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3) – 예경제불원(禮敬諸佛願)

<경문>

선재동자가 여쭈었다.

“위대하고 거룩한 이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며 나아가 회향하오리까?”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계시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을 내가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눈앞에 대하듯, 깊은 마음으로 믿고 이해하여 몸과 말과 뜻을 깨끗이 해서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 한 분 한 분 부처님 계신 곳에 모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니라.

이리하여 허공계가 다하면 나의 예배도 다하거니와, 허공계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나의 예배도 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며, 이와같이 해서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예배도 다하거니와, 중생계나 번뇌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나의 예배와 공경도 다함없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고 하는 것이니라.”

<풀이>

모든 종교는 예경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교조에 대한 예배와 공경은 그 신자로서 응당 지녀야 할 예법이다. 신을 믿는 서양의 종교에서는 종교의 본래 뜻을 ‘예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어로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religio’에서 유래된 말로, 그 어원의 뜻은 ‘예경’또는 ‘결합’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신에 대해 예배를 드리고, 인간과 신이 관계를 맺고 결합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신을 전제하지 않으므로 신학적인 의미가 없으나, 예배 자체가 하나의 수행행위로 간주된다. 부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발심의 훈련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낮추어 아만을 제거하고 진리를 따르려는 결의를 표현함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갖추어진 자성의 공덕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여래의 공덕을 저장하고 있는 창고인데, 이 창고의 문을 여는 행위가 ‘예배’란 말이다. 시쳇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찰을 순수한 우리말로 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중에서 절만큼 절을 많이 하고 사는 곳은 없다. 총림을 이룬 대중이 많은 큰 사찰에서는 스님네 상호간 하루에도 수십 번 합장하고 절하며 인사를 나누고 생활한다.

또한 절을 많이 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함을 의미한다.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염원을 부처님께 비는 신앙심의 발로이다. 기복심리가 일부 비판을 받고 있는 경향이 있으나, 기실 복을 비는 것은 인간의 원형적인 심리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원시적인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들어 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무사히 궤도진입을 바라는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최첨단의 과학문명이 가장 원시적인 기복심리를 그대로 노출시킨 경우이다. 예배를 한 만큼 감응(感應)이 일어나기도 한다. ‘백팔참회’나 ‘대예참’ 또는 ‘삼천 배’등 불자들의 신심을 키우는 예배는 불교의 기본의례에 속하는 일이다. 이 예배를 어느 정도 하느냐? 한정없이 무한히 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의 무한한 공간 속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들은 그 수효를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라고 하였다.

한역 원문의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는 대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을 무진장(無盡藏)이라고 한다. 마음 자체가 어떤 한정된 범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뜻에 입각해서 실천하는 보현의 행원은 무수 무한으로 거듭거듭 증대해 나간다. ‘허공계가 다함이 없고 중생계가 다함이 없고 중생의 번뇌가 다함없기 때문에 나의 예배도 다함이 없이 한다’는 이 말은 보현의 극치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이타정신의 극치를 나타낸 말이다. 이 말은 열가지 행원 하나 하나에 후렴처럼 붙어 나온다. 인간의 마음은 깨달음의 본체 그대로이다. 시간적 제한이나 공간적 한정이 없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므로 그 마음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 보현의 정신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6월 제43호

보현행원품 (28) – 중송분 (9)

<경문>

옛적에 지혜의 힘이 없었던 탓에 극악한 오무간업을 지었더라도

이 보현의 대원왕을 외우게 되면 한 생각에 재빨리 죄다 소멸되리라.

태어남에 좋은 가문, 좋은 얼굴, 좋은 몸매와 지혜가 모두 원만해

마군과 외도들이 달려들지 못하고, 삼계 중생 공양을 능히 받으며

지체 없이 보리수 밑에 나아가 앉은 채 모든 마군 항복시키고

등정각을 이루어 법륜 굴려서 널리 일체 중생 이익 되게 하리

만약 누군가가 이 보현원을 읽고 외우고 받아 지녀 연설한다면

그 과보는 부처님만 능히 아시니 반드시 보리도를 얻게 되리라.

만약 어떤 사람 이 보현원을 외우는 것을 내 그 선근 조금만을 말하여도

일념 간에 일체 공덕 다 원만해 중생의 청정한 원 성취하리라.

내 이 보현의 수승한 행의 가없고 빼어난 복 모두 회향하나니

널리 고해에 빠진 모든 중생이 어서 빨리 극락국토 가게 하소서.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이 보현의 넓고 큰 대원을 청정한 게송으로 설하고 나니 선재동자는 한없이 뛸 듯이 기뻐하였고 일체 보살들도 크게 기뻐하니 여래께서 칭찬해 말씀하시기를 잘했다, 잘했다 하시었다.

그때 세존께서 거룩한 여러 보살마하살과 더불어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해탈경계의 수승한 법문을 연설하실 적에 문수사리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여러 대보살들과 및 그들이 성숙시킨 6천의 비구와 미륵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현겁의 일체 대보살들과 무구보현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생보처이며, 관정위에 머무는 여러 대보살들과 그 나머지 시방 일체 세계에서 많이 와 모인 일체 국토의 가는 먼지 수만큼의 많은 보살마하살들과 대지사리불과 마하목건련 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성문들과 인간과 천상과 세간의 모든 임금과 하늘과 용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 아닌 이 등 일체 대중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다들 크게 기뻐하고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풀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수가 범부에게 있어서는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행동의 실수, 말의 실수, 그리고 생각의 실수가 삼업을 통해 일어나게 될 때 이것을 상쇄할 수 있는 새로운 착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기신론》에 서는 앞의 생각에 잘못된 그름을 깨달아 뒤의 생각을 멈추는 것이 깨달음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보현행원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과거의 나쁜 업을 소멸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보현의 행원이 실천될 때 과거의 묵은 악업이 참회되어 약이 병을 퇴치하듯 없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현원은 무상보리를 얻는 인행(因行)이므로 성불을 기약하는 가장 높은 희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부처를 희망하는 최고의 가치 의식을 먼저 느끼도록 하는 종교다. 진리에 대한 소신이 바로 서면 가치관 또한 바로 선다. 사람의 생각 속에 어떤 가치 의식이 들어 있느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마음에 대한 가치 의식을, 객관적으로 보는 사물에 대한 이해처럼 느끼기가 매우 어렵다. 단순히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 사이의 인정적인 감사의 차원을 넘어선 지고의 유심 가치를 사람이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값없는 보배’라 한다. ‘값이 없다’는 것은 값을 따져 매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마음이 보배로서의 하는 역할이 바로, 보현 행원이다. 전등이 전선에 연결되어 불을 밝혀야 전등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보현의 원력이 갖춰질 때 마음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마음의 위대성이나 그 탁월성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자심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정진을 외면하고 방일한 생활을 하는 것은 유심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행원의 왕이 되는 것이다.

보현보살이 설한 행원은 불가사의 한 해탈경계의 수승한 법문이다. 부처님의 공덕이 모두 성취되는 불가사의한 이 법문이 바로 대승의 핵심이요, 자성(自性)의 삼보며 자성의 삼학(三學)이다. 불교의 실천적 수행이 보현의 행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서 자리이타의 공덕이 원만해지면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실천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

보현행원품 (27) – 중송분 8

<경문>

부처님 회상은 그 모두 청정하니 내 빼어난 연꽃 속에 태어나서

여래의 한량없는 광명 친히 보고서 그 자리서 보리수기 받아지이다.

부처님 수기를 받고나서는 수없는 백구지의 화신을 나타내

지혜의 힘 넓고 커 시방에 퍼져 널리 일체 중생계를 이롭게 하리

허공 세계 다하고, 중생 세계 다하고, 업과 번뇌 다하면 모르거니와

이러한 것 다할 때가 없는 까닭에 나의 원도 마침내 다함 없으리

시방에 있는 가없는 국토 온갖 보배로 장엄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가장 빼어난 즐거움을 천상과 인간에 베풀어 일체 국토 가는 먼지 수의 겁을 지나도록 하여도

만약 누군가가 이 빼어난 원의 왕을 한 번 귀에 듣고 능히 신심을 내어

무상보리 구하고자 마음에 갈앙하면 얻는 공덕 저를 훨씬 능과 하리라.

언제나 나쁜 벗을 멀리 여의고 영원토록 일체 악도 만나지 않고

무량광 여래를 속히 뵈어서 이 빼어난 보현원을 모두 갖추면

이 사람은 좋은 수명 누릴 것이며 이 사람은 훌륭한 인간에 와 태어날 것이며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저 보현보살 과 같은 행을 성취하리라.

<풀이>

아미타불의 아미타를 번역하면 무량수 혹은 무량광이라 한다. 한량없는 목숨은 곧 영원한 생명을, 한량없는 광명은 무한한 빛을 말이다. 이는 부처님의 참 몸인 법신을 생명의 실상으로 보고 그 속에 무한한 광명이 충만 되어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중생을 무명중생이라 하지만 그것은 구름 낀 하늘이 구름 때문에 햇빛이 안 비치는 것일 뿐, 햇빛이 본래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중생이 무명의 업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본래는 무량수 무량광의 공덕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고 죽는 육체의 생사는 구름이 오가는 것일 뿐, 하늘은 오가지도 않으며 생멸을 떠나 있다. 하늘 자체 곧 허공 자체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으로 ‘생멸 인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서산 스님의 시에 나오는 말로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나이가 있고, 산천초목까지도 나이가 있다. 나이는 연륜을 포갠 햇수이다. 시간을 경과한 길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이를 먹음은 시간을 재는 것으로, 하늘을 두고는 시간을 재지 못하는 법이며, 똑같이 마음을 두고도 시간을 재지 못한다. 따라서 하늘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 마음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연꽃 속에 태어난다는 말은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다. 부처님 세계의 장엄을 대표하는 것이 연꽃이다. 정토를 상징하는 꽃으로 청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표현되는 말의 뜻처럼 더러운 곳에 있어도 더러움이 묻지 않는 본래 청정을 나타낸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불성으로 보며, 이 불성이 계발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을 확인 받고 보장 받는 것을 ‘수기’(授記)라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이 수기를 받으면, 그는 곧 미래불이 되는 것이다. ‘내가 부처가 되어 온 세상에 수많은 화신의 몸을 나타내어 일체중생들을 모두 이익을 얻게 하겠다’는 보현행원을 능가할 선의지의 말이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즉, 이타정신의 극치를 표현하였다.《화엄경》에 는 인간의 극진한 도덕 정신을 곳곳에서 나타내고 있다. 삼현(三賢)이라 부르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품이나 십지(十地)품 등에 설해진 내용은 거의가 이타행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화엄경》을 ‘인류 최고의 윤리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보현 정신이 바로 최고의 윤리 정신이요, 도덕 정신이다. 모든 생명이 동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동체대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현 정신이므로, 보현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막이다. 그리고 생명의 세계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지론이 ‘비’(悲)의 윤리이다. 생명의 공간을 파괴하지 말라는 지엄한 당부를 우리는 늘 부처님으로부터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구촌은 일시적인 탐욕에 눈이 어두워 생명 공간을 스스럼없이 파괴하고 있다. 사실 이는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는 어리석은 짓임에도 근본적인 각성을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보현행원은 중생세계를 보호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환경을 이상적으로 가꾸어 가자는 의지를 싣고 있다. 이 의지가 공동의 합심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보현의 원왕이 너와 나의 가슴속에 자리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