 모든 가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중생이며 중생이 진리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또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다른 종교나 가치체계에 비추어 볼 때 불교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열린 사상은 인간 중심의 사고와 그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 정책으로 초래된 자연파괴를 막고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 불교임을 말 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서양의 물질 중심의 가치 체계와 기독교가 내세우는 인간 중심적 윤리체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 경전을 펴는 진언
(원문)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3번)
(옮김) 경전을 펴는 진언
1) 법장
여기서 말하는 법장(法藏)이란 ‘진리의 창고’라는 뜻입니다. 즉 천수경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담긴 창고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옴 아라남 아라다’는 바로 무궁무진한 진리의 창고를 여는 진언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가득 담긴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5.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의 광대하신 원만무애 자비심의 다 라니
(원문)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옮김) 천수천안 관세음 보살님의 광대하고 원만하신 자비심의 큰 다라니.
1) 경전의 이름
이 부분은 ‘천수경’의 핵심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설하고 있는 경전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2) 세 개의 다라니
여기에는 모두 세 개의 다라니가 나오고 있습니다. 즉 천수천안 관자제보살의 다라니, 광대원만의 다라니, 무애대비심의 다라니 등 세 개의 다라니가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첫째 관세음의 다라니
한없이 많은 눈(千眼: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의 아픔을 지혜로써 살피시고(觀), 한없이 많은 손(千手:천 개의 손)으로 그 아픔에서 해방되게 하는(自在) 관세음보살의 다라니가 첫 번째 다라니입니다. 여기서 천 개의 눈이란 바로 수 많은 중생의 아픔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보살의 자비심을 말합니다. 또 천 개의 손이란 그 아픔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다독거려 주는 자비의 손길이자 실천 방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광대원만 대다라니
‘광대(廣大)’는 천수경의 진리가 위없는 진리로써 대승(大乘)임을 말하는 다라니입니다. 대승을 ‘방광(方廣)’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없이 넓고 큰 다라니라는 뜻입니다. 원만은 원통(圓通)을 의미하는데 원통이란 삼매에 듦을 말합니다. 관음(觀音)은 소리를 듣고 삼매에 들었다 하여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음전을 다른 말로 원통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무애대비심 다라니
이 다라니는 자비를 실천함에 있어 걸림이 없는 다라니를 말합니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중생을 구제함에 있어 아무런 장애가 없을 만큼 좋은 방편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도와줄 적절한 방법을 모른다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6. 계청(啓請) – 경전을 열면서 청함
稽首觀音大悲主
願力洪心相好身
千臂莊嚴普護持
千眼光明遍觀照
관음보살 대비주께 머리숙여 예합니다.
깊고 깊은 원력으로 육신상호 거룩하며
일천 손의 자비손길 고뇌중생 거두시고
일천 눈의 지혜광명 온 세상을 살피시네.
1) 머리 숙여 예를 표함
여기서 계(稽)자는 조아릴계자 입니다. 즉 계수(稽首)란 존경의 표시로 머리를 조아림을 뜻합니다.
2) 관세음보살님의 특징
관음세음보살님은 흔히 원(願), 장엄(莊嚴), 광명(光明) 등으로 특징 지워집니다.
(1) 원(願)
원이란 모든 불 보살님들이 가지고 계신 지극히 크고 성스러운 ‘바램’ 또는 ‘다짐’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세우고 계신 원은 지극히 크고 깊으며 모든 중생들에게 치우침이 없는 지극히 공평한 원을 세우고 계십니다.
(2) 장엄(莊嚴)
장엄이란 무엇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 장식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은 흔히 천수천안으로 장엄(표현)되고 있습니다.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것은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모든 아픔을 다 보기 위한 것이며 천 개의 손을 가졌다는 것은 수많은 중생들의 아픔을 모두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장엄(표현)되고 있습니다. 장엄이란 바로 ‘장식하다’와 같은 뜻인데 불교에서는 엄숙하고 거룩하게 장식했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중생을 구제하시고자 하는 관세음보살님의 염원이 일천 손의 장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광명(光明)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고통(苦)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고통스러울까요?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무명(無明)으로 봅니다. 즉 인간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그 어두운 정신 세계를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중생들의 고통이 비롯되었다면 관세음보살님의 실천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중생들에게 진리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의 아픔을 보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은 빛(光明)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는 결국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욕망에서 비롯된 고통을 물질적 풍요와 권력을 가져다 줌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아서 고(苦)의 근원을 해결해 줌을 말하는 것입니다.
慈光照處蓮華出
慧眼觀時地獄空
又況大悲神呪力
衆生成佛刹那中
자비의 빛 비치는 곳에 연꽃이 피어나고
지혜의 눈으로 지옥을 보시니 지옥이 텅비었구나.
하물며 또 대비주의 신통한 힘까지 빌린다면
중생이 부처되기 찰나의 일이라네. (관음시식문)
7. 함이 없는 마음으로 베풀어라
眞實語中宣密語
無爲心內起悲心
速令滿足諸希求
永使滅除諸罪業
진실한 말속에서 비밀한 말을 나타내며
함이 없는 마음으로 자비심을 일으켜서
저희들의 온갖 소원 어서 빨리 이루옵고
모든 죄업 남김없이 깨끗하게 하옵소서.
1) 관세음 보살의 이타행
이 게송은 관세음보살님께서 비밀한 말씀(密語)을 베푸시고 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마음으로 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성취케 하시고, 모든 죄업을 소멸해 주시기를 발원하는 내용입니다.
또 이 게송 속에는 진정한 자비행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위에는 유위(有爲)의 행과 무위(無爲)의 행이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베푸는 행이라면 비록 그것이 선행일지라도 진정한 자비심에서 나온 행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행을 자선(慈善)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준다는 생각마저 없이 베푸는 보시를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위와 유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2) 유위법과 무위법
유위(有爲-samsrta)
위작(爲作) 또는 조작(造作)이라는 뜻의 유위는 인연(因緣)으로 인해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연에 의해 조작되는 현상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간적으로 볼 때 영원한 실체가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諸行無常)것입니다. 또 공간적으로도 변함없이 상주하는 실체가 없습니다(諸法無我). 이같은 특성을 갖는 모든 현상을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무위(無爲-asamskrta)
유(有)나 무(無)와 같은 상대적 개념을 넘어선 경계로 모든 법의 진실체가 곧 무위입니다. 이 무위의 세계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변화가 없으며 영원히 존재(常住)하는 세계입니다. 인연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다 무상하지만 무위는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 불변합니다. 무위의 핵심은 있음과 없음(有無), 나와 남(我他)이라는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것입니다.
3) 진정한 자비심
남에게 베풀되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유위(有爲)’입니다. 즉 인과의 법칙이라는 범주 속에 머무는 행위인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남에게 베푼다는 그 의식(我相) 마저 없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상(相)에 머물지 않는 베품(無住相布施)’이라고 합니다. 베푸는 자와 받는 자라는 대립적 경계마저도 초월하여 주객(主客)이 하나가 된 베품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이자 참된 베품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베품’입니다.
4) 삼륜청정
그래서 불교에서는 삼륜이 청정(三輪淸淨)해야 한다고 합니다. 삼륜(三輪)이란 베푸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보시한 물건(施物)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가 깨끗할 때 비로소 참된 베품이 됩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베풀어지는 시물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베풀고 받는 그 행위에 어떤 불순한 목적이나 상(相)에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무위(無爲)의 견지에서 볼 때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또 베풀어지는 물건도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삼륜에서 륜(輪)이란 수레바퀴를 뜻합니다. 마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입니다. 누가 주는 자이고 누가 받는 자라는 불변의 규정성이 없습니다. 주었으되 준 것이 없고 받았으되 받은 것이 없는 그런 무위의 베품을 삼륜공적(三輪空寂)이라고 합니다. 베푸는 자도 공하며(施空), 받은 자도 공하며(受空), 베풀어지는 물건도 공하다(施物空)하여 삼륜체공(三輪體空)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달마 대사와 양무제와의 유명한 대화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양무제는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불전에 공양을 많이 올려서 당시 중국불교의 흥성에 크게 기여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제는 자신의 공덕이 참으로 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큰스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마스님을 만나 자신이 베푼 공덕이 얼마나 큰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일언지하에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무제의 보시는 베풀었다는 상(相)에 집착하고 있는 유위의 베품이었기 때문에 자선은 될지언정 참된 공덕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5) 동체대비
관세음 보살은 중생과 보살이라는 그 경계를 뛰어 넘은 주객합일의 사랑으로 중생을 구제하십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합니다. 보살 중생과 보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살이란 말을 살펴보면 동체대비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옆의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보살(菩薩)이란 산스크리트어로 ‘Bodhi-sattva’입니다. ‘Boddhi’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며 ‘Sattva’란 미혹한 중생을 의미합니다. 즉 보살이란 ‘깨달은 중생’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중생과 보살은 둘이 아닙니다. 중생과 보살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천수다라니의 독송을 통하여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무위의 마음이 될 때 비로소 한없는 자비로써 중생들의 세간을 장엄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도교의 무위
참고로 도교에서도 무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실 무위라는 말 자체는 도교의 것입니다. 불경을 번역할 때 도교의 말을 차용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무위라는 말에 국한시킨다면 도교의 말이겠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라는 말에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는 노자를 위시한 도가 사상에서 가장 높이는 말입니다. 무위란 ‘아무 것도 안 한다’,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인공적이고 자의적인 기교, 작위,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래 우주(宇宙), 천지(天地), 만물(萬物)은 스스로 그렇게 되었고 또 제물(諸物)로 운행(運行)되고 변화 발전하는데 이것을 자연(自然)이라 합니다. 자연은 ‘스스로(自) 그렇게 되다(然)’의 뜻으로 타력적(他力的)이거나 인위적(人爲的)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밖에는 될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을 자연이라 합니다. 따라서 사람도 모든 것을 자연에 따르고 인위적인 작위(作爲)를 가하지 말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고 이를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라고 합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관요장 제2에 보면 무위(無爲)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만 안다면 이는 악이다. 또 선한 것만 선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불선이다. 그런고로 유와 무는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상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길고 짦은 것도 상대적으로 형성되고 높고 낮음도 상대적으로 대비되고 음과 소리도 상대적으로 어울리고 앞과 뒤고 상대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태도로써 세상사를 처리하고 말없는 교화를 실행한다.”
8. 진리의 깃발과 보배의 창고
天龍衆聖同慈護
百千三昧頓薰修
受持身是光明幢
受持心是神通藏
천룡 팔부 여러 성인 자비로써 보호하사
백 천 가지 온갖 삼매 단박에 닦게 하네.
천수주를 지닌 몸은 빛나는 깃발이 되며
천수주를 지닌 마음은 신비로운 창고가 되네.
1) 천수 다라니를 독송하는 공덕
이 게송은 천수다라니를 독송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근기가 수승한 중생이라면 스스로 수행하겠지만 근기가 낮은 중생들이라면 방편(方便)이 필요합니다. 천수다라니를 독송하고 수행했을 때 이러이러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근요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한 방편이 많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사막을 가는 상인이 지친 동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저 앞에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성(城)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해서 갈 길을 재촉하는 화성유품이라든지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세 가지 수레를 주겠다고 한 화택유품 등 많은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방편으로서 먼저 결과를 보여주고 수행하기를 권하는 것을 시과권수(示果勸修)라고 합니다.
2) 팔부신중(八部神衆)
천룡, 팔부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중을 말하는 것으로 천(天)·룡(龍)·야차·아수라·가루라, 건달바, 긴나라, 마후라가를 말합니다. 이들 여덟 신들은 부처님을 외호(外護)하며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護法) 선신(善神)들입니다. 이들 신들은 본래 인도의 고대 신들이었지만 불교가 발전하면서 불교에 수용되어 불교를 외호하는 신들이 됐습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불법을 수호하며 그 진리에 안주하는 신들이 된 것입니다.
3) 진리의 깃발
광명당(光明幢)이란 ‘빛나는 깃발’이란 뜻입니다. 깃발은 깃발이되 진리의 깃발이기 때문에 빛나는 깃발인 것입니다. 찬란히 빛나는 진리의 깃발은 무명(無明)의 고통바다(苦海)를 떠돌아다니는 중생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횃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천수다라니를 받아 지니는 사람은 어두운 사바세계를 방황하는 모든 중생들의 길잡이가 되며 밝은 등대가 되는 것입니다.
천수다라니를 받아 지닌 우리의 몸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일상적인 몸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들의 사표가 되는 펄럭이는 깃발입니다. 번뇌의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와도 그 바람이 불면 불수록 더욱 힘차게 펄럭이며 무명을 일깨우는 깃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탐·진·치 삼독의 마군(魔軍)을 무찌르는 진리의 선봉이 되는 것입니다. 시처럼 아름답고 역동적인 이 비유는 단순히 자신만을 위해 천수다라니를 독송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진리의 장정에서 당당히 앞장서서 중생들을 이끌고 가는 선봉이 되라는 실천지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4) 신비로운 진리의 창고
신통장(神通藏)이란 신비로운 창고라는 뜻입니다. 천수다라니를 받아 지닌 이 몸은 이미 만 중생의 허기진 정신세계를 배부르게 할 진리의 보배 창고가 된 것입니다. 텅 빈 창고가 아니라 진리로 충만된 창고입니다. 그래서 신통장입니다. 가득 찬 창고는 밖을 향해 문을 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충만된 보물들을 굶주리는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야야 합니다. 이미 신비로운 창고가 된 이상 천수행자는 이제 아낌없는 베품의 실천적 활동에 나서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마음은 더 이상 탐욕에 굶주리지 않으며, 성냄의 불길에 휩싸이지도 않으며, 어리석음으로 방황하지도 않습니다. 삼독으로 가득 찼던 이 마음은 이제 무한한 보배의 창고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 줄 여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유입니까. 이 얼마나 신심에 가득 찬 메시지입니까? 이제 천수주를 외우는 이상 빛나는 깃발 펄럭이며 무한한 진리의 창고 문을 열어제치고 무명을 무찌르고 부처님의 세계로 나가는 선구자가 된 것입니다.
참고로 천수다라니를 수지(受持)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천수주 독송의 열 가지 이익(誦呪十利)
①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는다.
②모든 병이 낫는다.
③오래 산다.
④부자가 된다.
⑤모든 악업과 중죄를 소멸시킨다.
⑥장애와 어려움을 여의게 된다.
⑦모든 선행과 공덕을 더욱 많이 짓게 된다.
⑧모든 선근을 성취하게 된다.
⑨모든 두려움을 여의게 된다.
⑩모든 구하는 바를 속히 이루게 된다.
<신수대장경>,1060
열 다섯의 나쁜 죽음을 면한다(不受十五種惡死)
①굵어 죽지 않는다.
②사형당하지 않는다.
③원수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④전쟁터에서 전사하지 않는다.
⑤짐승에게 물려서 죽지 않는다.
⑥독사 등에 물려서 죽지 않는다.
⑦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죽지 않는다.
⑧독극물에 의해서 죽지 않는다.
⑨독충에 물려서 죽지 않는다.
⑩정신착란으로 죽지 않는다.
⑪산이나 절벽에서 추락해 죽지 않는다.
⑫나쁜 사람이나 도깨비에게 홀려 죽지 않는다.
⑬사악한 신이나 악귀에 의해서 죽지 않는다.
⑭나쁜 병에 걸려서 죽지 않는다.
⑮때 아닐 때 죽지 않고 자살하지 않는다.
<신수대장경>,1060
열 다섯의 훌륭한 삶을 얻는다(得十五種善生)
①민주적인 정치 지도자가 정치하는 곳에서 살게 된다.
②윤리적으로 선량한 나라에게 살게 된다.
③평화롭게 살게 된다.
④선지식을 만날 수 있다.
⑤언제나 정상적인 신체로 건강하게 산다.
⑥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견고하게 된다.
⑦계율을 잘 지킨다.
⑧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다.
⑨음식, 의복 등의 원하는 것을 항상 풍족하게 소유하게 된다.
⑩언제나 다른 사람의 공경을 받는다.
⑪재물을 도둑맞지 않는다.
⑫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된다.
⑬천과 용, 신중들이 항상 옹호한다.
⑭언제나 불교가 승하는 곳에서 살게 된다.
⑮올바른 법을 듣고 그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된다.
9.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洗滌塵勞願濟海
超證菩提方便門
我今稱誦誓歸依
所願從心悉圓滿
세상티끌 씻어내고 고통바다 어서 건너
지혜로운 방편들을 속히 얻게 하시옵고
제가 이제 관음신주 잃고 외우며 귀의하오니
뜻하는 일 마음대로 원만하게 이뤄지이다.
1) 계청의 마무리
이 게송은 관음보살에 대한 사룀(啓請)을 마무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나열했던 내용들을 소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게송에는 세 가지 법문이 있습니다. ‘마음의 번뇌를 세탁’하는 것과 ‘방편을 얻는 것’과 ‘뜻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2) 번뇌를 세탁하는 일
세척진로(洗滌塵勞)란 번뇌를 세탁하는 일을 말합니다. 진로(塵勞)는 먼지, 또는 티끌을 가르키는 말로 마음의 번뇌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의 본성(本性)은 본래 청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온갖 번뇌의 티끌이 그 맑은 본성을 뒤덮고 있어서 어두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맑은 거울에 더러운 먼지가 껴서 사물을 비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삼독의 거센 바람이 번뇌의 파도를 일으키면 바다는 어둡고 풍랑으로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번뇌의 파도가 잠든 고요한 바다는 유리알 같이 맑아 삼라만상을 다 비추게 됩니다. 이처럼 번뇌의 파도가 잠들고 고요해진 상태를 해인(海印)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번뇌를 모두 잠재우고 고요하고 맑아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해인이며 열반(涅槃,Nirvana)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번뇌를 모두 씻어내는 것은 바로 고해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3) 방편을 얻는 일
방편(方便-Upaya)이란 중생제도를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실천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실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 한 중생도 방치할 수 없다는 대승불교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방편의 뜻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① 방(方)은 방법, 편(便)은 편리를 말하는 것으로 편리하게 방법을 쓴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일체중생의 기류근성에 맞는 적절한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써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방(方)은 중생의 영역을 말하고 편(便)은 교화하는 편법을 말합니다. 이는 모든 기류의 근기와 특성에 맞추어 적당히 교화의 편리한 방법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② 진실하지 않고 보잘 것 없는 법문을 방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중생들을 깊고 오묘한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수단으로 낮고 보잘 것 없는 법문을 설해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편을 권가방편(權假方便)이라고 합니다. 비록 진리에 어긋나고 낮은 차원의 가르침이지만 중생의 수준에 맞게 법을 설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명의가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③ 정직을 방(方)이라 하고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을 편(便)이라고 말하는데 일체 중생을 가련히 여겨 자기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좀 배웠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위기에 맞지도 않는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신의 품위와 명성을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대승의 행자는 낮은 사람에게는 낮은 설법을 합니다. 비록 남들이 자신의 법을 듣고 하찮은 사람이라고 명예가 실추되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이 대승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4) 방편은 대승의 정신
아무리 뛰어난 가르침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실현하고 펴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적절한 상황에 맞는 방편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방편이 있을 때만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편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수준에 맞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갖가지 방편은 대승행자와 보살에게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보살은 적절한 방편으로 중생들에게는 다가설 때만이 본원(本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고 구현해 나갈 방법이 없다면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본원(本願)은 방편을 통해서 성취될 때 완성되는 것이며, 목표는 달성될 때 그 가치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편이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보살의 서원이 서린 것이다.
자기식대로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다 따라오지 못하면 어리석다고 말하는 지도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자신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스승과 지도자에게 어리석은 학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겐 방편의 지혜로운 무기가 있으므로 말입니다. 자 우리 다같이 갖가지 지혜로운 방편을 얻읍시다.
5) 뜻대로 성취하는 것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소원성취는 어떤 절대자의 권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번뇌에 물든 세속심이 아니라 본래 청정한 마음을 말합니다. 번뇌에 때묻지 않은 마음(眞心)에서 비롯되는 소원일 때 비로소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