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기 일생을 후회 없이 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일이 뒤늦게 발견되는 수가 있고 옳다고 어떤 신념을 가지고 한 일도 나중에 가서 보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했다고 때늦은 후회가 일어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후회는 언제해도 늦은 것이란 말이 있지만 오랜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고 때로는 어제의 일을 후회하거나 조금 전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 생의 일을 후회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후회 없이 산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긴 하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인생의 파노라마를 엮다 보면 후회할 일이 누구에게나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후회란 자신의 과거 행위에 대한 뉘우침이므로 반성을 하고 스스로에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착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심리전환이라 볼 수 있고 사리에 대해 올바로 알아차리는 지혜의 트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후회하도록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탕달이 한 말로 그는 “좋은 교육이란 후회를 가르치는 것이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이 후회하는 마음을 참회라는 말로써 설명하면서 개인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중요한 수행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참회사상이 보살도 실천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후회나 참회는 주로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 행동 속에 미처 깨닫지 못하는 후회할 일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상에는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보다도 오히려 지금 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후회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끝 날에 가서 하여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야 말로 우리를 비탄과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로버트 브라우닝이다. 이 말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미래의 후회할 일이라고 미리 알자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 이것은 자칫 개인의 공리적인 문제를 두고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후회는 공리적인 업적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불교의 참회정신에서는 참회의 참 뜻은 선을 행할 수 있었는데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참회이다. 다시 말해 그릇된 악업을 지은 데 대한 참회란 말이다.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어지는 삼세의 인연은 두 겹의 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 곧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가 되며, 현재의 결과가 동시에 미래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일세(一世), 곧 한 텐스는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도 인과 동시의 상황으로 존재한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다음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이이라는 것, 이 인과의 원리가 바로 세상일의 이치다.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하여 심지(心地)라 하고 이 마음 땅에는 업의 종자가 심어진다고 한다. 행위의 하나하나가 종자로써 업감(業感)을 띄고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과보(果報)를 가지고 온다. 그리하여 전생에 잘못한 일을 다음 생에 가서 후회하는 일마저 생긴다고 한다.
옛날 금강산 돈도암이라는 암자에 홍도 스님이 살았다. 이 스님이 수행을 잘하여 도를 이룰 때가 되었을 즈음 몸에 병이 생겨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은 소나무 밑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바람에 솔방울이 떨어져 얼굴을 때렸다. 홍도 스님이 아픈 통증을 느끼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신경이 예민해진 과민반응으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스님이 죽었다. 암자 밑에 큰절이 있어 대중이 많이 살았다. 밥을 짓는 공양주가 어느 날 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부엌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구렁이가 개수통에 꼬리를 넣어 물을 묻혀 아궁이에서 끌어내 모아둔 재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다행히 불법을 만나고 사람 몸을 받아서 많은 겁을 수행해 성불에 가까웠는데 솔바람에 떨어지는 솔방울을 병석에서 맞고 한 번 성을 내어 뱀의 몸을 받았다오. 차라리 내 몸을 부수어 먼지를 만들지언정 맹세코 평생 동안 성내는 일 없게 하소. 내 옛적에 비구가 되어 이 암자에 살았는데 이 제 이 꼴이 되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소. 아무리 단정하고 엄숙한 사람 모양 갖추어도 성내는 마음 끊지 못하면 이런 몸 받소. 바라건대 스님들이 발을 돌려 세상에 가거든 내 꼴을 말하여 뒷사람들을 경책하시오. 천당이나 극락 그리고 지옥이 사람 마음에 만드는 원인이 있으니 한 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다시 얻기 어렵고 성내는 마음 끊지 못하면 도를 얻기 어려우니, 이 뜻을 알리고자 하나 말을 하지 못해 꼬리로 글을 써서 간곡히 전하노니 이 글을 베께껴써서 벽에 붙여 두고서 성이 나려 하거든 얼굴을 들어 이 글을 보시오.”
홍도비구 경책시로 알려진 글이다. 금생의 잘못이 내생의 억울함을 가져 온다는 내용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2월 제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