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스님─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르다

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르다

-해월스님-

제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가난한 유학승 신분에 햇살드는 비싼 집을 구할 수 없어서 빛 없는 집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다음에는 절대로 햇빛 들지 않는 집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해인사 근처에 혼자 공부하는 처소 하나를 장만하고 사방을 유리로 만들어 햇살 넘치는 집을 지었습니다.

그 후 대구 동화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어 가끔 오고가는 형편이 되었는데, 작은 결백증이 있는 탓에 갈 때마다 유리를 깨끗하게 닦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소에 도착해 보니, 많은 참새들이 집 앞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유리가 허공인 줄 알고 날아가다가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을 본 뒤로, 이전만큼 유리를 깨끗하게 닦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청결한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은 새들에게 미안해 하며 해당화 나무 밑에 고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이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그간 꽃을 피우지 못했던 해당화 나무가, 이듬해 너무나 예쁜 꽃을 피워 올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그 순간, 꽃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참새들아.

너희들이 해당화 뿌리로 들어가 봄날에 꽃으로 되살아났구나.

눈앞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구나.

너희들은 죽지 않았구나.’ 존재는 해체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롭게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잡초일지라도 새로운 세계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타서 맑은 쪽빛을 만들고, 호랑이가 푸른 하늘 새가 되어 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도님 집에서 죽은 백구는 개의 몸을 버리고 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죽은 참새들의 무덤을 해당화 옆에 있는 목련꽃 아래 만들었다면, 참새는 목련꽃 향기로 나타났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 옆 사철 푸른 소나무 아래 무덤을 만들었다면 소나무가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어디에 묻어주었는가에 따라서 새가 가는 곳이 달라집니다.

사람 역시 인연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 천 년 동안 공든 탑을 쌓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음과 탄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해체와 탄생 속에서 잠시 서 있을 뿐입니다.

집착과 아집과 교만, 착각과 전도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정이기에 이 삶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해 같은 삶이라 하여도, 고해 속에도 희망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에는 새로운 세계를 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히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내일의 탄생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꽃은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언제나 새로운 세계는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선인들이 즐겨 하는 꿈 이야기는, 현실도피로서의 꿈이 아닌 꿈에서 깨어난 참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꿈꾸다 깨어나면 모든 것은 허망하고 잡을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기쁨도, 분노도, 사랑도, 탐욕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낱 환상(幻想)일 뿐,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꿈을 갈구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망 또는 갈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망상번뇌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해탈이고, 꿈에서 깨어나는 자가 출가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일 뿐 실체가 없는데, 우리는 보통 그 무엇인가를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혹입니다.

미혹을 중심으로 생각과 사고, 인식, 의식들이 일어납니다.

생각은 즉각적인 것이며, 사고란 생각이 연결된 것입니다.

인식이란 고정적인 관념이며, 의식이란 축적된 것들입니다.

마음 속에서는 늘 미혹을 중심으로 생각, 사고, 인식, 의식이 쌓여 있는 업(業)들이 자기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끝없이 일어나서 괴로움이 됩니다.

일어남이 없는(無心) 길이 도(道)입니다.

도인들은 “어떻게 도를 구하여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도를 구하지 마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수행입니까?”라고 물으면 “자신의 성품을 오염시키지 마라.”고 합니다.

원하고 구하고 바라는 것이 없기에 만족도, 얻는 것도 없습니다.

일어남이 없기에 사라짐도 없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不起心)이 도(道)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도입니다.

도(道)란 상(相)과 용(用)을 떠난 체(體)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인연으로 만들어진 상(相)이며, 그 작용인 용(用)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도인은 체(體)를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체는 깊은 거울과 같아서 모든 것을 잠시 비출 뿐, 비어 있습니다.

거울은 그 어떤 집착도, 구하는 바도 없고 미,추를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분별을 일으켜서 생각을 만들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요, 병목생화(病目生花)입니다.

허공에 본래 꽃이 없는데 보는 사람이 눈병이 생겨서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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