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스님─ 분별을 초월하고 시공을 초월해야

◆분별을 초월하고 시공을 초월해야◆ –

지관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통도사는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있는 불보사찰이며 해마다 화엄산림을 한 달간에 걸쳐 봉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통도사 도량에는 팔만사천 화엄신장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은 참으로 존경해야 하고, 모셔야 되고, 알아야 할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간 설법하셨는데

팔만대장경이란 방대한 경전 중 화엄경은

가장 진리가 심오하고 또 양도 가장 많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화엄경의 이치를

설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할 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화엄경의 뜻만

조금 안다 해도 불교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경전이라 화엄산림기간동안 하루 1시간씩

한 달 동안 해도 80권의 뜻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엄법회라고 해서 환희심이 난

화엄신장님과 부처님이 옹호하는 법회를 열어서

많은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달하고

경을 존경하고,

경에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하면 우리의 업장이 녹아지고,

또 공덕이 생겨 복을 받으며 원하는 바가

성취가 되기 때문에 화엄법회가 참 소중한 겁니다.

바닷물이라 하는 게 손가락으로

한 번 딱 찍어 먹어보면 바닷물인줄 알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화엄법회를 하게 되면

화엄경의 뜻을 다 알기보다도 사실은

화엄경 한 품이나 일부만 들어도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념보관삼세사(一念普觀三世事)하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전생을 과거,

금생을 현재,

내생을 미래라 하지만

금생에서도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내일은 미래입니다.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는 법이고,

오늘 있기 때문에 어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드시 삼세(三世)가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일념으로 생각을 잘 가다듬어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을 관해보니까

과거가 지나간 것도 없고,

미래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현재 이 시간도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 범부들 생각은

그 시간이라는 것이 전후가 있는데

전후가 있는 것은 중생의 분별심입니다.

그러나 분별이 없는 부처님이나 큰 선지식,

보살의 경지에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어.

그래서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지나간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합니다.

화엄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도리를 설해놓은 경입니다.

화엄경은 상설변설(常說?說)입니다.

화엄경은 항상 설하고, 늘 설하지.

무슨 한 달 동안만 설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본래 화엄경의 이치를

바로 듣고,바로 설한다면

입으로 설하는 게 아니고,

귀로 듣는 게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상설(常說)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화엄경은 계속 설해지고 있고,

또 공간적으로도 변설 입니다.

두루 변?자입니다.

어디 설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량국사가 화엄경을 주석하면서

서문을 지었는데

그 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불기수왕(不起樹王)하고

나칠처어법계(羅七處於法界)라.’

보리수 밑에서 선정 중에 화엄경을 설했기 때문에

보리수에서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서

칠처구회(七處九會)를

온 법계에 망라해 다 설했다는 말입니다.

칠처구회는 화엄경 설한 장소가

일곱 곳이 있다는 말인데

인간에서 4군데,

천상에서 3군데.

그러니까 보리수 거기 앉아서 그만 온 지구를 다 다니고,

도리천에 올라가 설하고,

야마천에 가 설하고,

도솔천에 설하고,

천상에 갔다가 왔다가 했다는 뜻입니다.

육신(肉身)은 유한(有限)이기 때문에

여기서 저리가면 여기는 없고,

저기서 여기로 오면 저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 우리 마음을 일러 말한

법계(法界), 법신(法身)은 청정하여 광대무변합니다.

청정하고, 모양이 없고,

형체가 없기 때문에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공간이 법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게 허공이지만

허공보다 더 큰 게 뭐냐하면 마음입니다.

마음의 보따리를 가지고 허공까지 다 싸는데

허공은 마음을 다 살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큰 지 깨치면 알지만

깨치기 전에도 앉아서 생각해보세요.

지금 각각 자기 집 부엌에 깨소금이 어디 있고,

참기름이 어디 있고,

쌀은 어디 있고 환하지요?

몸이 안 가도 우리 생각은 전부를 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은 끝이 없고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깨달으면 법신을 깨닫는 것이고,

법신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 법문이 끝나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화엄경의 본처에서 본다면 이것이

시작하기 전이나 후나 7일전이나 한달 후나

화엄경의 이치는 항상 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늘 설하고

공간적으로 설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화엄경의 진리를 설한 게 아니라

진리는 영원히 본래 있으니

법신상주(法身常住)라는 것,

법계(法界)라는 겁니다.

그 법은 흘러가는 물소리도 법문소리요,

바람소리도 법문소리요,

새 우는 소리도 법문소리,

꽃도 법문을 설합니다.

조사스님 말씀에 뭐라 했느냐 하면

‘명명조사의(明明祖師意)’라.

하나하나 모든 나무나 풀 그 자리에

부처님이나 조사의 뜻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만이 부처님을 알고

중생만이 중생을 안다는 뜻이요,

전체가 부처님의 법신으로 볼 때는

우주공간 전체가 설법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은

저 등롱(등불을 덮는 덮개)이 설법하고

기왓장이 설법하고 기둥이 설법한다 했는데

이것이 무정설법9無情說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릅니다.

자기 기준에만 맞추어 사바세계는 말로,

귀로 들어야 알지 듣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세계,

극락세계도 말하지 않고 알아듣습니다.

바람만 슬 불어도 그 바람소리가 다 그만

아미타부처님의 법문소리입니다.

그만 척 삼매를 증득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업이 많아 잘 안됩니다.

안되기 때문에 참회를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화엄경을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이 경에 대한 공덕이 한량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이 경을 서사(書寫)하려고

종이에 먹을 갈아 서사하려는데 그만

그 종이에서 오색광명이 놓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을 쓰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화엄성중이 좋아하고, 부처님이 좋아해서

그 종이에 오색광명이 놓아지니

환희심이 나고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옛날에는 사경하고 목판했다가

현재는 전자입력으로 하니 편리하지만 신심이 없어졌습니다.

종교인은 편리하게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을 배우는데

내 마음이 편안한 것을 첫째로 배워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몸도 편안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행복하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는데 아무리 재산이 많은들

그게 큰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됩니다.

화엄경이란

경전에 있는 것만 부처님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눈앞에 다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게 진리냐 하면 한마디로 조심하는 것입니다.

조심을 해야 불행이 다가오지 않고,

조심을 해야 불행을 물리칠 수 있고,

조심을 해야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조심 아닌 게 방심입니다.

우선 몸을 조심해야 됩니다.

몸조심하는 게 뭐냐 하면

천수경에 있는

살생중죄, 투도중죄, 사음중죄,

이것 안 하는 게 몸조심하는 것입니다.

입을 조심해야 됩니다.

자물쇠로 꼭 잠가놓고 필요할 때만 열어야 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쓸데없는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면 남 흉보는 말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뜻조심,

마음조심입니다.

마음조심이 뭐냐 하면 탐진치(貪瞋癡)를 조심하는 겁니다.

탐심(貪心)을 내면 안됩니다.

원력(願力)과 貪心은 다릅니다.

원력은 정당하게 이루고자 하는

수행이나 기도하는 것이지만

목표를 위해 남을 밟고 디디고 하면

목표를 이루어 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천수경에 탐애중죄(貪愛重罪)라고 있잖습니까?

또, 진에중죄(瞋에重罪)가 있습니다.

진심(瞋心)도 한 번 낼 것을 반만 내고

점점 줄여 가야합니다.

화엄경을 거꾸로 읽어 보았자 남 흉이나 보고,

진심이나 내고, 게을러빠진 사람이

화엄경을 이고 다니면 뭘 하겠습니까?

진심은 참 나쁜 것입니다.

진심은 마음속의 불입니다.

진심이 나도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아야 됩니다.

어찌 이 세상의 본질이 고통인데

뜻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은 나의 과거 업의 소치인 줄 알고,

업을 참회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행복이 오지,

자기가 해놓은 것은 책임 안 지고,

왜 나는 이런가 원망만 가지면 안 됩니다.

진심(嗔心)은 공덕의 숲을 다 태우고 말기 때문에

진심(嗔心)을 인욕해야 복이 되고,

공덕이 되고 기도한 걸 그대로 받습니다.

‘欲行菩薩道’라.

누구든지 보살도를 행하라.

인격이 점점 향상하는 게 보살도입니다.

인욕해가지고 자기의 진심(瞋心)을 늘 잘 지켜라.

이게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입을 조심하고,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심하는 게 기도요,

조심하는 게 복짓는 것,

조심하는 게 남에게 존경받는 것이고,

조심하는 게 행복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통도사는 자장율사스님이 창건을 했습니다.

자장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일주일동안 기도를 했는데

그때 머리가 흰 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의 지절사리와 정골사리,

부처님가사 등을 주면서 법문을 해줬는데

이 법문은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게송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범어로

‘발라크자나 방리타가야 낭가효사남 칫타노사나’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 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則見盧舍那

일체법을 깨닫고 나면 자성이 공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지절 ? 정골사리 ? 가사는

부처님의 사상이 아니고 분상처럼 성보입니다.

사상을 뭘로 전했나 하면 화엄사상입니다.

자장스님이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님에게 받은 게송이

화엄경에 있는 게송이기 때문에

통도사에서는 화엄산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불자여러분,

일념으로 기도하십시오.

금생에 잘 닦아 기도, 염불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줘서

극락이나 천상에 나기를 기원합니다.

원철스님─한낮에 등불을 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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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등불을 든 까닭은

-원철스님-

사내(寺內) 통신망에는 평택 천안함 빈소의 조계종단 문상 소식과 송광사 법정 스님의 사십구재 과정을 머리기사로 나란히 띄워 놓았다.

더불어 며칠 동안 초겨울에 어울릴 것 같은 사나운 봄비가 연방 내렸다.

차 한 잔을 들고서 연구실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니 조계사 일주문 앞에는 예년처럼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등(燈)을 조심조심 내걸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가라앉아 있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제 때깔이 나지 않는다.

극락전 앞에 가신 이들을 위해 달아놓은 하얀 영가등과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에 높이 걸린 형형색색의 다섯 가지 오방색 등이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복잡한 현재의 우리들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었다.

등이야 해마다 같은 등이지만 바라보는 이의 느낌은 시절의 형편따라 달라보이기 마련이다.

그동안 많은 등을 보고 듣고 또 만났다.

그래서 등은 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다.

남포등 이야기는 불일암 후박나무 밑에 잠든 법정 스님의글에 나온다.

남포는 램프를 동아시아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 등을 굳이 ‘호야등’이라고 표현했다.

이 한마디 단어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이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스님은 해인사 시절, 밤새 등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경전을 번역했고, 또 윤문하는 일까지 돕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큰절에서는 밤 아홉 시만 되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그때 이미 ‘큰그릇임’을 알아본 산중 어른인 자운(慈雲·1911~1992) 대율사의 배려로 밤새도록 불을 밝힐 수 있었다.“아궁이에 군불이 타는 동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램프의 등피를 닦아 둔다.” 등피인 유리를 닦으며 마음을 함께 닦았을 것이고, 기름을 채우면서 젊은 날 괴팍했던 당신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었던 그 어른을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남포등은 당신에겐 추억의 등이었다.

얼마 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만난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신사의 삼천등(三千燈)은 소원의 등이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가장 큰 건물로 이름 높은 도다이지(東大寺)와 사이좋게 권역을 함께하고 있었다.

입구부터 본당까지 참배로에는 석등 2000여 기가 일렬로 섰고, 또 회랑에는 크기가 만만찮은 구리로 만든 등 1000여 개가 줄을 지어 처마에 매달려 있다.

이끼 낀 석등과 푸른 녹이 슨 구리등은 오랜 연륜을 과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사이사이에 방금 만든 듯한 새 등도 함께 끼여 있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말없이 증명했다.

1년에 두 번, 밤에 일제히 불을 켜는데 그때를 제대로 맞추어 오면 수많은 등불이 온 세상을 밝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등불축제 기간에는 등을 시주한 후손들이 불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비는 내용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전통이 오랜 세월 면면이 이어진 원당(願堂)이었다.소설처럼 아름다운 등불 이야기도 들었다.

작은 방석 한 개를 갖고도 절반씩 나누어 같이 앉을 만큼 ‘절친’ 관계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여든 살 중반의 두 노장님이 주인공이었다.

그 옛날 젊다는 호기만을 믿고 무리하게 길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심심산골의 암자는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이미 산 언저리에서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만 것이다.

한참을 헤맨 후 칠흑 속에서 저 멀리 가물가물 비치는 창호문의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터라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불빛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얼마 후 멀리서 등불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인기척을 내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얼굴을 마주한 후 오늘까지 수행길을 함께해 온 둘도 없는 벗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등은 ‘만남의 등’이라고 할 것이다.등은 예나 지금이나 한밤중에 들어야 제격이다.

깜깜한 산길이라면 더욱 빛날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대왕과 또 다른 의미에서 단짝이었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낮에 등불 들기를 즐겼다.

온 시내를 쏘다니면서 입으로 연방 “어둡구나! 어둡구나!”를 외치며 천천히 걷곤 했다.

안근(眼根·눈) 없는 그에게 곁을 지나가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유를 물었다.“혹여 남들이 나를 보고서 부딪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돌아온 답변이 참으로 절창(絶唱)이다.

오히려 눈뜬 이를 위한 ‘배려의 등’이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듯이, 한낮에 등을 든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세계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훈계하려는 선지식의 대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정말 어두운 줄조차 모르는 내면의 마음세계도 함께 비춰보라는 자비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는 추억·소원·인연·배려의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서해에서 산화한 46인을 위한 ‘호국의 등’ 구역도 있어야겠다.

‘연등불’이란 우아한 이름을 가진 낭자가 진흙길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모두 덮어버리듯이, 연등빛으로 마음의 어둠까지 환히 밝혀야겠다.

그리하여 그간의 우울함을 훌훌 털고 눈부시게 빛나는 오월맞이를 해야겠다.

그리고 디오게네스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해도 좋을 것이다.

자등명(自燈明)하라자기를 등불로 삼을지어다.

성담스님─감사와 보답은 당신의 마음을 쉬게 합니다

감사와 보답은 당신의 마음을 쉬게 합니다

-성담스님-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자신이 분별하고, 자신이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오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고 다닌다면 당연히 화가 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면 온종일 억울함이나 분노 때문에 자기 일도 못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여 험담하는 것은 나쁘다’ 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이 나쁘게 보고 그것에 집착한 결과로 얻은 것이 고통인데 보통은 험담하고 다닌 그 사람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예에서 ‘오해하여 험담하는 것은 나쁘다’ 하는 식으로 마음으로 지어내는 것을 분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마음의 능력이 없었다면 비행기를 만들거나 컴퓨터를 개발하는 등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창조력의 기초가 되는 매우 소중한 능력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분별해 놓고 그것에 집착하면 위와 같이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 덕분에 존재함을 깨닫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보답하고자 하면 삶이 완전히 변화 합니다.

모든 것에게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사람에게는 상대가 파리든 모기든 못된 놈이든 잘난 놈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분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욕을 먹든 몸이 아프든 모든 것이 감사할 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매이고 집착할 것이 없어 고통이 사라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삶이 단순하고 쉬워지며 고통과 불안으로 힘이 낭비되는 일이 없어 목표를 성취하는데 더 큰 힘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