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讀書之節(비독서지절)

추석을 지나면서 요즘의 날씨는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전형적인 가을이다. 이토록 맑고 쾌적한 하늘 아래서 사람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무 아래서 그저 서성거리기만 해도, 누렇게 익어 가는 들녘만 내다보아도 내 핏줄에는 맑디맑은 수액(樹液)이 도는 것을.

장미 가시에 손등을 찔려 꼬박 한 달을 고생했다. 내 뜻대로 움직여 주던 손에 탈이 나니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그 릴케를 생각하고 때로는 겁도 났었지만, 모든 병이 그러듯이 때가 되면 낫는다. 밀린 옷가지를 이제는 내 손으로 뺄 수 있게 됐으니 무엇보다 홀가분하다. 오늘처럼 갠 날은 우물가에 가서 빨래라도 할 일이다. 우리처럼 간단명료하게 사는 단수(單數)에게는 이런 일은 일거양득이 된다.

이 쾌청의 날씨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벽을 바라보고 좌선(坐禪)을 할 것인가, 먼지 묻어 퀴퀴한 경전을 펼칠 것인가, 그런 짓은 아무래도 궁상스럽다. 그리고 그것은 이토록 맑고 푸르른 가을 날씨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다. 그저 서성거리기만 하여도 내 안에서 살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밖에 무엇을 더 받아들인단 말인가.

가을 하면 독서의 계절을 연상한다는 친구를 만나 어제는 즐겁게 입씨름을 했다. 내 반론인즉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비독서지절(非讀書之節)이라는 것. 물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추야장(秋夜長)에 책장을 넘기는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디 그 길이 종이와 활자로 된 책에만 있을 것인가.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얼마나 책하고 인연이 멀면 강조 주간 같은 것을 따로 설정해야 한단 말인가.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기야 단행본을 내 봐도 기껏해야 1, 2천 부 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느 외국 백과사전은 3만 부도 넘게 팔렸다는 게 우리네 독서풍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씌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 있다.

법정, [무소유].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

情 이란

정이란

아지랑이 처럼

엷게 피어오르는 초조의 주머니이다

밀물이 밀리듯이 서서히 오며

태양처럼 불타오른다

멀리 있을때 더 애절하고

떨어져 있을때 더 절실하고

보고픈 원이 되어 맴돈다.

정은 말이 필요 없다

마음과 맘이 통하고

차갑지 않은 온유함이 흐른다.

인담월 김숙현 (반야암경전교실) 글. 월간반야 2008년 10월 제95호

[성지에서 쓴 편지]를 읽고

김미숙 선생님,

보내 주신 책《성지에서 쓴 편지》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불교의 시작(근본)으로 되돌아가 불교를 진지하게 바라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들의 훌륭한 관점과 글 덕분에 ‘신’이 아닌 ‘인간’ 붓다의 모습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온갖 불필요한 수사(修辭)에서 벗어나자 붓다의 깨달음이 더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시작으로 되돌아가 ‘본질’만 바라보니, 근본주의와 같은 폐해는 봄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군요.

선생님,

호진 스님의 순례는 경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부처를 느껴 보려는 노력 아니겠습니까? 호진 스님의 고행에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우리가 그를 통해 신이 아닌 인간 붓다를 만났기 때문 아닐까요? 호진 스님은 우리에게 인간 붓다를 보여 주고 싶어 그토록 험난한 순례길에 오른 것 아닐까요?

이제 편집자의 관점에서 이 책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출가 이전의 이야기를 생략한 것이나, 구체적 수행 방법, 대승불교의 세세한 이론 등을 최소화한 것이 저에게는 매우 훌륭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디테일은 약해지겠지만, 하나의 주제에 보다 집중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제 경우에는 이런 생략된 행간으로 인해 불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두 스님의 글쓰기는 가히 ‘정중동(靜中動)’의 경지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신은 구름 위에 앉아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비관주의적 무신론으로 흐르지는 않게 해 주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강요하는 ‘신’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인간의 물성을 극복한 위대한 ‘인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에게 감탄만 하고 있지 마라. 깨달음 그 자체는 이해의 영역일 뿐이다. 절망이 존재의 끝은 아니듯, 깨달음 또한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늘 건강하십시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김용훈. 경북대학교 출판부, 월간 반야 2011년 10월 1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