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26) – 중송분 7

<경문>

일체 여래께는 장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존경스런 보현이라 부른다.

내 이제 모든 선근을 회향해서 지혜로운 행동이 저와 같아지길 원하며

몸과 말과 뜻이 항상 청정하고 모든 행과 국토도 또한 그렇게 되길 원하니

이와 같이 지혜로워야 보현이라 할 것이니 내 그와 똑같이 되리라.

내 청정한 보현의 행과 문수사리의 모든 대원을

남김없이 모두 닦아 원만히 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게으르지 않으리라

내 한량없는 수행 모두 닦을 것이며 한량없는 공덕 죄다 얻어서

한량없는 모든 행에 머무르면서 일체 신통력을 통달하리라.

문수사리의 용맹한 지혜와 보현의 지혜로운 행도 그러하나니

내 이제 모든 선근 회향하여서 저를 따라 모두를 닦아 배우리.

삼세 모든 부처님이 칭찬하시는 이러한 뛰어난 모든 대원에

내 이제 온갖 선근 회향하는 것은 수승한 보현행을 얻기 위한 것

내 이 목숨 다하려 할 때 일체 장애를 다 없애고

아미타 부처님을 만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 왕생하야지이다.

내 저 세계에 가서 나고는 그대로 이 대원을 모두 이루어

온갖 것 남김없이 원만히 하고 일체중생계를 이익 주어 즐겁게 하리.

<풀이>

보현보살을 부처님의 장자라 한다. 부처님의 가업을 계승하는 서열 제일에 있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문수의 지혜가 뛰어나도 보현의 행원이 아니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지 않으므로, 실제 부처님 일을 완성시키는 역할은 보현이 하는 것이다. 입법계품의 선재동자 53선지식 순방에서도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법계에 들어간다. 이것은 바로 보현의 행원이 보살도를 완성함과 동시 정각을 성취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각의 경계를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자각과 각타로 구분 자리이타를 각에 배분 깨달음 자체가 완전무결해질 때 부처가 되는데 이를 각만(覺滿)이라 한다. 따라서 깨달음은 단순히 하나의 사실을 아는 지적인 이해의 차원이 아닌 모든 것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번뇌에 의한 일체의 장애가 종식되고 알고 실천하는 면에서도 일체 장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각의 경계다. 주관과 객관 사이의 마찰이 전혀 없는 것이 보현 경계이며, 이때 보현은 부처님의 역할을 대역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보현행은 모든 것을 다 포함 수용하는 원융무애한 최고의 대행이 되어, 중생을 향한 끝없는 활동력을 전개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문수의 역할을 ‘집안 일’(家裏事)이라 하고, 보현의 역할을 ‘길에서 하는 일’(途中事)이라 말해 왔다. 문수는 지혜인데, 이 지혜는 내면적인 것 곧 마음의 눈이 뜨진 상태로 눈을 뜨고 있어야 보거나 갈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된다. 반면에 보현은 행원으로 걸음을 떼어 걷고 있는 상태이다. 걷고 있는 것은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때문에 보현은 멈추지 않고 다니는 동적인 활력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활력은 언제나 중생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의 힘이다.

대승 불교는 실천 불교요, 참여 불교다. 우리 사회를 큰 공장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공장 안의 기계가 돌아가야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불교가 실천되어야 중생이 제도되는 것이다. 이 실천력이 보현의 발로 표현된다. 대승 불교에 3대 보살 정신이 들어 있는데, 문수의 지혜는 사람 신체의 눈과 같고, 보현의 행원은 발과 같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라 하는데, 이는 손과 같은 보살이다. 지혜의 눈으로 보고, 행원의 발로 다가가서, 자비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이 불교다. 이 세 가지가 항상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보현행원품》의 게송 가운데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왕생을 발원하는 구절이 있다. 시식문에도 인용되는 이 구절은 화엄 사상 속에 포함된 정토 사상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임종을 맞을 때에 모든 업장의 장애에서 벗으나 아미타부처님을 직접 뵙고 곧바로 극락세계에 가 태어나게 하소서!” 정토 신앙은 인간의 한 생애를 마감하고 죽음에 임할 때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기를 희망하는 애틋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무상한 세상을 초월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 본연의 향수라 할 수 있는 지극한 신앙 정신의 이상을 나타낸 것이다. 보현의 행원에 이러한 정토의 발원이 들어 있는 것은 불국을 지향하는 궁극적인 이상이 자리와 이타를 함께 닦는 대행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행 속에 죽음에서 바라는 부처님의 세계를 그려 놓고 있다. 종교의 의미를 죽음의 해결에서 찾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중생이 사후의 안락을 보장받고 싶어 할 때 신앙심은 일어나게 마련이며 이 마음이 일어날 때 기실 인간은 자기의 인생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5월 제66호

보현행원품 (25) – 중송분 6

<경문>

빠르고 두루한 신통의 힘과 모든 데를 두루 드는 대승의 힘과

지혜로운 행으로 널리 닦는 공덕의 힘과 위엄 있는 신력으로 모두를 덮어주는 큰 자비의 힘과

온갖 것 깨끗이 해 장엄하는 뛰어난 복력과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지혜의 힘과

선정과 지혜 방편의 위신력과 모든 것 쌓아 모은 보리의 힘과

청정한 일체 선업의 힘과 일체 번뇌를 없애버린 힘과

일체 마군을 항복시키는 힘과 보현의 모든 행을 다 이룬 힘으로

널리 모든 국토를 깨끗이 하며 일체 중생을 해탈케 하며

잘 능히 모든 법을 분별하며 능히 깊이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며

널리 능히 모든 행을 청정히 하여 일체 모든 원을 원만히 하고

모든 부처님을 친히 가까이 공양해서 영겁이 지나도록 수행에 게으르지 않으리.

삼세 모든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보리의 행원을 내 모두 공양하고 원만히 닦아서 보현행으로써 보리를 깨달으리

<풀이>

생명 현상을 에너지 현상으로 풀이하는 과학의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생명은 힘의 발산이라 할 수 있다. 힘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힘이 ‘영 상태’가 되면 그 생명은 살아 활동하는 것이 중지되고 죽음이 돼버린다. 중생의 세계는 힘을 과시하면서 강자가 약자를 압도하는 역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말하는 약육강식도 힘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나쁜 업을 유발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될 때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세계나 정진의 세계에서도 엄연히 힘이 통하고 있다. 보현행원의 실천에 있어서도 많은 힘이 투입되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신통력에서부터 대승의 힘, 공덕의 힘, 대자의 힘, 수승한 복력 지혜의 힘, 위신력, 보리력, 선업력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힘을 쏟아 일체 모든 원을 원만히 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힘이 성패를 좌우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보현의 행원은 곧 끝없는 정진력이다. 보살행의 실천을 보통 6바라밀로서 설하고 있으나 화엄경에서는 10바라밀을 설한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에 ‘방편, 원(願), 역(力), 지(智)’를 더한다. 이 중 아홉 번째의 ‘역바라밀’이 수행의 추진력이요, 행원의 실천력이다.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어떤 일에 힘을 얻어야 한다. 힘을 얻지 못하면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행을 완성하는 것도 결국 힘을 얻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수행의 궁극 목적인 생사해탈을 ‘생사를 대적하는 힘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힘을 얻어야 한다. 일에 능숙해지고 통달되어질 때 그 일의 어려움이나 힘든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이며 이때 힘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현의 행원 속에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정신력이 언제나 갖추어져 있고, 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대승의 최고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10수를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품명에 10자가 들어가는 것이 수행의 지위를 나타내는 10주품, 10행품, 10회향품, 10지품, 그리고 십지의 수행을 완성하여 삼매를 얻을 때 얻는 초능력적인 경지를 설명하는 10정품, 10인품, 10통품 등이 있고, 뿐만 아니라 각 품을 설하는 설주가 등장할 때 돌림자를 같이 쓰는 10명의 보살이 동시에 등장하는가 하면, 수행의 종목이나 그 이익을 말할 때도 꼭 10가지씩을 묶어 말한다. 이렇듯 10수 법문이 자주 나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0은 10진법의 완수로 모든 것을 다 채웠다는 만수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이 10은 언제나 10바라밀은 뜻한다고 중국의 화엄대가 통현 장자는 말했다. 말하자면 화엄경에서는 바라밀 완성의 폭을 더 넓혀 말한다는 것이다. 보살의 원력이 완전히 발휘되고 또 그 공덕이 십분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다. “내가 모두 보리의 행원을 원만히 하여 보현의 행으로써 보리를 깨닫겠다.”는 마지막 본문이 행원품의 대의라 할 수 있는 말이다. 이타원력의 동적인 수행을 일으키고 또한 그러한 원력으로써 보리를 얻겠다는 이 말이 기실 화엄경다운 말이다.

예로부터 ‘화엄도리’라는 말을 자주 써왔다. 화엄의 이치에 맞는 어떤 방식을 두고도 화엄도리라고 하였는데, 이 화엄도리가 바로 법계무진연기의 체성을 터득한 융통무애의 원융산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와 너를 동체로 보고 서로를 일체화시키는 것이 화엄도리이다. 마찬가지로 보현행원이 나와 너를 하나가 되게 하는 통합정신으로 인생을 조화롭게 살고, 세상을 조화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자는 의미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4월 제65호

보현행원품 (22) – 중종분 4

<경문>

내 항상 모든 중생들과 사이좋게 미래 일체 겁이 다하도록

언제나 보현의 광대한 행을 닦아 위없는 큰 보리를 원만히 하리

나와 같이 행하는 자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함께 모여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을 똑같이 하고 일체 행원을 함께 닦아 배우리.

나를 이롭게 하는 선지식이여! 나를 위해 보현행을 보여주시고

항상 나와 함께 모여 만나서 내게 항상 환희심을 내게 하소서

언제나 부처님을 만나 뵈옵고 모든 제자들이 에워싸거든

저들에게 광대한 공양을 일으키고 미래 겁이 다하도록 싫증내지 않으리.

부처님의 미묘한 법 지녀서 일체 보리행을 빛내고

끝내 보현도를 청정히 하여 미래 겁이 다하도록 닦아 익히리.

내 일체 중생들 있는 속에 닦은바 복덕 지혜 다함이 없게 하고

선정·지혜 방편과 해탈로 다함없는 공덕장 얻게 하소서

한 티끌 속에 티끌 수 국토 있으며, 국토마다 생각할 수 없는 부처님 계셔

부처님 처소마다 모여 있는 대중 속에 내 항상 보리행 연설함을 보여주리.

<풀이>

불교는 인간의 화목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보의 가치는 화합과 화목에 있다. 원래 ‘승가(僧伽 samgha)’는 ‘화합된 사람들’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사이좋게 모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바로 이상적인 인간사회의 한 전형을 말하고 있다. 공동사회의 인간관계가 화목하게 어울려 있는 건 평화와 안녕이 보장되는 낙원이다. 불교의 불국토는 삶의 고통이 없는 이상향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나라는 죄악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고, 동시에 불화가 야기되지 않는 곳이다. 보현의 행원이 이루어지면 자타의 관계가 원만해져 좋은 사이가 유지된다. 내가 남을 이롭게 할 때 우선 나와 남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이고 사이가 좋으면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이것보다 우선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반목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보현의 행원을 갖춘 ‘원의 왕’이 되는 것이다. 보리행 곧 각행을 원만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참 가치이므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속의 물정을 가지고 참 진리에 대한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삼세의 인연을 동시에 가지고 산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인연이 인과의 법칙에 의해 과보를 가져온다. 때문에 우리들 일상의 업이 인과의 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무엇보다도 좋은 인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이러한 생활의 정신이 보현의 정신이다. 『납자십게(衲子十偈)』에 나오는 게송에 인과의 이치를 비유하여 설명해 놓은 글이 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그림자는 물체의 모양대로네

삼시(三時)의 업의 과보 거울이 물체 비추듯 하고

스스로지어 스스로 받는 것이라 회피할 수 없거늘

어찌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할 수 있으랴.

인과법칙을 믿을 때 불교의 교리를 받아들여 법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다. 인과법을 무시하는 것을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로 인식하여, 부처님의 법을 배반한다고 보았다. 사실 인과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바르게 된다. 이 법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낳는 모법이다. 물론 인간 행위의 악이 사람을 상대하는 조건이 되어 외면하거나 소외시키는 배척의 대상으로만 간주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의 수신에 있어서 인을 과보다 소중히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 있어야 행원이 살아남을 의미한다. 업인이 선인이 될 때 보살행이 닦아지므로 선법의 실천과 인과는 그 궤를 같이하게 된다.

인에 상응하는 과가 나타나는 시기가 다른 것을 두고 ‘삼시업’으로 구분한다. 금생에 지은 업이 금생에 과보를 가져오는 것을 현생업(現生業)이라 하고, 내생에 과보를 가져오는 것을 ‘순생업(順生業)’이라 한다. 그리고 몇 생을 지난 후에 과보가 나타나는 것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마치 식물의 종자가 발아에 소요되는 시간이 다른 것처럼 업이 지어지고 그 과보가 도래하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자신의 업종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2월 제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