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한 다음에 두 법을 부정하였읍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 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 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 을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도 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 (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치는 (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다(遮而照)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 (遮照同時) 중도 정의는 다름이 없읍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토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읍니다.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읍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性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