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그 뜻한 바가 잘 이루어질 때, 그는 참으로 인간이 갖고자 하는 것을 얻어서 기쁘다. 그러나 욕망을 이루고자 탐욕(貪慾)이 생긴 사람이 만일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처럼 모든 욕망을 피하는 사람은 바른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의 애착을 넘어선다.”고 부처님께서는 ‘수타니파타’ 제4장 의품(義品)에서 이르셨다.
인간이 갖는 희망이나 꿈은 건전한 욕망이다. 바람직한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은 탐욕과는 다르다. 우리의 수행과정에서 발심(發心) 또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탐욕은 아니다. 조그만 소망이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깨닫겠다는 마음 즉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은 그릇된 욕망이 아니다. 신심(信心)과 발원(發願)은 탐욕이 아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큰 원을 세워 그 ‘원의 힘[願力]’에 의해 태어나지만, 중생들은 자기가 지은 ‘업의 힘[業力]’에 의해 태어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면서 어떤 꿈, 어떤 희망, 포부,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 삶의 향배가 결정된다. 기업이나 조직,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얼마 전의 일이다. 두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기신 노모께서 대동강의 얼었던 물도 녹는다는 ‘우수’를 지난 즈음, 갑자기 고통스러워해서 휴일 오후에 입원을 했다. 검사 시간이 길어져서 병원 근처에 가서 당장 끼니를 때우려고 ‘죽’을 사와서 먹었다.
그 ‘죽’의 상표를 보면서 인상 깊게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그 죽을 만드는 회사의 직원들은 ‘가맹점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점주店主들의 성공을 돕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무릇 기업이라면 이윤의 창출과 극대화가 지상과제이겠지만 ‘이윤 추구’와 ‘가맹점 점주의 성공’, 어느 목표를 머릿속에 새기고 일에 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까.
외국계 어느 호텔에서는 종업원들에게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심어주기 위해 독특한 모토를 설정하여 교육한다고 한다. 내용인즉 ‘우리는 우리 호텔을 찾는 신사 숙녀들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진정한 신사 숙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멋진 슬로건이 아닌가.
우리나라 굴지의 보험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더 생각난다. 선대의 가업을 잇기 위해 대학교수직을 던지고 보험회사의 오너 사장이 부임하여 보험설계사(보험 모집인)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단다. “당신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사장의 물음에 설계사는 “보험을 팔기 위해”라고 답하니, 재차 사장은 “보험을 파는 것은 왜 중요한가?” 하니, “어려움이 생길 때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서”라고 답하였단다. 다시 사장은 “도움을 받는 것은 왜 중요한가?” 라고 물으니, “미래의 역경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물론 이 보험회사의 경영목표는 ‘고객이 미래의 역경에 부딪쳤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리라.
허황된 욕망과 집착은 끊임없이 더 욕망을 향해 나아가 탐욕과 파멸만 남게 할 뿐이다. 뱀의 머리를 피하듯 모든 욕망을 피하라고 하셨으니, 가시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면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 무력해져서 그들이 자기를 이기고 위험과 재난이 그를 밟는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치 파손된 배에 물이 새어들듯 한다고 하셨다.
항상 바른 생각을 지키고, 욕망을 회피할 따름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3월 1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