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道)이 아니면

요즈음은 자고 일어나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정치인들 누구누구가 구속되었다거나, 검찰에 소환되었다거나, 출국 금지되었다는 뉴스에 익숙해져 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로 현역 국회의원이 20여명이나 구속된다니 가히 귀가 찰 노릇이다. 국회의원들이나 정치인을 위한 별도의 구치소나 교도소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다. 어떻게 나라꼴이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요사이는 평범한 소시민들 서너 명만 모여도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을 보면 나라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나라 걱정하는 백성이 이렇게도 많은 것을 보면 그래도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연초에 잠시 일본에 들러 그들이 자랑하는 니코 국립공원을 관광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궁인 동조궁(東照宮)을 둘러보았다. 당시 막부 권력의 상징답게 화려하고 호사하게 꾸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름 남짓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별로 기억에 남은 건 없고 단 하나, 안내자의 설명대로라면 말을 매는 마굿간으로 쓰였던 건물인데도 요란하게 장식을 하였는데, 처마 밑에 가로로 목각에다 채색을 한 장식 중의 하나가 유독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왔다. 원숭이 세 마리가 나무에 올라앉아 우리를 내려다보는 자세인데 왼쪽에 앉은 놈은 두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고, 가운데 놈은 입을 가리고 있고, 오른쪽 놈은 술래잡기의 술래처럼 두 손으로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다소 코믹하게 보였다. 원숭이해의 연초에 재미있는 화두를 발견한 나는 안내자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얼마간 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듣지 말 것, 말하지 말 것, 보지 말 것을 정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맙다 원숭이야.”

성인 공자께서는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라(非禮勿動)고 하셨다. 예를 강조하신 공자님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리라. 우리 옛 어른들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갋지를 마라’고 하셨지 않은가.

나라 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가정사도 마찬가지리라. 어렵고 어지럽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수록 떳떳하고 바른길을 찾아야 한다. 정도(正道)나 대도(大道)는 상식이다. 원숭이의 해에 원숭이의 지혜를 배우자. 바른 말이 아니면 듣지 말고, 바른 말이 아니면 말하지도 말며, 바른 일이 아니면 보지도 말자.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2월 제39호

기축년(己丑年)의 서원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기축년(己丑年)의 해가 밝았다. 지루하게 느껴지던 촛불시위도 사라지고 미국 발 금융위기가 온 지구촌을 들쑤시어 은행과 보증보험은 제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니 서민과 중소기업만 죽을 맛이란다.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같이 죽지만 말고 명만 붙어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섬뜩한 말이다. 언제나 우리가 희구한 사회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였건만 올해도 이 답(答)은 정답으로 채점되지 않을 것 같다. ‘착하게 살아가는 것 그거 바보같은 것 아니야. 열심히 살면서 어려운 남 도와주려다 상처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 부끄러운 일 아니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 하는 법이야.’ ‘죽고 싶다’는 말 대신에 ‘잘 살고 싶다’고 말하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한해가 되어야 해. 누군가 ‘생명(生命)’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아있으라〔生〕는 명〔命〕령’이라고 했잖아. 정말 올해엔 아무리 어려워도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루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통계 수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지난 여름 이후 날씨가 무척 가물어서 애태우는 농부들이 많았다. 논밭에서 땅을 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바다에서 땀흘리며 어로를 하는 사람들보다 유통과정에서 너무 많은 마진을 챙기는 중간상인을 보면서 억울해하는 농어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시골에 갈 때마다 마을이 온통 양로원화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두고도 복지시설에서나 독거 노인이 되어 근근히 연명하는 사람들의 참상을 보도하기 위해 더 이상 TV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도록 우리 사회와 국가가 따뜻한 보호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기업을 운영하다 정말 어쩔 수 없어 부도를 내고는 종업원들의 체불임금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기업을 운영하면서 금융기관과 정부의 도움을 받아 제 호주머니 챙겨놓고 부도내고는 돌아서서 뻔뻔스럽게 사는 사람이 올해는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가슴으로 위무해 주겠다는 양심선언이라도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지금 국민 대다수가 부딪치고 있는 가장 절박한 문제가 경제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인데도 야당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여당은 지난 1년 간 뭘 했는가. ‘교수신문’이 지난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 –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 는 뜻인데, 치료를 꺼리는 환자에 빗대어 ‘국가리더십’의 위기를 지적하고는 선정이유를 ‘국민ㆍ전문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라고 했다. 지난해 정부출범과 뒤이은 촛불시위, 금융위기상황에서 정치, 경제, 사회지도층이 상황에 걸맞은 현실진단과 대안이 바람직하지 못했다면서 사익(私益)을 우선하거나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등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미봉책과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것이 문제를 키웠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다. 지난해 새 정부 들어 대북 관계가 꼬여서 중국이 북한의 구원투수가 되는 듯한 현실에서 새해는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과거사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땅과 지도처럼 다를 수 있다. 지도를 새로 그린다고 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민주화니, 개발독재니 하는 것도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발 어려운 시기에 한풀이하듯 과거사에 얽매어 있지 말고 힘 모아 바르게 미래를 열어 가는 모습을 보고싶다.

더 이상 지구상에 갈등과 대립과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 종교도 인종도 이념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지구환경과 생명의 존귀함, 그리고 인류의 복지를 위한 노력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이제껏 무수한 겁 동안 이름과 물질에 매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왔으니 새해 기축 년엔 어리석음과 애욕의 마음이 사라지고 불국토의 서광이 비쳤으면 좋겠다.

香岩 김형춘 (반야거사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1월 제98호

기다림의 삶

삶은 기다림이다. 인생은 기다림으로 시작하여 기다림으로 끝난다. 어릴 적의 기다림은 본능적이지만 성인이 되면 자기 기대치의 충족을 위한 기다림으로 산다. 외로울 때도 간절히 바랄 때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길 기다린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때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초조하게 기다리며 산다. 잠시 바쁠 때나 급한 일이 있거나 일시적 쾌락과 만족감으로 기다림을 잊을 수가 있으나 마음의 평정이 찾아지면 다시 기대나 기다림으로 돌아간다.

여기 한평생을 기다리며 살다간 여인이 있다. 초년엔 운명에 대한 저항이 한恨이 되었고, 중년엔 삶에 지쳐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다림으로, 노년엔 체념과 내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보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첩첩산골에서 다섯 딸의 막내로 태어나 세 살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덟에 8남매 5형제의 막내아들과 혼인을 하였단다. 스물에 맏아들을 낳고 두 살 터울의 딸을 두었으나 일찍 잃고, 다시 스물넷에 둘째아들을 얻으면서 4대 가족 20여명이 함께 사는 큰댁에서 막내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할 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스물다섯 5월 단옷날, 6.25라는 이름의 난리가 한창일 때 지아비가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행복했던 한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고 지어미는 기구한 운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걱정 마라. 곧 돌아올 테니.” 이 한마디의 말을 믿고 기다림의 삶은 시작되었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곧장 전선에 투입되어 몇 차례나 전투에 참가하였을까. 운명의 날, 1952년 10월 28일.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에서 전사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골함을 찾아와 장례를 치렀건만 지어미는 결코 지아비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어도 지어미는 해질녘 사립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미의 기다림은 잠시 고달픈 현실에 묻혀 보이지 않는듯하였지만 두 아들이 하교하길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세월은 흐르는 법, 전쟁이 끝난 지 30년 쯤 되었을 게다. 매스컴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되니 그때부터 노인은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다림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후 노인의 방 TV는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6.25때 국군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조창수(?)’씨가 TV에 나타나 한동안 우리 사회에 파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TV가 구멍이 날 정도로 보기도 했다.

손자 손녀들이 각기 제 길을 가고 나니 자연히 기다림의 대상은 아들과 며느리에게로 바뀌었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귀가할 때까지 노인은 아파트 베란다에 기대서서 오고가는 승용차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기다리곤 하였다.

8순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더러 병원 신세도 지고 몸져눕는 일이 많아졌다. 이따금씩 텃밭에 나가 바람이라도 쏘이지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이 드니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체념의 탓일까. 그도 아니면 무상(無常)을 깨달은 탓일까. 인연因緣의 질긴 끈을 스스로 끊지 못함을 터득하였을까.

그다지도 강한 집착(執着)의 힘이 다 소진되었을까. 그래도 건강이 뒷받침이 되어 줄 때는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한풀이라도 해 봤고, 실컷 기다리다 지쳐도 보았고, 자식들 키우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잠시 잊기도 하고 새로운 보람도 맛보았다.

이제 모든 것 다 접고 텃밭 한번 둘러보고는 아들 며느리에게 쇠고기 국밥 한 그릇 사 먹이고, 며느리 손에 밥 몇 숟갈 받아 잡수시고는 아들 등에 업혀서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가족들의 흐느낌과 아쉬움 속에, 주위 분들의 기도 속에 먼 길 가셨다. 이별이 없는 곳으로, 기다림이 없는 곳으로. 이제는 만남도 헤어짐도 기다림도 재회도 인연소치라는 것을 아셨을 테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