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총스님─믿고 사는 세상

믿고 사는 세상

혜총스님

사람이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명철한 두뇌는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어리석음에 빠지곤 합니다.

부부간에 의심하는 병인 의처증과

의부증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금술이 좋던 부부가 남편의 의처증

때문에 순간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던 남편이 그 사랑이

지나쳐서 아내가 시장가는 일도 못하게 하고 얼굴에

화장도 못하게하고, 직장에 나가서도 수시로 집에

전화해서 아내를 감시하는 남편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 그 부부간 삶이 오죽 하겠습니까?

아내도 참다 참다가 나중에는 병이 나거나 남편과

불화를 일으키고 가정을 지키기 힘들게 됩니다.

의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파멸로 이끌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남을 의심

했다가 나중에 스스로 무안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물건을 찾지 못해서 괜히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의심했다가 나중에 어디서 찾게 됬을 때처럼

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성급한 나 자신이 밉기도 하고 후회도 됩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 께서는

“의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의심은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근본 원인이며,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는 독이다.

의심은 또 서로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칼날이고,

서로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시다.”

라며 의심에 대해 이렇게 경계하고계십니다.

이와 같이 무서운 것이 의심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는 것 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믿고 살아 갑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아프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믿어서 좀 손해 보는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서로 믿지를 못해서 서로 곁눈질하고 성내고

시기해서야 그게 어찌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는 세상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보광스님─어머니 살려준 염불신행

어머니 살려준 염불신행 (

보광스님

)14살때 어머니위해 철야 관음기도 대학생때 15일간 지장기도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 지금까지도 큰힘 나의 경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기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도에 몰입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 14살 때인 것 같다.

우연히 득병하신 어머님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그래서 마을 뒤 단석산에 있는 백석암(白石庵)이라고 하는 암자에 가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으며, 법당에는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정도로 외풍이 세었다.

주지스님의 지도에 따라서 음력으로 12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납월 팔일에 회향하는 관세음보살 기도였다.

스님께서는 어린 나를 두고 “너희 어머니가 회복하려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밤잠도 자지말고 다른 생각도 말며,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아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님을 살려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법당에서 하룻밤, 이틀 밤을 세우면서 일심으로 불렸을 뿐이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7일이 지나 회향일이 되었으며, 그 날이 바로 성도절이었다.

7일 동안을 법당에서 철야을 하였으나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추웠다는 생각보다는 한 밤중에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것 같아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밤 새워 치는 목탁소리에 주지스님도 방에서 잠을 자지 않고 염불하셨던 것 같다.

당시의 기억 가운데 가장 신기하였던 것은 회향을 하고 하산하는데 마을의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우는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등 모든 소리가 관세음보살의 염불소리로 들렸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이틀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물론 어머님의 병세도 호전되어 완쾌하셨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출가한 뒤에야, “모든 삼라만상이 부처님 아님이 없으며, 모든 소리가 법음(法音)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번의 경험은 출가 한 뒤 대학 2학 때였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방학에 은사 스님이 계시는 경주 ‘중생사(衆生寺)’에서 지장기도를 15일간 철야로 한 일이 있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법당에서 기도하다가 죽을 각오로 기도발원을 하였다.

앉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서서 목탁을 치면서 24시간을 계속하여 염불을 하였다.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법당에서 염불을 계속하였다.

처음 하루는 시작하는 마음으로 보냈으며, 이틀 삼일 사일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었으며, 칠일이 고비였다.

한 밤 중에 기도를 하고 있으면, 약간 떨어진 요사채에서 잠자는 소리, 코고는 소리, 잠꼬대하는 소리까지 들리곤 하였다.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팔일이 되고,구일이 지나 십일이 넘어서니 모든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으며, 상쾌하였다.

마치 날아갈 것 같이 정신은 맑았다.

보름 동안의 철야기도를 회향하고 나니, 몸무게는 10키로가 줄었다.

그러나 너무나 또렷하고 맑은 마음은 마치 유리그릇과 같이 투명하다고 생각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경험은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정토염불신행을 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때의 관음기도와 청년기의 지장기도가 이제는 아미타불염불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나의 근기에는 염불신행이 가장 적합한 수행방법인 것 같다.

해월스님─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르다

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르다

-해월스님-

제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가난한 유학승 신분에 햇살드는 비싼 집을 구할 수 없어서 빛 없는 집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다음에는 절대로 햇빛 들지 않는 집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해인사 근처에 혼자 공부하는 처소 하나를 장만하고 사방을 유리로 만들어 햇살 넘치는 집을 지었습니다.

그 후 대구 동화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어 가끔 오고가는 형편이 되었는데, 작은 결백증이 있는 탓에 갈 때마다 유리를 깨끗하게 닦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소에 도착해 보니, 많은 참새들이 집 앞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유리가 허공인 줄 알고 날아가다가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을 본 뒤로, 이전만큼 유리를 깨끗하게 닦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청결한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은 새들에게 미안해 하며 해당화 나무 밑에 고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이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그간 꽃을 피우지 못했던 해당화 나무가, 이듬해 너무나 예쁜 꽃을 피워 올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그 순간, 꽃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참새들아.

너희들이 해당화 뿌리로 들어가 봄날에 꽃으로 되살아났구나.

눈앞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구나.

너희들은 죽지 않았구나.’ 존재는 해체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롭게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잡초일지라도 새로운 세계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타서 맑은 쪽빛을 만들고, 호랑이가 푸른 하늘 새가 되어 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도님 집에서 죽은 백구는 개의 몸을 버리고 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죽은 참새들의 무덤을 해당화 옆에 있는 목련꽃 아래 만들었다면, 참새는 목련꽃 향기로 나타났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 옆 사철 푸른 소나무 아래 무덤을 만들었다면 소나무가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에 묻어주었는가에 따라서 새가 가는 곳이 달라집니다.

사람 역시 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 천 년 동안 공든 탑을 쌓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과 탄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해체와 탄생 속에서 잠시 서 있을 뿐입니다.

집착과 아집과 교만, 착각과 전도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정이기에 이 삶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해 같은 삶이라 하여도, 고해 속에도 희망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에는 새로운 세계를 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히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내일의 탄생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꽃은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언제나 새로운 세계는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선인들이 즐겨 하는 꿈 이야기는, 현실도피로서의 꿈이 아닌 꿈에서 깨어난 참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꿈꾸다 깨어나면 모든 것은 허망하고 잡을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기쁨도, 분노도, 사랑도, 탐욕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낱 환상(幻想)일 뿐,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꿈을 갈구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망 또는 갈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망상번뇌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해탈이고, 꿈에서 깨어나는 자가 출가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일 뿐 실체가 없는데, 우리는 보통 그 무엇인가를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혹입니다.

미혹을 중심으로 생각과 사고, 인식, 의식들이 일어납니다.

생각은 즉각적인 것이며, 사고란 생각이 연결된 것입니다.

인식이란 고정적인 관념이며, 의식이란 축적된 것들입니다.

마음 속에서는 늘 미혹을 중심으로 생각, 사고, 인식, 의식이 쌓여 있는 업(業)들이 자기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끝없이 일어나서 괴로움이 됩니다.

일어남이 없는(無心) 길이 도(道)입니다.

도인들은 “어떻게 도를 구하여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도를 구하지 마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수행입니까?”라고 물으면 “자신의 성품을 오염시키지 마라.”고 합니다.

원하고 구하고 바라는 것이 없기에 만족도, 얻는 것도 없습니다.

일어남이 없기에 사라짐도 없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不起心)이 도(道)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도입니다.

도(道)란 상(相)과 용(用)을 떠난 체(體)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인연으로 만들어진 상(相)이며, 그 작용인 용(用)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도인은 체(體)를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체는 깊은 거울과 같아서 모든 것을 잠시 비출 뿐, 비어 있습니다.

거울은 그 어떤 집착도, 구하는 바도 없고 미,추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분별을 일으켜서 생각을 만들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요, 병목생화(病目生花)입니다.

허공에 본래 꽃이 없는데 보는 사람이 눈병이 생겨서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