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산이라고 하는 금강산 관광길이 뱃길로 열리더니 이제는 육로로 버스를 타고도 가게 되었다. 확실한 일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곧 기차와 승용차로도 금강산 탐승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간절히 가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기회가 주어져서 2박3일간의 금강산 육로관광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금강산에 관한 글도 읽었고, 사진첩도 보았고, TV등에 비친 금강산의 경관을 보고 읽었기에 특별한 기대를 갖고 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에서 “금강산은 보고 느끼거나 할 것이 아니요. 결코 형언하거나 본 떠 낼 수 없는 것이며 금강산 구경은 눈으로 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할 것이다”란 글귀를 명심하고 떠났다.
금강산의 이름도 불교의 ‘금강(金剛)’에서 온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13세기까지는 주로 ‘풍악(楓岳)’과 ‘개골(皆骨)’로 불리던 것이, 14세기에 들어서 ‘풍악’과 ‘금강’으로 같이 불리어졌고, 15세기 이후로는 ‘금강’으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의 이름이 다섯인데, ‘금강, 개골, 열반(涅槃), 풍악, 지달’이라 했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개골, 풍악, 열반, 지달, 금강, 중향성(衆香城)’의 여섯으로 했다. 이중에 금강, 지달, 중향성은 불교적인 이름이었다. 금강과 지달은 화엄경에서, 중향성은 반야경에서 유래했으며, 풍악과 개골은 그 산세의 특징을 살린 것이리라. ’봉래(蓬萊)‘는 도교에서 연유한 것으로 봉래 양사언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15세기 유가(儒家)에서는 금강이란 불교적 색채에 거부감을 표하여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짙으므로 봉래라 하며, 가을에는 일만이천 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기에 풍악이라 하며, 겨울이면 나뭇잎이 다 지고 바위만이 앙상한 뼈처럼 남는다고 해서 개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문제는 현대아산과 북측과의 합의로 일단은 금강산을 관광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우나 개운치 않은 뒷맛은 어쩔 수 없었다. 현재의 금강산 관광은 코스별로 보면 첫째는 온정각 휴게소 주변의 문화회관에서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교예관람과 온천욕, 둘째로 구룡연과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 코스, 셋째는 만물상 코스로 망양대와 천선대에 오르는 것, 넷째는 삼일포와 해금강 코스로 제한되어있다. 육당이 금강산을 예찬하면서 쓴 금강예찬에는 총 71개의 작은 제목을 붙여 내․외금강을 모두 기행 하면서 기록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 볼 수 있는 곳은 그 중 13개에 불과 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아쉬웠던 점은 우리가 다니는 길은 모두가 철조망으로 통제되어 있고, 너비 1~2m의 산길도 그 밖을 벗어 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군데군데 서 있는 무표정한 감시원들, 특별한 명소에만 있는 북측 안내원들보다는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제각(題刻)’으로 눈치껏 감상하고 이해해야 했다.
육당의 표현대로 그 기묘함, 웅장함, 밝고 화려함, 그윽함, 현묘함, 원만함, 빼어남, 소리, 색채, 정신, 기운 등 이 밖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체의 미적 요소, 미적 조건, 미적 요구를 모조리 제출해도 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경치는 사진이나 TV화면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충분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만 마음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더 많았다.
예전에 다녀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북측사람들이나, 중국동포 등 그 쪽의 인심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했다. 그리고 구룡폭포 가는 길목에 옛 신계사(神溪寺) 터를 지났는데, 지금 우리 조계종 총무원의 지원으로 복원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차창을 통해 목격했다는 점이다. 그 외에 관광 코스에서는 ‘절’의 이름도 들은 적이 없었고 그 많던 암자들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어 아쉽고 아쉬웠다. 언젠가 통일의 그날이 오면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찾고 싶지만 그 전에는 기회가 주어져도 사양하고 싶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