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다스리기(수행의 핵심
-법상스님-
불교 수행의 주안점은 ‘느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느낌을 바로 보고 닦아낼 수 있을 때 업식(業識)을 더 이상 짓지 않을 수 있는 밝은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몸에서 느낌을 일으키는 곳은 육근(六根)이라 하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뜻 이렇게 여섯 가지입니다.
이를 주관계의 감각기관이라 하며 이는 다시 객관계의 여섯가지 대상, 즉 육경과 접촉을 일으키게 됩니다.
육경이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뜻의 대상 이렇게 여섯가지입니다.
바로 이 여섯가지 주관계의 감각기관, 육근에서 그 대상인 여섯가지 객관계의 대상 즉 육경을 접촉할 때 느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느낌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는 느낌(무관심) 이렇게 말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교설이며 우리가 몇 번이고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세가지 느낌에서 삼독심(三毒心)이 나오며 각종의 분별작용과 나아가 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심이란 탐내고(貪心), 성내고(嗔心), 어리석은(癡心) 마음으로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무명을 의미합니다.
좋은느낌(樂受)을 계속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서 탐심(貪心, 탐냄, 애욕)이 생기며, 싫은느낌(苦受)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진심(嗔心, 성냄, 화냄)이 생기고, 본래 좋고 싫음이 나누어 있지 않은 무분별의 느낌에 ‘좋은느낌’ ‘싫은느낌’ 하고 분별하고 나눔으로 인해 치심(癡心, 어리석음, 무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기관, 우리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느낌’들은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탐진치 삼독심의 원동력이 바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삼독심이 원인이 되어 각종의 분별(識)과 행위(業)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중생인 이유, 윤회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느낌을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열반(涅槃)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말해 삼독심의 소멸, 즉 무명의 소멸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길, 열반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육근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닦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눈으로 색을 바로보고, 귀로 소리를 바로듣고, 코로 냄새를 바로 맡고…
그렇다면 바로 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본다는 것은 세 가지 느낌을 통해 따라 일어나는 삼독심을 일어나지 않도록 차단해 버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부수적으로 따르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그 앞 단계 즉 느낌의 단계에서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시시해’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으로 사념처 혹은 요즘 말로 위빠싸나라고도 이름합니다.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꼬집었다고 했을 때 싫다라는 느낌을 일으키기 전에 그 꼬집었다는 느낌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싫다는 느낌을 일으키면 연이어 진심, 즉 성내는 마음이 따라 일어나게 되고 성냄의 마음은 곧 다툰다던가 싸운다던가 나쁜 마음을 가지는 그 어떤 의지적 행위, 즉 업을 쌓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쉽게 말해 왜 꼬집냐고 상대에게 화를 내고(진심) 화내는 마음에 상대를 미워하고(의업) 욕하며(구업) 다시 꼬집거나 싸우는(신업) 등의 행위(업)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업으로 인해[인(因)] 상대는 또 다시 나를 미워하게 되며[과(果)] 나중에 그 어떤 행위로써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응보(應報)] 이번 생에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죽으면 반드시 다음 생에까지 나를 따라와 그 원한을 갚고자 할 것입니다.
짓고 받음의 도리, 인과응보의 도리는 철두철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회인 것입니다.
이렇듯 이렇게 일으킨 한 번의 싫다는 느낌이 끊임없는 분별을 일으켜 삼독심이며 업과 윤회의 원동력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꼬집는 순간 ‘왜 꼬집을까’ ‘아파 죽겠다’ ‘이게 죽을라고…’ 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켜봄의 힘이 커지게 되면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그 어떤 싫다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바로 볼 수 있게[정견(正見)] 될 것이며 그 느낌에 내가 흥분해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몰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올바로 지켜보기만 하면 내면에서 저절로 저절로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는 고(苦)도 락(樂)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연화합의 현상 그 자체일 뿐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락이란 실체가 있다면 상대방을 꼬집을 때도 내가 아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인연따라 상황따라 대상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 것입니다.
나를 꼬집으면 아프고, 내 자식이나 부모를 꼬집어도 어느정도 (마음이)아프지만 전혀 모르는 상대를 꼬집으면 안 아프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꼬집으면 아프기보다 즐거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꼬집는다는 그 자체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올바로 지켜본다면 느낌에 노예가 되질 않게 됩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지켜볼 뿐 그로인해 마음에 그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꼬집는다는 그 마음은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도 없으며 또다른 업을 짓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키스를 했을 때(觸) 좋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좋은 느낌을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우린 애욕과 탐심을 일으키며, 그로인해 계속 만나고 싶다거나(의업) 또 키스하고 싶다(신업)에서 나아가 결혼하고 싶다, 사랑한다(구업)고 말하는 등의 각종 의지적 작용, 즉 업을 낳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애욕이 생기며 애욕은 집착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면 다음 생에서까지 그 업식으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업이 생기고 윤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직 지켜봄에 머물어야 합니다.
다만 지켜볼 때는 그저 ‘지켜볼 뿐’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할 뿐’입니다.
절대 그 외의 다른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순간 순간 지켜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놓지고 나면 이미 그 느낌은 닦이지 못한 채 과거나 미래로 멀어질 것입니다.
주관인 육근이 객관인 육경과 촉(觸)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이미 우리의 마음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말하는 다음 단계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을 지나 한없는 번뇌와 고를 동반하여 새로운 존재를 낳는 윤회의 사슬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생노병사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을 일어나는 단계별로 살펴본 교설인데 쉽게 말해 이 열 두가지 단계를 밟아 인간이 윤회하며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어느 한 가지 단계를 소멸하면 열 두 가지의 모든 지분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십이연기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입니다.
느낌수행은 이 가운데 수(受, 느낌)의 단계에서 느낌 그 자체를 닦음으로써 다음의 지분인 애, 취, 유, 생, 노사…
로의 흐름을 미리부터 소멸시켜 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분류인 오온(五蘊)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다섯가지 가운데 정신적 분류인 수, 상, 행, 식 중 ‘수(受, 느낌)’를 닦아내는 수행인 것입니다.
‘수’를 닦음으로써 수에 연이어 일어나는 상, 행, 식의 각종 정신 작용 또한 소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느낌(수)이 일어나니 마음속의 분별(식)이 일고 그에따라 의지작용(행)이 일어나며 그 인연으로 표상작용(상)을 일으키기에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지혜(여실지견)가 일어나고 그에따라 어리석은 분별, 행위, 표상작용 또한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행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할 뿐’ 이 되어야 하며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다른 분별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시금 ‘할 뿐’으로 돌아와 순간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밝은 수행자들과 우리네 중생들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점, 즉 느낌 다스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라고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육근과 육경이 있는 한 두 가지가 촉(觸)하게 마련이고 촉이 있는 한 느낌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함으로써 느낌 다음 단계인 애욕, 집착 등으로 마음을 넘겨보내지 않습니다.
느낌 그 자체를 온전히 관찰함으로써 번뇌로 연결되는 것을 능히 막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한 좋은 예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부들이나 수행자나 모두 세가지 느낌을 일으킨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범부들은 싫은느낌이 일어날 때 괴로움에 빠져 슬퍼하다가 점점 혼미해지느니라.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 그에 비해 수행자는 싫은느낌을 받아도 비탄에 빠지거나 슬퍼하며 혼미해지지 않느니라.
나는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꼬집힘을 당해서 오는 아픈 느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라면 수행자는 마땅히 그 싫은 느낌을 올바로 관찰하고 다스려 더 큰 괴로움과 번뇌가 되도록 마음을 진행시키지 않음으로써 그저 흘려보냄으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풀려 ‘싫은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를 모두 느끼지만 그 느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시고 열병에 걸리셨을 때의 그 괴로운 감각을 수행으로 닦아가신 것을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꼬집혀 싫은 느낌과 함께 두 번째 화살인 온갖 번뇌를 일으킵니다.
즉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욕하고, 함께 꼬집고, 증오하는 등의 온갖 또 다른 업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 즉 경계를 맞아 탐진치 삼독심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윤회의 원동력인 업식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 좋고 싫은 그 어떤 느낌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방법, 그 방법이 바로 지켜봄의 수행인 것입니다.
방하착 수행이 ‘집착’을 놓아버리는 수행이라면 오히려 관수행은 그 이전단계인 ‘느낌’에 대해 관함으로써 애초부터 갈애며 집착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집착 이전 단계인 느낌 또한 놓아버릴 것이며 이미 일으킨 집착이라도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놓음이 바로 관이며 관이 바로 놓음 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