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가장 뒤떨어져서야

요즈음은 아침에 일어나서 조간신문과 TV 뉴스 보기가 두렵다.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이 터지는지. 정보통신의 발달로 지구촌 구석구석의 소식까지 다 들어오니 그럴 법도 하지만 아무튼 하루의 시작이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온통 싸움과 파괴와 재난의 연속이다. 그 이면에는 국가간, 민족간, 지역간, 집단간의 경쟁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혼탁한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짐승들처럼 이전투구와 가면무도회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면 낙원이 있다고 이 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우리사회의 정치나 경제에 대한 불신과 멍든 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근래 한 일간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사회에서 가장 기초가 부실한 분야가 교육과 정치라는 응답이 나왔다고 한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통함과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당장이라도 교단을 떠나고 싶고, 가까운 지인을 보기가 민망할 따름이다. 사실 우리 교육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걸 모른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이 지경까지 온 줄은 몰랐다.

입시열풍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학원화되어 가고, 대학입시제도는 중등교육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비정상적인 중등교육은 초등교육까지 망치고 있다. 급기야는 통상적인 공교육이 마비되어 가고 사교육이 판을 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정권만 바뀌면 아니 장관만 바뀌어도 새로운 교육정책이 쏟아져 나온다.

최근 한국개발 연구원(KDI)의 보고서는 참담한 우리교육의 현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과외 금지는 바로 과외비의 증가로, 대학입시 본고사 제도의 폐지는 입시제도의 혼란으로, 고등학교 보충수업 폐지는 과외의 조장과 사설 학원의 활성화로, 교원 정년 단축은 교사 부족으로 학급당 인원의 증가 등 교육파행으로, 내신 성적제도의 확대 시행은 고교성적 부풀리기로, 대입 수능시험의 난이도 하향 조정은 학력저하와 대입제도의 혼란가중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자들의 의식의 근저에는 교육을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 논리로 풀어 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지만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빈약한 우리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려면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밖에는 대안이 없다고 하면서도 정작 교육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놀이개감으로 전락한 기분이다.

뭐니뭐니해도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는 풀어야 한다. 중앙정부가 대입제도를 꼭 쥐고 있는 한 입시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KDI가 제시한대로 ‘자율과 경쟁’ 논리를 도입해야 한다.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을 끝내고 나면 고등학교와 대학은 자율적 교육과 경쟁을 해야 한다. 현재의 제도로는 하향평준화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과감한 교육투자를 해야 한다. 우수한 교사의 확보, 학급당 인구를 선진국 수준으로 줄여야만 교육다운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리고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긷든 교육목표를 재정립해야 한다.

의무교육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바탕을 만들어 주고,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한 다양한 전문인력을 길러야 한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6월 (제7호)

교육에 대한 관심

우리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은 ‘금수강산(錦繡江山)’도 ‘삼천리 화려강산(華麗江山)’도 아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비옥하고 넓은 평야도 아니고, 경제성이 높은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된 땅도 아니다. 일본인들은 일찍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적당한 구실을 찾다가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 사이에 놓여 양쪽 강국의 눈치를 보면서 가늘고 길게 역사를 유지해 오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사대(事大)를 하고, 안으로는 당파성(黨派性)을 갖게 되었으니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과 합병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참으로 궤변 중의 궤변이다. 사실 우리의 여건은 이처럼 좋은 조건은 아니다. 철저하게 착취당하고 빈손으로 맞은 해방 앞에는 이념의 갈등과 외세의 놀음에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을 겪고도 우리는 이처럼 일어섰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을까. 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이점 나는 주저 않고 ‘이 땅의 어버이들의 교육열’이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어려워도, 집안이 어려워 끼니를 걸러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어버이들의 갸륵한 정신이 이 땅밖에 또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렇게 공부시켜 놓은 인재들이 근대화의 역군이 되었고, 온 세계시장을 누비며 우리 물건을 팔았고, 유학이나 이민을 가서 세계 도처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는가 하면, 수 차례의 정치적ㆍ경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주역이 되지 않았던가. 때로는 그 열의가 지나쳐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순기능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본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교육열은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닌 것 같다. 근세 한국의 실학(實學)과 경학(經學)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40세 때부터 무려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5백 여권의 방대한 실학관계 저작과, 2백 여권의 경학관계 연구서를 비롯하여 시문집 등을 남겼는데, 수시로 두 아들 학연(學淵), 학유(學游)에게 편지를 써서 수신(修身), 제가(齊家), 학문(學問) 등을 지도하고 때로는 꾸짖고 독려하곤 하였다.

유배지에서 그 자신의 생활도 힘들었을 텐데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쓰면서 두고온 가족걱정은 물론 두 아들에게 읽을 책의 선정, 책의 편찬 방법, 시 짓는 법, 효도하는 법, 남을 도우는 태도, 과수 재배법, 진실에 관한 것 등을 일일이 가르치고 과제를 주어 확인하기까지 하였으니 다산의 교육열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비록 아비가 죄인이 되어 유배된 폐족이라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이나 문장가는 될 수 있다며 두 아들을 다그치고 직접 유배지로 불러내려 가르치기도 하였으니 초연하게 처세하면서도 아들 교육에는 대단한 집념을 보였던 것 같다.

이즈음 교육 일선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녀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관심, 즉 교육열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자녀에 대한 이해, 교육에 대한 이해, 미래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부모의 교육열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겨울에 얼어붙은 보리밭을 밟아주는 농부의 심경을 아는가. 얼어서 서릿발이 솟아 보리의 뿌리가 떠 있는 것을 밟아서 제대로 자라게 해주기 위함이다. 너무 힘주어 밟으면 보리가 상처를 입고, 너무 약하게 밟으면 그대로 뿌리가 들떠서 보리가 말라죽게 된다. 너무 세게 밟아도 너무 여리게 밟아도 안 된다. 농부가 보리를 밟는 심경으로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4월 (제17호)

교양의 변화

세월이 가고 사회가 바뀌면 교양도 바뀌는가. 요즈음 대학에서 교양과정을 운영하는 담당자나 교양과목을 강의하는 교수들은 고민이 많다. 대학에서 언어나 역사, 철학, 윤리 등의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 학과가 폐과되거나 유사학과와 통폐합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진지는 이미 십년이 지났다. 이에 뒤질세라 교양과정의 개설 강좌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의 교양은 국어, 영어, 윤리, 역사 등의 딱딱한 고전적인 강좌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것도 꼭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들이었는데, 이제는 성, 건강, 스포츠, 리더십, 재테크 등이 인기 교양과목 대열에 들어 있다. 구체적인 강좌명을 보면, ‘대중문화와 패션, CEO강좌, 사교무용, 교양골프, 영화의 이해, 풍수지리, 교양 레크레이션, 대인관계와 심리, 비즈니스매너 및 에티켓, 사진촬영과 감상, 식생활과 건강, 생활경제, 포도주 개론, 성의 과학, 현대사회와 스포츠’ 등 참으로 이색적인 이름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강좌들이 교양으로 개설되고 인기를 얻는 것은 비교적 쉽고 흥미를 끌 수 있으며, 실용적이라는 점이다. 학교에서도 어떤 과목이 인기가 있는지는 수강인원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강좌들이 인기가 있어 수강생이 몰리고 있는 반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나 창의적이고 통합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양강좌들은 찬밥 신세다. 고전 읽기, 영미문화의 이해, 과학기술과 사회윤리, 지성과 윤리, 문화와 사회, 중국사회와 문화, 사회과학으로의 초대, 대학영어 등은 거의 폐강되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진정 인간사회에서 세월이 가고 사회가 바뀌면 삶에 필요한 교양도 바뀌어 지는가. 누가 뭐래도 삶에 임하는 인간의 본질적 태도는 바뀔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양은 지극히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그러면서도 시류에 이끌린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교양교육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대학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영역별 필수 이수학점을 정해놓기도 하지만 같은 영역 안에서는 좀 더 쉽고 실용적이고 흥미위주의 강의를 듣는 경향은 어쩔 수 없다.

교양은 현실생활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효율적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실리관념을 떠나지 않고서는 교양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고전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과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지성과 윤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좋은 학점을 받고, 취업준비에 직접적 실리적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교양은 문화를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추구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사회전체가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정신적 가치를 돌보지 않고 다만 물질적 이익만을 위하여 급급한 상황이 되면 교양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합리보다는 관습과 선례에 의하여 처리하려 하고, 이상보다는 편의주의적 임기응변에 의하여 처세하려 하고,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보다는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이득을 취하려는, 어쩌면 ‘필리스티니즘(Philistinism : 속물주의)’으로 흘러갈까 두렵다는 것이다.

실리관념이나 쉽고 흥미 위주의 교양은 인간성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발달을 저해하기 마련이다. 전체를 개관할 수 있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하여 편협되지 않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교양이 필요하고, 이 교양의 바탕 위에 전문적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실적인 실리와 효율과 원론적인 본질이 조화를 이루어야 인류의 역사는 멋지게 미래로 비상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몸이 사바세계에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인 바른 인간됨의 바탕 즉 교양을 갖춘 연후에 바르고 깊고 오묘한 정법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김형춘 (반야거시회회장/창원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11월 제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