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남스님─순간순간이 해탈임을 깨닫고 내 안의 아미타불 찾자

“순간순간이 해탈임을 깨닫고 내 안의 아미타불 찾자” 양산 통도사 전계대화상

혜남스님

〈화엄경〉의 게송 중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모든 본성이 마음으로 이뤄진지 알아라”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을 잘 쓰면 행복하게 되고 마음을 잘 못 쓰면 불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중생이 부처님과 가르침인 법, 부처님의 법을 따르며 수행하는 스님을 마음깊이 생각하며 염불한 공덕으로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은 흔히 소리를 내며 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하는 염불도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등 물리적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안과 공포 등 마음속의 심리적인 것들은 놓아버리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세속의 공부는 계속 쌓아가는 것이 미덕이고 최고이지만, 도문(道門)의 길에 접어들면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씩 버려 나가야 합니다.

계속 버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단계가 곧 도의 경지인 것입니다.

흑씨 범지가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기 위해 양손에 꽃을 들고 부처님께 올리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놓아버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흑씨 범지는 오른손에 든 꽃을 놓아버렸지만 부처님은 또 “놓아버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왼손의 꽃마저 놓아버렸지만 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흑씨 범지는 “더 이상 놓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더 놓으라고 하십니까”라고 부처님께 여쭙게 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놓으라 한 것은 꽃을 놓으라 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 6진(六塵)과 안으로 6근(六根), 중간의 6식(六識)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라 한 것이다.

놓아버릴 곳이 없으면 이 곳이 네가 생사를 면한 곳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쓸데없는 잡생각을 다 놓아버리라는 뜻입니다.

그 망심이 다한 그 자리가 곧 부처자리요, 그 시간으로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흔히 우리는 행복을 먼 곳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고귀한 서적이나 사람을 만나 이를 찾으려고도 합니다.

또한 작은 씨앗을 심어 먼 미래가 되어서야 수확할 수 있는 열매를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 이 자리가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요, 해탈의 시간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어디를 가시던지 그 순간순간이 해탈이며, 누구를 만나던지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부처요, 해탈이며 행복임을 잊지 마시고 살아가시길 당부드립니다.

성수스님─뭐가 바쁜가

뭐가 바쁜가?

-성수스님-

살 때 살 줄 알고 살아야, 갈 때 갈 줄 알고 갑니다.

오늘부터 해 지기 전에 자신이 자신을 한 번 만나보세요.

뭐가 바쁜가? 죽자 살자 일하는 것이 늙어 죽는 것밖에 하는 것이 없어요.

늙으면 간다고 하지만 갈 곳도 안 찾아 놓고 한 치 앞 갈 길도 모릅니다.

또 갈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간다고 하니 전부 남의 다리 긁고 수박 겉핥고 살아요.

오늘부터 정말 ‘내가 누구냐?’ 하고 물어보세요.

한 번 물어서 대답 안 하고 두 번 물어서 답이 없으면, 세 번 만에 죽어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 말 안 듣는 놈에게 밥주고 물주고 하겠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하나 둘 셋’ 할 때 나와서 서로 끌어안고 춤을 덩실덩실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천하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로다.

나무 아미타불! 내가 나를 한 번 만나서 끌어안고 보면 지금 부른 노래처럼 천하만물은 진리 아님이 없고 세상 만가지 일이 道 아님이 없습니다.

네 탓이니 내 탓이니 늙었다고 원망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등을 땅에 붙이지 말고 눈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등을 땅에 붙이면 뱀의 몸을 받고, 눈 붙이면 장님 연습하는 겁니다.

나는 90세가 다 되었는데도 눈이 초롱초롱합니다.

아직까지 낮에 등을 땅에 붙인 일도, 눈 붙인 일도 없어요.

눈을 붙이고 흐리멍덩하게 살면 피가 탁해집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부처님 흉내내야 됩니다.

여러분이 불교 믿는다고 할 때 믿을 ‘신(信)’자 하나라도 똑똑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절에는 뭐 하러 가느냐고 하면 안 늙어 죽는 법 배우러 간다고 해야 합니다.

‘불살생’이 파리나 모기도 죽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은 생사고뇌에 죽지 말라는 말입니다.

죽는 일하며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는 아직 47년째 병원에도 안 가고 약도 안 먹고 밥도 다섯 숟가락 밖에 안 먹어요.

절에 와서 복 지으려고 부처님께 실컷 절하고 나가다가 신에 흙이 묻었다고 남에게 욕하면 절한 복을 다 쏟아버리게 됩니다.

심보를 잘 써야 합니다.

알고 살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하루에 한 마디씩 내가 본 세상을 쓰면 좋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밝은 시간을 정말 금쪽같이 아껴야 합니다.

밝은 기운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며 여유있게 살아야 됩니다.

그러자면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루에 한 마디씩 써야 합니다.

눈도 보배고, 귀도 보배고, 코도 보배고, 입도 보배고, 손도 보배고, 발도 보배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관리 잘해서 잘 쓰면 존경받고 잘못 쓰면 자기 아들딸에게도 밟힙니다.

정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을 때, 기와집 짓고 자가용 타면서 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집주인을 만나봐야 합니다.

남의 집에서 몇십 년씩 살면서 집주인도 안 물어보고 만나볼 생각도 안 하고 전부 허탕으로 살고 있어요.

하루 한 마디씩 쓰면서 눈에게 귀에게 코에게도 물어보면 대화가 됩니다.

지안스님─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

지안스님

(조계종 고시위원장)

육조 혜능 선사가 출가 전에 가난한 나무꾼으로 살았다는 것은 선종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 저자에 팔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어느 날 나뭇짐을 지고 저자거리에 가서 팔았는데 마침 객주 집 주인이 사서 짐을 지고 따라가 짐을 내려놓고 나오게 되었다.

바로 그때 객사에 투숙해 지내던 어떤 사람이 책을 낭랑하게 읽고 있었다.

무심코 듣고 있던 육조 스님(당시 나무꾼 노씨)의 귀에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이 들려왔다.

그 순간 귀가 번쩍 뜨이면서 알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가슴 속에 와 닿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책을 읽던 사람에게 그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이건 불경 가운데 (금강경)이라는 책이요.”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나무꾼 노씨는 드디어 출가를 단행하여 황매산으로 오조 홍인 스님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은 금강경 ‘장엄정토분 제10’에 나오는 구절이다.

금강경이 중국 선종사에서 중요시 여겨진 동기는 바로 이 구절을 듣고 발심하여 출가한 육조스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수보리와 부처님이 문답형식의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체 관념적인 고집을 없애라는 것이 핵심 대의이다.

경 본문에서는 관념적 고집을 상(相)이라는 말로 표현해 놓고 있다.

이 상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넷을 들고 또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이라는 말도 나온다.

육조스님 출가동기 금강경의 핵

마음이 없으면 ‘업의 충돌’도 없어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은 일체 상(相)을 벗어난 마음을 쓰라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함이 없는 마음 무위심(無爲心)이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경우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무심하고 순수한 상태 그대로, 도와 줘도 도와준 것이 없는 마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말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이때 B라는 사람이 A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A를 도와주었다라고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자랑을 하거나 자기의 선행을 고의적으로 업적을 삼으려 하면 도와준 행위야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걸 자랑하거나 과시하려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큰 도움을 주고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선행을 끝까지 숨긴다면 이것이 도와준 사람을 더 감동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념에 붙들리지 않는 상(相)이 없는 마음이라야 무구청정(無垢淸淨)한 본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관념에도 지배되지 않아야 이것이 바로 깨달음에 일치된 마음이다.

이 마음을 내면 중생세계에 업의 충돌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불교신문 2791호/ 2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