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伐草)의 계절에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고 자연의 섭리가 오묘함을 다시금 느낀다. 지루하던 장마도, 뜨겁기만 하던 여름 햇볕도 백로(白露)를 지나면서 찬이슬로 맺혀지고, 추분(秋分)을 지나면서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여름 내내 텃밭에서 베어 놓고 돌아서면 자라던 풀도 이제 올해의 자람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된 것 같다.

해마다 이맘때면 산야에 모셔진 조상들의 무덤과 묘역에 1년 간 자란 풀을 베어내는 벌초(伐草) 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아무리 바빠도 선조의 산소에 풀을 베지 않으면 ‘무후장(無後葬)’이라 여기기 때문에 만사를 제쳐두고 벌초를 한다. 예전에는 좀 산다는 집안에서는 산소 관리를 ‘묘지기’에게 맡기고 얼마간의 ‘묘답(墓畓)’을 마련해 주었지만 요즈음은 자기 집안 묘 관리도 어려운데 남의 집안 묘 관리를 맡아줄 사람은 더욱 없다. 그러나 객지에 나가서 특별히 바쁜 경우엔 농협 등을 통해 벌초를 대행해 주는 제도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민족 전래의 조상 숭배 사상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이어 선조의 무덤을 관리하는 것으로 잘 나타난다. 해가 바뀌고 긴 겨울을 지나 해동하면 찬밥을 먹으면서 조상의 산소를 살핀다는 ‘한식(寒食)’ 성묘를 하고, 4대 명절의 하나인 ‘단오(端午)’ 성묘에 이어, 음력 7월 말쯤이면 벌초를 하고 8월 초순에 이를 확인하는 성묘를 한다. 설날과 추석 명절엔 객지에 나가 살던 자손들이 고향에 돌아와 차례를 지내고는 으레 성묘를 하는가 하면, 음력 10월이면 ‘4대 봉제사’가 끝나고 고손(高孫) – 현손(玄孫) – 이 제주가 되면 묘사(墓祀) – 시제(時祭), 시사(時祀) -를 지내면서 또 한번 산소를 찾을 기회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예전의 풍습들이 많이 변질되고 사라졌지만, ‘벌초’ 후의 성묘와 음력 10월의 시제(時祭)를 지내지 않는 집안은 드문 것 같다.

벌초의 문화도 최근 반세기 동안 많이 변한 것 같다. 50, 60년대까지는 예전의 그 모습대로 낫으로 풀을 베었는데,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젊은 세대 또는 전 가족이 도회지로 이주하면서 벌초와 성묘를 하는 사람이 적어졌고, 때맞추어 산림녹화사업의 성공으로 산에 숲이 우거져 몇 년간 방치해 둔 무덤은 찾기가 어려워 이른바 ‘실묘(失墓)’한 경우도 많아서 마을의 노인들을 찾아 하소연하는 진풍경도 더러 볼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혹시나 우리 민족의 조상 숭배 사상이 퇴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현상도 잠깐.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득 수준도 높아지고 다시 생활의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이 자동차에 ‘예초기(銳草機)’를 싣고 고향을 찾아 직접 벌초하고 성묘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요즈음은 벌초와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고속도로를 비롯한 전국의 도로가 정체 현상을 빚는 것은 일반화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이런 현상을 염두에 두고 나들이 계획을 한다. 국도를 타고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특히 익어가는 벼가 장관을 이루는 황금 들녘을 끼고 다니다 보면 도로변 곳곳에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 있건만, 누구하나 불법 주정차 시비하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주변 산의 곳곳에서 벌초하는 기계소리를 듣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뿐인가. 돌아오는 길의 정체 현상은 더하여 여느 때보다 서너 배 더 긴 시간을 차안에서 시달려도 누구하나 불평하거나 짜증스런 얼굴이 아니다. 차안에서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들의 얼굴도 평화스럽고, 정체 구간에서 부부나 가족들이 번갈아 운전석에 오르는 모습도 정겨워 보인다. 차창을 열어놓고 고향에서 가져오는 밤이나 옥수수, 고구마 등 음식을 먹는 모습들도 계절의 별미답게 구미가 당긴다. 좀은 피로하고 시간에 쫓길 법도 하건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비는 마음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우리의 미풍양속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세태는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언제까지나 간직해 두도록 그다지 너그럽지는 않을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10월 107호

버리지 못하는 이유

다들 그랬지만 예전엔 버릴게 없어서 버리지 못했다. 적어도 오두막이라도 내 집을 갖기까지는 말이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라도 모으면서 산다는 게 행복이었다. 살림살이 가재도구, 책 한권이라도 늘어나는 게 대견스럽고 며칠을 두고 보고 또 보곤 했다. 주거문화가 바뀌어 아파트 바람이 불고 난 한참 뒤에야 지인의 도움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버리는 문제로 고민을 해봤다. 이재(理財)에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좀 자주 이사도 하고, 집도 사고팔면서 살았다면 그때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렸을 텐데 말이다.

꼭 20년 하고도 6개월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노인네를 모시고 살다보면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여 10여 년을 살고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니 환갑을 갓 넘긴 노모께서는 아침 식사 후면 3년 반을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출근을 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는 아예 다시 이사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10년 쯤 살고는 혹시나 싶어 직장 가까이로 집을 옮기면 어떨까 하여 노인에게 뜻을 비쳤다가 “내 죽고 나거든 가거라!” 하는 한마디에 말문을 닫았다.

한 집에 20년 쯤 살다보니 자연히 이곳저곳 손 볼 곳이 생기고 불편한 점이 많아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간신히 노인네의 허락(?)을 받았다. “너희가 좋다면 가자.”는 석연찮은 대답을 듣고 이사한 지 한 달이 된 지금도 전전긍긍이다.

‘포장이사하면 쓰레기도 다 가져다 놓는다’는 말을 듣고는 몇 주일을 고민하여 이웃의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 아예 버릴 것, 텃밭에 갖다 놓을 것 등을 분류하면서 고민했다. 집의 크기는 비슷했지만 정말 이제는 빠듯한 것보다는 여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물질적 여유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여유도 찾고 싶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삶의 공간적 여유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작 이사를 해 놓고 보니 버리지도 못하면서 짐이 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때는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좋아라 보던 가족사진들, 아내가 학창시절에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들어 가지고온 가리개와 곡식과 잡곡들로 모자이크된 작품들, 십여 년 전 교사불자회 회원들과 통도사 극락암에 들렀을 때 ‘경봉 큰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삼소굴(三笑窟)’의 허물어진 담장 앞에서 아내와 같이 찍은 사진을 후배가 커다란 액자에 넣어 준 것, 예전에 직장 동료로부터 받은 40호 크기의 ‘관음보살’ 그림, 작고하신 선배의 개인전에서 가져온 유화, 40년 넘게 교단에 머물고 있지만 내세울 만한 제자가 없는 나에게 30년 전 문학동아리 ‘여명’의 제자이자 무명화가로부터 받은 정물 유화 1점,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 입주할 때 ‘외솔회’ 친구들이 입택 축하로 가져온 100호짜리 서화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느 것 하나 사연이 없는 가재도구나 작품은 없다. 57년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집 재산목록 1호로 구입한 ‘재봉틀’, 52년 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들어온 ‘쌀뒤주’도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우리 서부 경남 방언에 ‘벌다’(일을 하거나 하여 돈이나 물건을 얻거나 모으다)의 쓰임에 ‘버리다’(예; “어디 갔다 왔니?” “돈 버리러 갔다 왔다.”)가 있다. ‘버리러’의 바른 뜻인즉 ‘벌이 하러’가 줄어서 되었겠지만, 방언에서의 겉모습의 으뜸꼴은 ‘버리다’로 겉모습이 같다. 따지고 보면 애써 ‘벌이’하여 잠시 곁에 두었다가 ‘버리’게 마련인 것 같다. 인연 따라 잠시 내 곁에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버리’든지 가치를 인정받으면 인연 따라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다.

당장은 좀 부담스럽지만 언젠가는 내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한결 가뿐하다. 언젠가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그 옛날의 집’ 마지막 행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의 심경을 빨리 닮고 싶을 뿐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2월 123호

배추값 파동

“배추이파리(만원 권) 하나로 배추 한 포기 못산다.”는 말이 나오고, ‘김치가 금치’라는 오래 전의 망령이 되살아난 몇 주간이었다. 서민을 위한 정치, 생필품 가격 안정을 외치면서 5~6십개 품목을 정해놓고 중점 관리한다던 현 정부가 뒤통수를 맞았다. 중점 관리를 한다던 농산품, 공산품, 수산물 등은 항시 원자재나 자연재해 특히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 많다.

불과 2~3십 년 전만 하더라도 기후를 비롯한 자연재해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 생산자인 당사자만 피해를 입고 끙끙 속앓이를 하였고, 소비자는 얼마간 소비를 자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하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태풍이 불어도, 냉해가 와도, 우박이 떨어져도, 폭설이 쏟아져도, 산짐승이 헤치고 지나가도, 병충해가 만연해도 내 탓이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해결해 주고 보상해 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재해의 원인을 ‘천재(天災)’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인재(人災)’로 몰아가서 대책을 세우고 물질적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존립 근거는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물질중심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하여 설령 자기 잘못이 어느 정도 인정되더라도 자기는 물질적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사고에다,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확실한 요구 또한 드센 상황이다. 이에 국가는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요구를 수용하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말 배추가 밥상에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 배추를 먹지 않으면 못사는가. 배추가 매스컴을 타니까 덩달아 ‘굴’을 채취하고 양식하는 어민들이 김장철이 다가오니 걱정이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마늘도, 파도, 고추도, 생강도 덩달아 시비를 걸어올지 모른다. 이렇게 ‘배추’가 매스컴의 머리기사가 되니 국회에서까지 시끄럽다. 그러나 정작 배추를 재배하는 농가와 농민은 별 말이 없다. 배추 값이 올라도 별로 득 보는 것이 없고, 배추 값이 내려도 별로 손해 보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미 밭의 배추는 대부분 수집상인 중간도매상들의 손에 넘어가고 없으니 말이다. 간혹 매도되지 않은 농가에서는 수입 물량을 비롯해 배추가 시장에 과다하게 출하되어 몇 해 전처럼 또 배추밭을 갈아엎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눈치다.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면 수입하면 되는데 남아돌 때면 어떻게 처리해주고 책임져 주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유별나게 언론이 다루어 주니 배추 값이 그나마 빨리 제자리를 찾아 다행이지만 극성스런 보도로 무심코 배추를 찾지 않고 넘어갈 사람들마저도 식당에서나 가정의 식탁에서 배추 생각을 하게 하지나 않았을까.

정부나 국정의 책임자가 진정으로 챙겨주고 사랑해야 할 백성은 누구인가.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애민’편에서 여섯 조항을 들어 제시한 게 있다. 힘없고 약한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양로養老’, 어린 아이들에 대한 부양과 교육인 ‘자유(慈幼)’,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진궁(振窮)’, 상을 당한 집안에 대한 배려인 ‘애상(哀喪)’, 장애인이나 중환자들에게 가능한 모든 특혜를 주는 ‘관질寬疾’, 끝으로 천재지변이나 인재를 당한 사람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넣어주는 ‘구재(救災)’를 강조하였다. 진실로 이번 배추파동에서 챙겨주어야 할 사람들은 이 마지막 ‘구재(救災)’에 해당하는 농민들이 아닌가.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이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보살피고 챙겨주지 않아도 잘 산다. 진수성찬에 김치 하나 빠져도 괜찮다. 위에 열거한 여섯 부류의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 위정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자나 대기업을 외면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중소기업, 소상인, 일반 서민들을 위하고,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사람을 돕는데 국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배추 값의 안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애민정책愛民政策’에 귀를 기울이고 힘써야 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1월 1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