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주년의 기대

을유년 새해가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밝았다. 올해가 2005년이니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해가 되었다. 해방동이가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여느 해와는 달리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가져 보고 싶다.

60년 전의 어려운 상황이야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분단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을 겪었고 급기야 6.25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나고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전쟁의 상처 위에 다시 일어선 나라가 순탄한 역사를 만드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비극의 소용돌이는 20세기 말까지 이어졌고 민주적 절차에 의한 민간 정부가 들어선지도 1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정치적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해 말 ‘교수 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에서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뽑혔다고 한다. 최근 몇년동안에 선정된 어휘를 보면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등이었는데, 이어서 ’당동벌이’가 뽑힌 것을 보면 최근의 우리 사회 현실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동벌이(黨同伐異)’란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열전(黨錮列傳)’의 서문에 나오는 글귀인데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깨끗하고 정당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부도덕하고 부정하다는 태도를 지닌 대표적 고사이다.

한나라가 쇠퇴할 무렵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는 붕당을 만들어 단합하고,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공격하고 배척하여 당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풍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사회가 통합하지 못하고 분파가 성행하더니 결국 한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후한서’에는 이러한 뜻이 다시 ‘후한’ 시대에도 등장해 후한의 멸망을 촉진시켰다고 보았다.

지난해 한국은 누가 보아도 정치집단이 ‘당동벌이’의 추악한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사회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되고 분파 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결국 이러한 태도를 끝까지 버리지 못한 집단 모두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실의 정당성, 합리성과는 상관없이 국가와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국가의 발전을 퇴행적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이러한 고사성어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리라. 비단 이런 현상은 정치권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일상화 된 풍경이었다. 인터넷 게시판 등의 댓글에 보면 언제나 ‘네편’ 아니면’내편’으로 갈리기 마련이었다.

올해는 어떨까. 제발 정치권의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 또 이와 유사한 사자성어가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따금씩 오르내리는 ‘사자성어’ 중에 이런 말들은 어떨까. ‘포동존이(抱同存異)’ – ‘같은 뜻을 지닌 이를 포용하되, 다른 뜻을 지닌 이도 인정하여 준다. 또는 ‘해원상생(解寃相生)’ – ‘원한을 풀고, 서로 더불어 산다’는 어떨까.

새봄과 함께 이 땅에도 희망과 상생의 기운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형춘 香巖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

고관대작들의 퇴임

일전에 지인들이 몇이 모여 담소하는 자리가 있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생뚱맞게 ‘지금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자리를 같이한 너댓 명의 입에서는 얼마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차라리 총리의 이름을 모르는 게 낫다는 쪽으로 화제는 돌아갔다. 선진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제나라의 국가원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데 하면서 정치 문외한들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라도 없겠지만 총리나 장관의 이름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여론이었다. 총리나 장관이 하도 자주 바뀌니 기억할 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기의 일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게 지금의 정치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참 꼴볼견인 일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다. 같은 정권 하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머물렀던 정권의 핵심부를 향해 다양한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초심을 버렸다느니, 정책에 잘못이 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 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어쩌면 의리도 체면도 양식도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감히 민족의 고전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공직자들의 영원한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의 마지막 장인 ‘제12장 해관육조(解官六條)’를 다시 펼쳐 보았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기 위해서다. ‘벼슬이란 반드시 체임(遞任; 벼슬이 바뀜)되는 것이다. 체임되어도 놀라지 않으며, 벼슬을 잃고도 못내 아쉬워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할 것이다(官必有遞 遞而不驚 失而不戀 民斯敬之矣)’라고 하였다. 자리가 바뀌어 좋은 보직(어떤 게 진짜 좋은 자리인지 모르지만)을 받거나 한직을 받았다고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설령 벼슬에서 물러난다고 하여도 아쉬워 말고 최후의 순간을 더욱 깨끗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을 종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벼슬을 버리기를 헌 신을 버리는 것처럼 하는 것이 예전의 도리였다. 해임되어서 슬퍼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평소부터 문서를 정리하였다가 해임 발령이 있으면 그 이튿날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다면 맑은 선비의 태도인 것이며, 장부를 청렴하고 명백하게 마감하여 뒷걱정이 없게 한다면 지혜 있는 선비의 행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선 임명직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보다 나은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할 일이며, 선출직은 업무는 뒷전이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단 몇 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쫓아다니는 게 일인 것 같다.

어떤 조직과 사회, 승속을 막론하고 사심 없이 맡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정경 또한 목민심서의 이 구절 같았으면 좋겠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교외까지 전송을 나와 술을 권하고 보내기를 어린애가 어머니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 말에 드러난다면 수령된 자 또한 인간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일 것이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사회와 인심이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의 처신은 예와 지금이 다를 바 아닐 것인데 작금의 현실은 물러난 뒤를 걱정하고 연연해하는 것 같아 딱해 보인다. 그간에 얽히고 설킨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든지 아니면 차라리 가만히 두면 오히려 나을텐데 자꾸만 업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글쎄 중생인 나의 삶도 업을 짓고 있는 건지 업장을 조금이라도 소멸시키며 살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겉보기에 현혹되지 말자

지난 겨울은 추위도 심했지만 눈 또한 무던히도 왔다. 해방후의 그 어려웠던 시기에도 우리는 겨울날씨가 추우면 추운대로 이듬해엔 병충해가 적어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했고, 눈이 많이 오면 오는 대로 보리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희망적인 예언을 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이즈음은 기상예보를 잘못한 기상청을 원망하고, 재해 대책이 허술했다고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를 탓하면서 스스로의 잘못이나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야 5년 전쯤의 예상으로는 21세기에 접어드는 현 시점에서는 국민소득이 2만불 시대가 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1만불에서도 뒷걸음질을 한참 했으니 그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무엇하나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것이 없으니 사람들마다 독이 오르고 신경만 머리끝까지 발달한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나고 판을 치는 것들은 온통 현란한 겉보기 문화들이라고나 할까. 현실에서 사이버 세계로의 변화,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 군상,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스컴에 의해 좌우되는 인심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들이다. 특히 이즈음의 매스컴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아찔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짜릿함이 없이는 시청자를 사로잡지 못한다. 너무 빨리 돌아서 어지럽고, 다양함이 극치를 이루어 핵심이 없다. 지나치게 개성이 강조되어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없다. 거기에다 이념적인 것까지 곁들여서 더욱 어지럽다. 시선이 한참 머물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렵고 발이 어디에 닫는지 의심스럽다.

비평가들의 말대로라면 정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경제도 비전이 없이 발등의 불끄기에 급급하며, 사회도 안정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제각기 자기집단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문화도 국적과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는 세계화의 미명아래 방황하고 있으며, 교육은 더욱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의 정신이 탁류속에 떠내려가서 실종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대책과 방법은 언제나 하나 뿐이었다. 기본에 충실하고 본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겉으로 드러난 문화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시류에 지나치게 민감해서도 안된다. 좀더 깊이 생각하자. 인간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명상과 사색에 관심을 갖자. 그리하여 보다 중요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자비의 문제를 고민하자.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3월 (제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