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위대한 포기성(城)을 넘어 세상을 향하다

위대한 포기,성(城)을 넘어 세상을 향하다 / 지광 스님

우리의 삶에는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의 근본고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인생의 근본적인 고통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하다가,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출가하십니다.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바로 버림의 미학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이 출가하신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면,

불교는 버림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꾸 버리고, 벗겨내는 종교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벗겨내어 알맹이가 드러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떠나야 합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도 오십년이나 백년 후까지 존재할 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땅에 남아계실 분이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고깃덩어리를 하나씩 뒤집어쓰고 살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허깨비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육신을 짊어지고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임종을 맞이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워하고 애석해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대부분 임종의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떠날 때 말없이 떠나는 이들을 만나기 어려워요.

“아, 정말 나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았다.

이제는 떠나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뭔가 아깝고 미진하고 안타깝게 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두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다 버리면 그 자리에 부처님이 현신하시는 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버리면 도리어 얻게 됩니다.

(법화경)에서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합니다.

도를 위해서 법을 위해서 모든 것을 던지는 겁니다.

모든 불행은 던지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배격하는 단어가 ‘집착’과 ‘애착’입니다.

집착과 애착은 뭔가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애착이라는 마음이 덩어리를 만들고, 고혈압을 만들고, 여러 가지 병을 만듭니다.

돌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호흡도 나가면 들어와야 하는데 들어오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순환 되어야 합니다.

내보내려고 하지 않고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니까 불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 모든 불행, 집착과 애착에서 발생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말은 ‘생각(念)’입니다.

이른바 생각이란, 현실과 영혼의 접점 같은 것입니다.

왜 염불, 기도하라고 하는가요.

매순간마다 부처님 생각을 하고 염불하면 부처님 나라에 가기 때문입니다.

화두일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이처럼 생각을 중요시합니다.

생각이 운명이고 인생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합니다.

뜻은 생각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좋은 뜻이 있으면 좋은 길이 열리고, 나쁜 뜻이 있으면 나쁜 길이 열립니다.

운명의 행로가 생각으로 갈라져 버리고, 생각으로 생사가 갈라져 버립니다.

결국 매일매일 생각생각에 죽고 사는 겁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순간마다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나는 얼마나 진실한 불자인가’ ‘나는 얼마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는가’하고 자꾸만 자기에게 묻고 참구하세요.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해야 합니다.

화두의 하나인 ‘이뭐꼬’도 끊임없이 ‘나라고 하는 존재, 이것이 참다운 불자인가, 참다운 인간인가’를 묻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禪)의 궁극 대상입니다.

자꾸 자기에게 묻다보면 참다운 길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에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인생을 철저히 투철하게 정리하는 삶, 그게 불자의 삶입니다.

불교는 버림으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버리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버리는 마음 가운데 꼭 명심하실 것이 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원력과 욕심은 다른 것입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도 욕심 아니냐’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부처가 되려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원입니다.

욕심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원력은 무량중생을 위한 것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삼독심을 버리면서 계속 번뇌를 벗겨내면 거기서 무서운 힘이 나옵니다.

기도를 자꾸 하면 나도 모르게 힘이 강해집니다.

그러면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원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목표를 세워서 이뤄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무한한 자비의 존재, 사랑의 존재, 무소불능인 무한한 존재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건축가가 내 마음에 그린 집을 설계도에 그려냅니다.

그 다음에 집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은 어디 있던 것인가요.

바깥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있던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음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원력은 강한 기도의 힘으로 이미 존재하는 원을 마음밖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 들어있는 것을 기도힘을 통해 자꾸 끌어내고, 현실화 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원입니다.

번뇌를 벗겨가면서 순수한 부처님 힘으로 내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십시오.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지금도 이 몸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살아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닙니다.

(열반경)에 ‘항상 죽음을 인식하고 살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친구가 되어 살아라, 죽음을 철저히 생각하면 삶이 빛납니다.

내가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철저히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아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삶을 치열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는 기껏 살아도 백년도 못 삽니다.

그런데 은하계는 10만 광년이나 되는 우주입니다.

빛이 10만년을 달려야 합니다.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소용돌이 치면서 돌고 있습니다.

이른바 원심력, 구심력이 있어서 돕니다.

태양계는 은하계 중심으로부터 3만 광년 거리에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지구는 하루가 24시간이고 365일만에 태양을 한바퀴 돕니다.

경전에 보면 지구의 백년이 하루인 별이 있고, 천년이 하루인 별, 만년이 하루인 별, 겁이 하루인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환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내가 중심이 되어 오만 명의 사람을 세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늘어선 사람들이 은하계가 돌듯 사람마다 자전 공전하면서 돕니다.

그렇게 일제히 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2만번째의 사람은 3만번째의 사람보다 회전속도가 느릴 것이고, 만번째보다는 회전속도가 빨라질 것입니다.

즉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회전이 빨라집니다.

그래야 같이 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하계도 중심 쪽으로 갈수록 낮과 밤이 길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지구의 100년이 하루인 별이 실제로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몸은 고체와 액체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고체와 액체의 응집력 때문에 서로 끌어당깁니다.

벗기고 버리라고 했는데 우리 인간은 자꾸만 끌어들이려고만 합니다.

그렇게 끌어당기는 힘이 집착입니다.

3만번째 지구는 2만번째 별보다 회전속도가 빠르니까 딱딱하게 고체와 액체로 응집 되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전속도가 느려지면 응집력이 약해져서 중력을 적게 받습니다.

끌어당기면 끌어당길수록 응집력이 강하고 집착력이 강해서 덩어리가 생기지만, 자꾸 베풀고 벗기고 내보내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져서 뜨게 됩니다.

베풀고 펼치면 내 몸과 마음이 변화되어 실제로 천당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승화되면 천당극락에 가는 것입니다.

광활한 우주의 무량한 별들은 우리가 마음의 수행에 따라서 가게 되는 겁니다.

(화엄경)에 중생들의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태어나는 별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태어나는 나라가 다르고 부모가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급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는 정도에 따라서 다 다른 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겁니다.

출가하는 마음, 베풀고 펼치고 벗기는 마음, 집착을 없애는 마음은 나를 띄웁니다.

번뇌를 벗기면 고체성 액체성이 깨져버려 한없이 가볍게 됩니다.

집착이 강한 인간은 고체와 액체의 응집력이 강해지고 점점 하등으로 내려갑니다.

▷ 죽음 철저히 생각할 때 삶 빛나

경전에서 지옥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하루 밤 하루 낮에 만 번 죽고 만 번 태어나는 중생이 사는 곳이라고 합니다.

물론 허망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주를 돌고 돌면서 우리는 완전자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

‘나를 생각하는 마음 반, 남을 생각하는 마음 반이 되어야 인간으로 온다’고 설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40,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60이면 하늘의 신장이 됩니다.

팔부신장천에 태어납니다.

점점 가벼워져서 뜨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를 생각하는 마음 60,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40이면 축생으로 떨어집니다.

이처럼 인간은 마지노선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같아야 인간으로 오는 것입니다.

뭔가 비우면 채워지고, 베풀면 오게 되는 것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공을 살짝 던지면 가볍게 튀어나오고, 세게 던지면 세게 튀어나옵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항상 부처님 전에 회향하세요.

삶에 대한 애착을 놓아버리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정말 자기를 벗겨보기 바랍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는 버림의 미학 속에서 사세요.

부처님은 유성출가에서 ‘모든 것을 버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다 버리고, 걸식하시다가 한줌의 재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한줌의 재가 됩니다.

버리고 던지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여 광주를 불심의 고장으로 만드는 역군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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