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스님─기도의 가피

관세음보살께 백일기도하고 눈 뜬 중년신사 (

법철스님

글 전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향가 가운데 도천수대비가를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千手), 천안(天眼)의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향가를 통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 슬픔속에 관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만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우는 화창한 봄 날.

산새소리 가득한 강진 무위사에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필자는 그때 무위사 큰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고목나무 밑에 놓여 있는 깨어진 멧돌 위에 정좌하여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남자는 필자에게 정중히 합장 인사를 하고는 어눌한 음성으로 무위사에 관세음보살님의 국보 벽화가 봉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으며 관음기도를 지성껏 모셔보고 싶노라고 허락을 구해왔다.

그는 슬픈 얼굴로서 후리후리한 키에 회색 양복을 입었고 한 손에는 낡은 트렁크를 힘겹게 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나 필자는 이내 그의 설명을 듣고 속사정을 알았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경북 포항 사람으로 그동안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며 일개미처럼 열심이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 왔다.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 오더니 마침내 눈 뜬 장님이 되다시피 되고 말았다.

“아, 내가 앞을 못 보게 되다니….” 그는 나날이 잃어가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발악하듯 몸부림을 치며 유명하다는 병원의사는 성지순례하듯 찾았다.

병원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망에 빠져 울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 마지막으로 신불(神佛)께 기도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무위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정수(吳定洙).

필자는 오정수씨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무위사에서 기도할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다.오정수는 각오의 뜻으로 삭도로 머리칼을 밀어 버렸다.

그리고 극락보전안에 있는 후불벽화인 수월백의관음벽화 앞에서 촛불과 향화를 받들면서 백일을 기한하고 천념 염주를 헤아리며 지성으로 관음기도를 올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정수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무위사의 적막한 도량을 넘쳐 흘렀다.

죽기를 한하고 지성으로 기도하던 오정수는 백일기도가 끝나가는 즈음에 놀랍게도 두 눈이 밝아졌다고 부르짖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확신합니다.”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오정수는 다시 트렁크를 들고 필자 앞에 섰다.

눈이 웬만하니 걱정하며 고대하는 처자에게 달려가고 싶고,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가장의 책무를 다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작별하는 즈음에 오정수는 호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그동안 산사에서 체류하게 해준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부족한 돈이지만 시주금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하며 필자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필자는 빙긋 웃고 다시 그 돈을 돌려주며 기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치하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 인연 있어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자는 멀어져가는 버스 차창을 통해 오정수씨의 흔드는 손을 답례하여 마주 손을 흔들면서 내내 앞서의 신라의 향가를 생각하였다.―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관음전에 비옵나니, 천수,천안 그 중 한 눈, 눈 먼 저에게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옵시면 자비 더욱 크오리다.

무위사 수월백의관음보살님이 고해중생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고해대중이여, 우주에 의지할 성인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권장하오니,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이승의 인연들을 작별하면서 한과 눈물속에 홀로 머나먼 저승으로 떠나갈 때 까지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시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가 세연이 다해 육신의 탈을 벗고 어둠속에 홀로 울며 머나먼 윤회의 길을 떠나려 할 때 반드시 광명으로 나투며 현신하여 우리의 영혼을 반드시 구원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받아 마시고 대구시 동구 덕곡동 대덕화보살님의 수기 저는 오래전부터 대장염을 앓아왔습니다.

빈혈이 심해 병원에 갔다가 궤양성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도 몇 년간 꾸준히 다녔지만 증세는 좋아졌다간 다시 나빠지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간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는데 저는 완치가 되지않고 더 심해졌습니다.

식이요법은 물론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빈혈로 밖을 다니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모든 약을 중단하고 음식물로써 영양소를 섭취해야 하는데 몸이 그 음식을 받아주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유산을 권했습니다.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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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남편이 결혼 전에 가끔씩 나가던 영남불교대학에서 ‘좋은인연 신문’을 가지고 왔더군요.

집에서 끙끙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뭐든지 읽을거리를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그 신문을 보다가 신행수기를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로써 가피를 입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도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졸라 절을 찾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또 지금 낳지 않으면 언제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몸이 더 건강해지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이상하게도 ㅇㅇ불교대학·관음사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노천법당에 서 계시는 관세음보살남을 뵙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그 러나 남편의 이런저런 이야기와 법당을 둘러보면서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인지 곧 어지럼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제 안색을 살핀 남편이 저를 얼른 노천법당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몸에서 힘이 좍 빠져나가고 저는 그만 남편에게 기댄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남편이 제 몸을 주무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봐도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뜻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제 옆에 서계신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관세음보살님,관세음보살님! 아기를 낳고 싶어요.살려주세요’ 관세음보살님이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제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손에 든 감로수병을 천천히 기울였습니다.갑자기 온몸에 향기로운 감로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저는 감로수에 머리까지 다 잠겨버렸습니다.

감로수는 햇살을 받아 사방으로 무지개 빛을 뿌렸습니다.

잠시 후 관세음보살님이 다가오시더니 다시 이마에 손을 짚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이 많은 감로수를 저 혼자 다 써버려서 어떡합니까!” 관세음보살님은 환하게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로수는 곧 저의 마음이니 한량없습니다.

이 온 우주,온 법계를 적시고도 수억겁 동안 흐릅니다.” 저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감로수의 물결 속에서 삼배를 올렸습니다.절을 하면서도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마치 날아갈듯 했습니다.”여보!” 남편의 절박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남편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회주스님께서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계셨습니다.

“보살님,괜찮으십니까? 구급차를 불러두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저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괜찮습니다.스님.” “여보?” 남편이 울먹이며 저를 불렀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를 마시고 완전히 몸을 담그기까지 했어요!” 남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괜찮은지 의심스러워 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보았습니다.

정말 멀쩡했습니다.어지럽거나 구토 증세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나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뛰어도 보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남편은 제가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대장염은 물론이고 빈혈과 그 외 합병증도 증세가 완화되어 있었습니다.

생활하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었고 약을 먹지 않고도 빈혈이 차츰차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2주 쯤 뒤에는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아이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후,저는 가끔 회주이신 우학스님의 꿈을 꿉니다.

한번은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출연료를 받아야겠구만’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와 우학스님의 은덕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대원심 보살 아들의 병을 완치시켜주신 관세음보살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 관음신앙.

관음기도법 김 현준저

‘죽음의 길에서 다시 인간으로’ (관음기도 영험담) |1924년 7월의 ‘불교’지 창간호에는 ‘冥路(명로)에서 다시 인간’이라는 제목의 신행영험담이 수록되어있다.

이 영험담의 주인공인 원각화보살은 서울 대각사의 신도로서,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 순득을 키우며 살았다.

원각화보살은 7일에 한번씩 백용성 스님께서 설법하는 대각사 법회에 참석하였고, 평소에도 관세음보살 염불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원각화보살에게 뜻하지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금쪽같은 딸 순득이가 16세가 된 해 12월에 병을 얻은 것이다.

처음 감기처럼 시작한 병은 폐렴으로 악화되더니, 심한 기침과 고열이 계속되면서 점점 사경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종합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나, 순득의 병은 낫지않았고, 명의를 찾아다니며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방법으로 수술을 해보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수술을 받는다고해도 환자의 몸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있어 살아나면 천행이라는 것이었다.

수술을 해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원각화 보살은 기로에 놓이게 되었고,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위험하기가 마찬가지라면 수술을 하지않고 최선을 다해보자.

이제 내가 의지할 분이라고는 관세음보살님밖에 없다.’ 원각화보살은 딸을 대각사로 업고 가서 법당 바닥에 눕혀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순득이가 죽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들으며서 죽게 하겠다는 각오로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그야말로 일념의 기도를 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이 잠들어 있던 딸이 부르짖었다.

“싫어요, 가기 싫어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래요.” 원각화보살은 딸을 급히 깨웠고, 순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 이야기를 하였다.

오색찬란한 가마가 누워있는 순득이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마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내려 말씀하셨다.”순득아, 나와 함께 이 가마를 타고 가자꾸나.” “관세음보살님, 저는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해요.” 순득이가 거듭거듭 고집을 부리자 관세음보살은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씀하셨다.

“순득아, 너의 정해진 수명은 17세란다.

하지만 너의 효성이 지극하고 어머니의 신심이 돈독하니 명을 연장시켜주지 않을 수 없구나.” 순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원각화보살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며칠 후 관세음보살은 원각화보살에게 현몽하엿다.

“순득의 병을 완전히 고치려면 감로수를 마셔야 한다.

감로수는 삼청동 성채의 절 뒷쪽에 있는 석벽과 석벽 사이에서 솟아나오느니라.” 이튿날 원각화보살은 삼청동으로 가서 하루종일 감로수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피로에 지친 그녀는 잠시 바위위에 주저앉았고 , 바위 앞쪽으로 배어나오는 물기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급히 그곳을 파서 웅덩이를 만든 다음 고여드는 물을 떠다가 딸에게 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원각화 보살은 감로수를 찾기위해 매일 삼청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입으로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외며 감로수를 찾아 헤맨지 일주일.

마침내 원각화보살은 북악산 정상 가까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석벽을 찾아냈다.

맑고 정갈한 물이 분명 돌틈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원각화보살은 관세음보살께 감사드리며 그 물을 담아다가 딸에게 먹였다.

그리고, 물에 몸을 씻기기도 하였다.

10여일이 지나자 딸의 엉덩이에서 흐르던 고름이 멎었고, 얼굴에는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10여일 후 순득의 병은 완치되었다.

의사가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고쳐준 것이다 어머니의 일념에 감응한 관세음보살께서…

출처: 관음신앙.관음기도법(김 현준저) 도서출판 효림간 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한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일제 말기, 논산군 논산읍 등화동에는 강태희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선대에는 한 해에 수천석을 추수하던 집안이었으나 차츰 몰락하여 산비탈의 오두막을 빌려 살 지경에 이르렀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모든 의욕을 상실한 강태희씨는 깊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고, 부인이 떡장수를 하여 겨우 연명하였다.

하루는 강태희씨의 집에 보명사의 자명스님이 찾아왔다.

강태희씨의 문중 산에 보명사를 짓도록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집안사정과 병들고 지친 모습을 접한 자명스님은 간곡히 권하였다.”불교에 귀의하십시오.

내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는 부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 조르는 것이 제일입니다.

정성껏 기도해 보십시오.” “지금 형편으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처사님, 기도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러운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맑은 물 한 그릇을 올리고 불보살님의 이름만 외워도 됩니다.

속는 셈치고 노는 입에 염불을 해보십시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서 기도하기 힘들면 우리 절에 찾아오십시오.

소승과 함께 염불을 하십시다.” 자명스님이 간곡히 기도를 권한지 1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강태희씨는 보명사를 찾아왔고, 스님은 반갑게 맞이하여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우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십시오.” 그는 스님의 지도에 따라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백일 정도 지났을 무렵 관세음보살의 현몽이 있었다.

노인으로 모습을 바꾼 관세음보살이 불그스름한 물을 건네준 것이다.

“마셔라.” 姜泰熙씨는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은 날아갈듯이 가벼워져 있었다.

그 뒤 그의 가족은 열렬한 불자가 되었고, 집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강태희씨의 부인은 떡장수를 그만두고 물감장수 행상을 하였고, 물감을 팔러다니다가 알게된 주단 포목 도매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옷감을 외상으로 줄테니 옷감장수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옷감을 떼어 시골로 다니며 파는 보따리 장수를 시작하였고,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3년이 지나지않아 가게를 얻을 수 있을만큼의 돈을 모았으며, 운이 활짝 열려 가게를 연지 몇 년만에는 논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갑부가 되었다.

어두운 불행의 기운을 밝음으로 바꾸어 놓는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었던 것이다.

출처: 도서출판 효림간 김 현준저 관음신앙,관음기도법

혜국스님─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나를 향상시키는 역행보살 –

혜국스님

(석종사 선원장)- 이 세상과 역행보살(逆行菩薩)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사바(娑婆)입니다.

잡된 업(業)으로 얽혀 있어 참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바세계이기에 완전하 게 악한 사람은 이곳에 못 태어납니다.

완벽하게 선한 사람 역시 이 세상에 못 태어납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악과 선이 섞인 사람만이 이 지구상에 태어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악 한 사람도 그 마음에는 선한 기운이 있고, 아무 리 선해보여도 악한 기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의 주위에는 때때로 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 곧 역행보살(逆行菩薩)이 있어 우리의 앞길을 시 험합니다.

이 역행보살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도 여러 명의 역행보살이 있었 으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제바달다였습니다.

– 야심의 노예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요 아난존자의 형입니다.

그는 우바리 아난 등 석 가족의 여러 형제들과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바달다는 올바른 수행은커녕, 날이 갈수록 나태함에 빠져들었습 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처 님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마가다국의 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빔 비사라였으며, 태자는 아자타삿투였습니다.

아자타삿투는 제바달다의 꾐에 빠져 부왕 빔비 사라를 옥에 가두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으 며,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업고 부처님의 교단을 빼앗을 궁리를 하 였습니다.

어느 날, 제바달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영 축산으로 부처님을 찾아와 무례한 제의를 했습 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너무 연로하신데다 건강도 좋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교단을 저에게 맡기시 고 편히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거절하자, 제바달다는 아자타삿투왕 을 충동질하여 부처님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 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잘 쓰는 자객을 부처님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그 옆에까지 간 자객은 몸이 떨리기만 할 뿐 꼼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 물으셨 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떨고만 있느냐?” 자객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부처님 앞에 엎 드려 용서를 빌었으며, 부처님의 용서를 받은 그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 니다.

얼마 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내려오시는 날,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벼랑 위에 숨어 있던 제 바달다는 부처님께서 그 아래를 지나가시는 순 간 커다란 바위들을 굴려 떨어뜨렸습니다.

하지 만 정확하게 겨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들 은 몇 번 구르다가 좁은 골짜기에서 멈추고 말 았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 둘레를 감싸자 부처 님께서는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폭력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법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태연히 길을 가셨습니다.

두 차례 의 살해 음모가 모두 실패하자 제바달다는 부처 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성질이 몹시 사나운 코끼 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친 듯이 날뛰던 코끼리까지도 부처님 앞에 이르자, 코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끓어앉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제바달다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 자타삿투왕은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 제바달다가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스스로 부처님 을 찾아가 설법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치미는 분노와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제 바달다는 열손가락에다 독을 바르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였고, 부처님께 다가가 손가락 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할퀴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밟고 있던 땅이 갑자기 갈라져 그는 끝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완벽한 복덕과 인간관계를 갖추고 계셨던 부처님 에 대한 제바달다의 시기 질투와 불교교단 제1인 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습 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부처님을 괴롭혔고, 여러 차례 죽이고자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제바 달다를 끝없는 용서와 자비로만 대했습니다.

그리 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의 인격은 위로 위로 하늘끝보다 더 높이 올라갔고, 제바달다는 제 업 때문에 지옥의 불길 속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제바달다의 역행 덕분에 부처님의 인격이 더욱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인격을 갖춘 부처님께도 역행보살이 있었거늘, 복덕이 많이도 부족한 우리 중생들에 게 어찌 역행보살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주위에는 언제라 할 것도 없이 거의 대 부분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한 두 명 있습니다.

내 뜻을 거스르고,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 기 마련입니다.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과 더 불어 살아야 합니까? 지금 현재는 아닐지라도, 과거나 전생에 나 스스로 가 댜른 사람에게 미운 짓을 많이 했거나 미워하는 생각을 많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얄밉고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휩쓸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청량제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일지도 모른다.

받아들이 자.

그리고 풀자.” 만약 이 세상이 내 비위를 다 맞추어주고 내 말이 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면 내 영혼은 맑아질 수 없 을 겁니다.

오히려 아만만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하고 아양을 떨던 시절이 있 었습니다.

하긴 요즘도 그렇다고 합니다.

큰 사고 가 일어나면 일부러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 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진정으로 나라의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만약 옆에 애를 먹이는 아들딸이 없고 따끔한 말로 꼬 집는 친구가 없다면, 좋은 일만 있고 모두가 마음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실지로 이와 같다면, 그 사람은 눈 감는 날까지 자기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 니다.

문제가 생긴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깜깜절벽에 선 것 처럼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애먹이는 사람은 전생부터 선택된 사람입니 다.

나와 얽혀 내 영혼을 무장시켜 줄 뿐 아니라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도록 단련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곧 역행을 통하여 향 상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행보살(逆行菩薩)인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3월호에서 –

광덕스님─ 찬탄으로 佛國 이루리

***찬탄으로 佛國 이루리***

光德스님 법문 올해의 명념이라고 있습니다.

올해의 명념은 캠페인이라는 용어를 기왕에 썼던 모양인데 그 말은 제 뜻하고는 안 맞아요.

명념, 마음 속에서 새기고 새긴다.

샛길 명(銘)자 생각 염(念) 자예요.

새겨서 생각한다.

이것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찬탄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우리 사회의 한량없는 부처님 공덕이 충만한 것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말고 뜻과 온갖 정성 기울여서 부처님과 가족과 온 이웃과 자랑스러 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찬탄의 공덕으로 아름다운 소망과 빛나는 환경을 이룩하여 나갑니다.

” 이것은 (보현행원품)을 공부하실 때 우리가 배웠고 ‘보현행자의 서원’ 제3장에 이것이 나오니까 배웠을 것입니다.

이 찬탄을 명념하는 것으로써 우리기도 성취의 바탕을 삼았으면 합니다.

이 찬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칭찬하는 것입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하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현행원품을 공부할 때는 “부처님의 공덕은 어디 있느냐.

나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고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공덕을 다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서 부처님의 공덕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찬탄하라.

“고 보현행원품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찬탄할 때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이고, 찬탄하지 못할 때 지혜의 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일체 세계 일체 모든 사람이 찬탄 받아야 할 부처님의 공덕이시거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찬탄은커녕 비방한다고 하면 그것은 반야의 눈이 없는 것이다.

” 그런 공부를 우리는 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찬탄을 특별히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귀한 우리의 성품을 발견하고 긍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육체의 덩어리로, 물질의 변화로, 환경의 종속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깃덩어리이고 물질의 변형이고 환경의 종속물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인간의 가치가 있고 존엄이 있습니까.

인간의 신성이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누가 인간이 물질이 환경이 아니면 조건들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이 생각을 하면 톨스토이의 (참회록)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가 죽으려 할 때 죽으려는 순간 그 때 마음을 돌이 킨 것을 생각합니다.

“누구든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죽어야 한다는 판단을 누가 내리느냐.

” 바로 톨스토이는 자기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판단, 나의 지성이 나의 감성이 파악한 바 나의 지성이 결국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느냐.

나의 감성이 판단하는가.

나의 지성이 판단하는가.

나의 지성, 감정은 뭐하는 놈이냐 나의 생명의 앞선 자냐.

종속자가 아니냐.

종속자 종놈이 나를 죽으라고 어떻게 판단하느냐.

여기서 권능을 포기 할 것인가.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리 생활 주변이, 문명이, 기술 문명의 발달이 참으로 우리의 신성과 존엄을 키워 주기보다는 인간 자체를 물질과 그런 환경 조건의 종속 물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은 바로 물질의 연장이다.

아니 육체의 덩어리다.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판단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악독한 퇴폐적 사상이 물결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의 심성은 오염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도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판단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요.

고귀한 생명의 시간을 마치고 고귀한 재물을 바치고 배웠어도 모두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운 지식들이 인간의 소중한 참된 생명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면, 역사가 흘러가고 많은 지식이 발달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과학 문명이 발달됐으면, 인간의 덕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옛날 사람들보다 아름다워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생명,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덕성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아름다워졌느냐 할 때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옛날 사람이 세련됐다고 하고 요즘 사람들은 못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왜 못 그렇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지성이 참으로 인간 생명 자신을 위해 봉사해야 할 지성이 생명을 분산하고 생명을 쪼개내고 생명을 자기 자신과 동격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마침내는 그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거의 인간사회를 완전히 기계화하고 기계화의 판단에 의해서 인간을 종속화하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러한 것에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기계문명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 비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차원은 좀 다르지만 미국의 젊은이들 중에서 문명파괴 사상까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을 좀 딴 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반야의 눈으로 비춰 볼 때 우리의 생명 하나하나 이 하나하나는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 덩어리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하나가 무엇인가? 반야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반야의 문이 열리기 전에는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나를 제약하고 관장하고 제한하는 것 입니다.

산은 나의 앞을 막는 것이고 바다는 그리운 사람과 사이를 끊어 놓습니다.

시간은 노쇠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우리 주변이 그런 것이지마는 이것은 반야의 눈을 뜨고 보면 그런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제한적인 것, 이러한 사항들은 우리의 감정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허망한 지견이 보아 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반야의 눈에서 볼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실 고귀한 부처님의 공덕이 그 안에 충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가운데 악하고 못나고 이런 것만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내 생명 속에는 따뜻한 자비심이 깃들어 있고, 내 마음속에는 모두를 사랑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고, 내 생명 속에서는 건강한 것을 바라고 있고, 내 생명 속에서는 아름다운 평화를 추구합니다.

내 생명 속에서는 구석구석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내 몸에 건강과 조화를 요구합니다.

이 모두가 무엇입니까? 내 육체는 항상 말하다시피 이런 진리의 광명이 항상 깃들어 있어서 내 생명을 자동적으로 조정하고 있어요.

심층에 무의식 세계가 또한 그와 같이 해서 나의 생명을 조절시켜 주고 그 무의식 세계의 조율 세계가 모든 심정에 이르러서 또한 그와 같이 자기 조율을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건강과 안정과 지속적인 생명의 지속 연장을 추구해 갑니다.

내 몸뚱이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계가 실은 반야의 눈을 뜨고 보면 진진찰찰 화엄세상이다.

그야말로 티글티끌 하나 하나마다 무한한 장엄이 가득한 청정국토다.

반야의 눈이 없는 세계에서 보면 우리를 한계 짓고 속박하고 죄를 떨어뜨리고 금방금방 죽어 가는 죽음을 지향하는 인간이지마는 반야의 눈으로 볼 때는 이와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고귀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의 은혜라고 이를 수 있는 진리의 위력이 꽉 차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렇고 나의 사회가 그렇고 국토가 그렇습니다.

반야의 눈이 있는 사람이 비로소 이것을 보고 반야의 눈, 그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 형제들이 이렇게 볼 때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가, 경사스럽고 다행스럽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이 경사스럽고, 내가 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경사스럽고,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 서로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이 경사스럽고, 온 천지가 모두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반야의 눈이 그렇게 봅니다.

반야 아닌 눈은 불행스럽고 고통스럽고 나를 시기하는 사람뿐 이고 나를 못 살게 뒹구는 것으로 보기 쉽고, 불평 불만, 마침내 죽음을 지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고통이 충만된 악의 세계라고 보아질지 몰라도 이 반야의 눈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 내가 살고 있는 이 하나하나, 뼈가 이렇게 되어 있고, 거기 살이 붙어 있고, 거기 심줄이 붙어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할 수 있고 이것 하나하나가 진리 자체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얼마 전에 책을 들고 앉으려니 허리가 뜨끔했습니다.

허리가 뜨끔하니까 허리가 꺾어지는 것처럼 앞으로 팍 거꾸러져 버렸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차디찬데 가서 며칠 회의한다고 대여섯 시간 앉아 있었더니 못 일어났어요.

지팡이 두 개를 짚고도 못 일어나서 어떻게 근근이 끌려 차에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허리가 꿋꿋하게 이렇게 앉아 있으니 이 자체가 얼마나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입니까.

사람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더라도 내가 앉아 있는 것, 내가 걸어가는 것, 내가 저기까지 움직인다는 것 등등 하나하나가 몰라서 그렇지 끝없는 무한한 은혜와 한없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바로 나의 생명 나의 생활 나의 모두로 꽉 차 있건만 반야의 눈이 없인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전부 해치는 것이고 나를 죽이려 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고 불행스러운 것으로만 보아진단 말입니다.

내가 나가서 내신 내가 찾아 신고 한 걸음 그대로 옮겨가는 그 사이에도 신을 못 찾을 수도 있고, 신고 일어서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고, 한 걸음 걷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 남하고 부딪칠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춥다 그러더니 걸어나오다 말고 서 있더니 그냥 확 쓰러져 버렸어요.

그리고 그대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장 지금 걸어가는 이 순간에도 끝없는 은혜와 위신력이 충만된 인생이건만 반야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불행을 보는 것입니다.

고통을 보는 것입니다.

대립을 보는 것입니다.

미움을 보는 것입니다.

다행스럽다 경사스럽다보다도 불안하다, 고통스럽다, 밉다 등등 가시덤불 같은 것이 꽉 차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 생명은 죽지 않으려고, 오래 살려고 어떻게 하든지 안에서 자율적으로 무한공 덕이 조정되어 있건만 생각은 못그럽니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전에 내가 자주 병원에 신세를 져서 입원해 있을 때 일입니다.

병원에서는 많은 환자들을 보게 됩니다.

저처럼 성질을 잘못 쓰고 마음 잘못 써서 병난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술 먹고 들이받고, 주먹으로 치고, 싸우고 해서 다쳐 옵니다.

그런데 자기는 잠시 다쳤지만 그 육체적인 생명 그 자체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고치려고, 치료를 빨리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자진해서 합니다.

저도 위를 자르고 창자를 잘라내고 몸에 여러 가지 부속을 빼냈는데 빼내면서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면 안에서 자율적으로 돌아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 빤히 보여요.

창자를 두 번째 자를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잘라낸 후 내 속을 잘 관찰해 보니까 장 그것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내가 의식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해서 병이 나서 잘라내도 그 놈은 그 남은 것 가지고 살려고 노력을 하더라는 것 입니다.

원래로 우리가 그릇된 지경이 있어서 이 세상이 불행도 미움도 차 있는 것이지 내 몸 하나 병든 몸이라 하더라도 행복하고 다행스러움이 꽉 찹니다.

혹 바른 손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왼손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행복,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육백만 불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림도 없습니다.

육백만불 준다고 이것은 안 떼어 줍니다.

실로 우리들은 반야의 눈에서 내 생명 구석구석에서 이렇게 끝없는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것이 충만돼 있다는 것을 반야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의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가 있고, 아내가 있고, 또 남편이 있고, 혹은 다른 모든 주변 사람들이 있고, 친구가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경쟁에 있어서 나의 적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렇게 보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와 나는 협동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미움으로 대하고 적으로 대할 때 그는 나와 더불어 적이 되고 미움이 됩니다.

세계적으로 기상정보를 같이 교환합니다.

기상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각자 자기 나라의 기상을 관측하고 예측도 합니다.

또 병균 같은 것, 페스트 같은 무서운 전염병 같은 것, 국제적인 협약을 통해서 이것이 만연되면 인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서로 정보를 교환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국경이라고 제각기 지어놓고 따로따로 사는 것 같아도 우리 삶, 생존 자체는 따로따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만큼 그 모두가 참으로 기이한 덩어리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고 나의 국토가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형제가 그렇고 이웃이 그렇고 이 국토 이 땅 덩어리만 해도 메마른 땅, 자원이 없는 땅, 아주 가난한 땅이 아니라 사실은 무한한 공덕이 충만되어 있는 땅입니다.

나의 동포 형제들도 한없는 지혜와 덕성이 있는 동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문수 보현의 화현이며, 이 국토가 불국토를 성취할 땅입니다.

‘마하반야의 노래’는 내가 살고 있는 국토와 형제와 내 생명 하나하나가 무한의 진리덩어리 일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긍정하고 믿을 때 경사스럽다 다행스럽다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사스럽다 다행스럽다 하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찬탄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 칭찬하고, 참으로 잘 됐다, 좋다, 참 잘했다, 이러한 찬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 만큼 반야의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반야의 눈을 밝혀서 어떤 경우라도 모두가 사람이나 국토나 어디든지 꼭 진리가 충만해서 무엇이든지 꼭 되게 만듭시다.

그리고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의 말을 끊임없이 이읍시다.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리 잘못한 점이 많더라도 잘못한 것은 내 눈이 삐뚤어졌다고 생각하고 칭찬 감사하고 우러러봅시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도 모든 상황이 참으로 찬탄할 수 있는 상황이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찬탄은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집안이 밝습니다.

찬탄의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집안 이 어둡습니다.

친구들끼리도 그렇고 어떤 사람이든 그렇고 직장도 그렇습니다.

서로 칭찬하고 찬탄하고 잘한다는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집안이 잘 되는 집안이고, 잘못한다고 잔소리가 많고 따지는 것이 많고 복잡한 심판 판결이 많은 집안일수록 그 집안은 사고 가정입니다.

사고 가정이 사고를 면하려거든 끊임없이 찬탄을 발견해야 합니다.

남편이 술먹고 집에 들어오더라도 늦은데 잘 찾아 오셨다고 반갑게 맞이하고, 코가 빠졌다 오시지 않아 좋다고 하십시오.

어쨌던지 화만 내고 문도 안 열어주고 어떤 식으로든지 처벌하려고 하는 것보다 백 번 나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찬탄이 그 집에 환희의 감정을 가져옵니다.

환희의 감정을 가져오고 찬탄과 반대인 불평, 불만과 싸움, 비판 저주 증오 이것이 불행을 가져옵니다.

거기에 이유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어요.

왜 그러냐, 진리, 마하반야바라밀 이 진리, 생명 바닥에 부르고 있는 진리, 우주에, 이 국토에, 이 환경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이 진리는 찬탄밖에 다른 것이 없어요.

밝은 것 앞에 밝은 것밖에 없다는 말과 같이 찬탄해야 할 것밖에 다른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찬탄하는 것은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한 진리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를 따져서 이러니까 나쁘다고 비판하고, 증오에 찬 나쁜 말로 대립해서 따진다고 해서 내 생활환경이 좋아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따지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환경은 더욱더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분이 왔길래 그랬습니다.

그분은 결혼해서 석 달 동안 남편을 길들인다고 단단히 벼르고 잔소리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공허가 생깁니다.

빈틈이 생깁니다.

무슨 빈틈인가.

남자들은 나이가 들더라도 어린 아이처럼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은 심정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거친 환경 속에서 큰소리도 치고, 싸우기도 하고, 속으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헛위세를 부리지만 일단 집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체면 다 놓아 버리고 탁 풀어집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마음놓고 쉬며, 자신의 속을 털어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들이려고 하는 엄처시하에서는 그 빈 구멍을 무엇으로 채우느냐 그거예요.

채우기 위해서는 딴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집에 가는 것이 싫어지고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온갖 사고가 벌어져요.

우리 가정생활이나 개인관계나 직장관계나 사회나 어디나 비판하고 따져서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비판해서는 평화도, 건설도, 힘의 융합도 오지 않습니다.

분열과 투쟁밖에는 안 옵니다.

그 거친 가슴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왜 부드럽고 따뜻하고 모두와 더불어 함께 가고자 하는 그 고귀한 생명을, 그 생명을 못 키워주느냐 말이에요.

찬탄하고 칭찬하고 당신의 생명에 깊이 깃들어 있는 진리와 광명을, 부처님의 완벽한 예술품과 같은 그 완전덕상을 당신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보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내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게 그렇게 해요.

아내가 있으면 아내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칭찬하고 그렇게 따뜻한 말로 위해 주십시오.

비판, 그분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아끼기 위해서 일러주는 말들은 비판이 아닙니다.

충고도 어떤 때는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 자세가 오만하거나 참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 아무리 이로운 말이라도 듣기 싫은 것입니다.

참된 충고는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찬탄의 눈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찬탄이 무엇을 가져오느냐.

감사를 가져옵니다.

찬탄이 바로 진리의 긍정인 까닭에 내 생명과 내 환경 가운데 진리가 가득 옵니다.

올해의 기도는 반드시 찬탄이라는 토대 위에서 기도를 성취하자고 해서 올해는 찬탄의 해라 그랬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우리는 찬탄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우리 사회의 한량없는 부처님 공덕이 충만한 것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말과 뜻과 온갖 정성 기울여서 부처님과 가족과 온 이웃과 자랑스러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우리는 찬탄의 공덕으로 아름다운 소망과 빛나는 환경을 이끌어 나아갑니다.

” 여기에서 ‘자랑스러운 환경을 찬탄합니다.

‘ 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 한 마디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세상이 잘못되어서, 정치가 잘못되어서, 혹은 사회가 잘못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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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사회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엔 그것에 대한 부정이 나옵니다.

사람을 보든지 자연을 보든지 꽃을 보든지 새를 보든지 흘러가는 물을 보든지 무엇이든지 내 마음을 찬탄하는 기쁨으로 채울 때 내 공덕이 결실됩니다.

어떠한 이유든지 비판과 부정, 증오, 대립, 갈등, 환경을 자기 가슴에 품고 있을 때 불행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이 한 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망을 진리 위에서 꼭 성취시키고, 우리의 소망 한하나가 국토를 풍요롭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들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기도의 기초자세도 찬탄하고 결코 불경불만 없는 찬탄 칭찬을 제일로 삼아서 추구해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