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나라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옛날 어떤 스님이 죽기 전에 사후 발원을 하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않고 돈 없는 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다는 설화가 있다. 원생극락국(願生極樂國)이 아닌 원생무전국(願生無錢國)으로 기도를 했다는 말이다. 돈 때문에 어지간히도 고통을 당하고 속이 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돈 때문에 일어나는 사바세계의 죄악을 보다 못해 정토발원이 무전국발원으로 말이 바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이야기이다.

아직까지 언론에 뉴스거리로 계속 보도되고 있는 금융 비리사건을 비롯해 부정부패에 얽힌 사건들은 모두 돈 때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몇 사람이 구속됐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부패의 온상에 서식하던 독초가 몇 개 뽑힌 것일 뿐 숨어 있는 독초들이 많을 것이라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소위 먹고 살만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돈해 약해 망신을 당하고 국민들을 실망케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돈 몇 푼에 인격을 팔아버린 탓인가? 배금주의 실상이 반사회적 부패의 모습으로 나타난 근래의 나라사정은 온통 돈 때문에 망하는 꼴인 것 같다. 오래 전에 터진 비자금사건을 비롯하여 증권파문 등 장기간을 계속에 부패연류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부패지수가 꽤 높은 나라인 것 같다. 개혁을 주도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 부패의 지수가 높아 잘 실행되지 않는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생존경쟁이라는 말을 자주 써 오면서 돈을 벌어야 산다고 생각하고 돈에 대한 절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돈을 버는 것이 생활의 의무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공공의 윤리인 도덕적 규범에 따라 페어플레이를 해서 개인의 이익이 도모되어야 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스포츠경기에 있어서 룰을 지키고 경기를 해야 하듯이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데도 사회도덕을 지켜야 하고 국법을 지켜야 함에도 순간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를 외면하다 보면 자연히 양심마비증세가 오게 되는 것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듯이 인간은 곧잘 이利 끝에 유혹당하여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의 각종 비리가 생계에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제법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이 자행한다는 점이다. 배가 고파 빵을 훔쳐 먹는 ‘장발장’식 범죄가 아닌 호화와 사치를 극도로 누리고 싶어 하는 백만장자를 꿈꾸는 자들의 소행이 부패를 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사회에 부(富)의 윤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부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공익을 위하여 보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정신을 가져 부의 혜택이 이웃에게도 전해지게 하는 것이 부의 윤리이다. 나만 잘 살기 위하여 부를 소유하겠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살겠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1개 가진 사람을 보고 당신의 1개는 있으나마나한 것이니 100개를 채우게 나 달라 하는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승만경]에 보면 부처님이 승만부인에게 중생을 위해 널리 쓸 수 있도록 재물을 많이 모으라고 한 말씀이 나온다.

어떤 부자가 남에게 인심을 잃고 원성을 사면서 부자가 되었다. 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부를 누리고 향락을 즐기며 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이상한 전신이 왔다. 조의를 표하는 조문이 아닌 ‘축사망’이라는 축전이 온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경제성장과 함께 부의 윤리도 바로 세워져야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7월 140호

다음 생의 후회

사람이 자기 일생을 후회 없이 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일이 뒤늦게 발견되는 수가 있고 옳다고 어떤 신념을 가지고 한 일도 나중에 가서 보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했다고 때늦은 후회가 일어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후회는 언제해도 늦은 것이란 말이 있지만 오랜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고 때로는 어제의 일을 후회하거나 조금 전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 생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후회 없이 산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긴 하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인생의 파노라마를 엮다 보면 후회할 일이 누구에게나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후회란 자신의 과거 행위에 대한 뉘우침이므로 반성을 하고 스스로에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착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심리전환이라 볼 수 있고 사리에 대해 올바로 알아차리는 지혜의 트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후회하도록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탕달이 한 말로 그는 “좋은 교육이란 후회를 가르치는 것이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이 후회하는 마음을 참회라는 말로써 설명하면서 개인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중요한 수행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참회사상이 보살도 실천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후회나 참회는 주로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 행동 속에 미처 깨닫지 못하는 후회할 일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상에는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보다도 오히려 지금 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후회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끝 날에 가서 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야 말로 우리를 비탄과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로버트 브라우닝이다. 이 말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미래의 후회할 일이라고 미리 알자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 이것은 자칫 개인의 공리적인 문제를 두고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후회는 공리적인 업적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불교의 참회정신에서는 참회의 참 뜻은 선을 행할 수 있었는데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참회이다. 다시 말해 그릇된 악업을 지은 데 대한 참회란 말이다.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어지는 삼세의 인연은 두 겹의 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 곧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가 되며, 현재의 결과가 동시에 미래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일세(一世), 곧 한 텐스는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도 인과 동시의 상황으로 존재한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다음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이이라는 것, 이 인과의 원리가 바로 세상일의 이치다.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하여 심지(心地)라 하고 이 마음 땅에는 업의 종자가 심어진다고 한다. 행위의 하나하나가 종자로써 업감(業感)을 띄고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과보(果報)를 가지고 온다. 그리하여 전생에 잘못한 일을 다음 생에 가서 후회하는 일마저 생긴다고 한다.

옛날 금강산 돈도암이라는 암자에 홍도 스님이 살았다. 이 스님이 수행을 잘하여 도를 이룰 때가 되었을 즈음 몸에 병이 생겨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은 소나무 밑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바람에 솔방울이 떨어져 얼굴을 때렸다. 홍도 스님이 아픈 통증을 느끼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신경이 예민해진 과민반응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스님이 죽었다. 암자 밑에 큰절이 있어 대중이 많이 살았다. 밥을 짓는 공양주가 어느 날 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부엌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구렁이가 개수통에 꼬리를 넣어 물을 묻혀 아궁이에서 끌어내 모아둔 재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다행히 불법을 만나고 사람 몸을 받아서 많은 겁을 수행해 성불에 가까웠는데 솔바람에 떨어지는 솔방울을 병석에서 맞고 한 번 성을 내어 뱀의 몸을 받았다오. 차라리 내 몸을 부수어 먼지를 만들지언정 맹세코 평생 동안 성내는 일 없게 하소. 내 옛적에 비구가 되어 이 암자에 살았는데 이 제 이 꼴이 되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소. 아무리 단정하고 엄숙한 사람 모양 갖추어도 성내는 마음 끊지 못하면 이런 몸 받소. 바라건대 스님들이 발을 돌려 세상에 가거든 내 꼴을 말하여 뒷사람들을 경책하시오. 천당이나 극락 그리고 지옥이 사람 마음에 만드는 원인이 있으니 한 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다시 얻기 어렵고 성내는 마음 끊지 못하면 도를 얻기 어려우니, 이 뜻을 알리고자 하나 말을 하지 못해 꼬리로 글을 써서 간곡히 전하노니 이 글을 베께껴써서 벽에 붙여 두고서 성이 나려 하거든 얼굴을 들어 이 글을 보시오.”

홍도비구 경책시로 알려진 글이다. 금생의 잘못이 내생의 억울함을 가져 온다는 내용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2월 제87호

눈병 난 사람에겐 허공 꽃이 보인다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신체의 기능이 있다. 키에 따라 몸무게의 표준이 있는 것처럼 신체적 활동량에도 일정한 활동지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수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감소되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물리적 현상에서 이러한 결과가 뚜렷하게 나타나듯이 정신적 작용에서도 이 현상은 뚜렷하다고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sound body sound mind)이 인생 최고의 재산이지만 이 최고의 재산을 누리고 살기가 힘든 것이 중생이다.

불교의 경전에서는 중생의 번뇌와 망상을 마음의 병으로 취급한다. 어리석은 미혹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야기되는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과거 숙생으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의 좋지 못한 잔재가 남아 있는 업병(業病)이라고 한다. 그릇된 행위가 반복되어 나쁜 습관이 만들어진 것과 같이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업의 기운이 형성되어 이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는 허공 꽃(空華)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허공 꽃이란 눈병난 사람이 허공을 바라볼 적에 아물아물하는 헛것이 보이는 것을 말한다. 건강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병든 눈에는 이것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무명의 정체라고 경에서는 밝히고 있다.

“어떤 것이 무명인가 하면 선남자여, 일체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갖가지로 뒤바꿔져 있는 것이 마치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동‧서‧남‧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만 생각하고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이 상대하는 경계인 색깔‧소리‧냄새‧맛‧촉감‧기억되어지는 생각의 그림자를 마음이라 하느니라.

비유하면 병이 난 눈에 허공 꽃이나 또 하나의 달이 생겨 달이 두 개로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거늘 눈병 난 이가 허망하게 꽃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 허망한 생각 때문에 허공의 본성을 잘못 알뿐만 아니라 실제의 꽃이 나오는 자리까지도 모르게 되니 이런 까닭에 생사에 헤매게 되니 이래서 무명이라 하느니라.”

<문수장>에 나오는 무명의 정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경에서는 이 무명을 끊으면 부처가 된다 하였다. 이 경전의 이야기는 불교의 본령에 대한 이치를 밝힌 말이지만 현대인들을 경책하고 시사(示唆)해 주는 바가 큰, 의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을 일생 내내 허깨비놀음으로만 살아 갈 수 없는 절박한 자기 문제의 자각의식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사실 일상의 사소한 생활경계에서도 얼마나 엉뚱한 착각으로 허공 꽃을 보는 것처럼 어이없는 생각에 스스로 빠지는 수가 많은가? 몸과 마음이 정상적 지수를 유지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비정상 행동이 일어나고 정신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담고 사는 수도 허다하다.

허황한 망상으로 부질없는 집착을 가지고 엉뚱한 추구를 하다 스스로 괴로워지면서 남을 괴롭히기도 한다. 잘못된 인생관에 의해 물속에 있는 달은 건지려고 강물에 뛰어드는 것과 진배가 없는 행동을 예사로 자행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소박하지 않은 허영으로 제 자신을 치장하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두 눈병 난 눈에 허공 꽃을 보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당나라 때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선사가 황제 헌종을 만난 적이 있었다. 황제가 선사에게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고압적으로 말을 걸면서 질문을 하였다. 이 때 선사가 한눈을 팔면서 왕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왕이 불쾌해 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제거늘 감히 나를 무시하는가?”

이때 혜충이 이렇게 되물었다. “황제께서는 허공이 보십니까?” 황제가 본다고 하자 다시 “허공이 황제에게 고개를 돌립니까?”하고 묻는다. 황제의 권위를 너무 내세우는 임금에게 허공처럼 텅 비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이야기이다.

사람은 때로 비워진 마음으로 돌아가 있어야 한다. 비워진 마음에는 허공 꽃이 보이지 않는다. 허욕과 과대망상이 일어날 수 가 없는 것이다.

[화엄경]에도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부처님 세계를 알려고 하거든 마음을 비워 허공처럼 되어라. 허망한 생각과 존재의 자취마저 없어지면 마음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리라.”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5월 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