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信心銘) 강설 25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모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일체 만법이 여여한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모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건가(釋迦猶未會어니 迦葉豈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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