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본스님─망상을 일으키지 말라(莫妄想) !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莫妄想) ! ■ 성본 스님 선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참선도량을 찾아가면 사찰의 일주문이나 해탈문 기둥에 다음과 같은 경책의 글귀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지혜)를 없애도록 하라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말은 『전등록』 제9권에 전하고 있는 평전보안(平田普岸)선사의 설법인데, 대혜종고의 『서장』이나 서산의 『선가구감』 등, 선승들의 법문에 많이 인용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일주문이나 해탈문의 기둥에 이 말을 새겨서 걸어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이 문(門)을 대개 사찰에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선수행을 하는 사찰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선수행의 도량은 각자의 청정한 본래심을 자각하여 깨달음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안선사의 설법은 그러한 현상적인 선원이나 사찰을 염두에 두고 한 설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안선사가 말하는 이 문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집으로 되돌아 가는 깨달음의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각자 본래심의 깨달음 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알음알이나 사량 분별심이 없도록 하라!는 법문이다.

사실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사량 분별심이 없어진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돈오요문』에서 有를 생각하고 無를 생각하는 것을 삿된 妄念(알음알이)이라고 하며, 有無를 함께 생각하지 않는 것을 正念(一念)이라고 정의 하면서, 나아가 善惡, 苦樂, 生滅, 取捨, 怨親, 僧愛 등의 일체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는 것을 正念이라고 하며, 정념이란 보리심을 말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좌선의』에서도 「正念 分明」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념은 일념으로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우리들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거나 염불수행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思念하는 것이나, 일상생활의 직업에서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위한 창의적인 사유 작용은 모두 본래심의 지혜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의 본래심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참된 자아와 불성을 깨닫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일상생활 모두를 지혜롭고 창조적인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알음알이(知解)는 머리만 굴리고 五官의 판단으로 인식하여 善惡이나 美醜를 取捨 선택하고 간택하는 차별심이 일어나 자신을 괴로움의 갈등에 빠뜨리게 하고 있기 때문에 선에서는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 혹은 망상을 피우지 말라! 라고 단호하게 경책하고 있다.

妄念은 각자의 본래심을 상실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이것 저것 사량분별하고 자신을 망각하고 방황하게 하는 번뇌속의 살림살이가 된다.

번뇌망념에 떨어지면 본래심이 주인이 되어 지금 여기서 자신의 귀중한 인생의 할 일을 지혜롭게 할 수가 없게 된다.

자기 주체를 상실하게 되니까 자기 상실, 자기 不在의 삶이 되고 만다.

『전등록』에 「잠시라도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순간 순간의 자기 인생을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지혜롭고 창조적인 삶이 만들어 지지 못하게 되고,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는 자기 향상이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쓸데 없는 번뇌 망상으로 자신의 주체를 상실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苦海에 빠뜨리며 자신을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오직 한번 밖에 없는 지극히 소중하고 값진 인생의 귀중한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하게 되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본래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번뇌 망상에 떨어지고 차별 분별심에서 헤매는 건성적인 삶은 순간 순간 자기 자신에게 충만하고 의미있는 인생을 엮어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언제나 한없는 자기 불만과 자신의 공허를 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선은 번뇌 망념에 떨어진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각자의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구체적인 수행이다.

『신심명』에 「지극한 道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되는 것이다.

」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않고, 사량 분별하지 않고, 차별심 일으키지 않으며 그대로가 본래심의 지혜로운 생활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참선은 단순히 머리로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연마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身心學道라고 하는데, 각자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 본래심의 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붓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연마하는 생활속의 수행인 것이다.

해안스님─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

마음은 정하여진 바 없다

해안스님

세상에 오고 가는 일이 다 인연이 있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게 되는 것도 속세(속世 : 前生의 세상)에 인연이 있어

금생에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일이나 만물이 아무 때나 무질서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날 인(因)과 연(緣)의 상대가 서로 결합하여 나고 변화하는 질서를 말하는

뜻입니다.또 잘 살고 못 사는 현실이 다 속세로부터 연속되는 인과(因果)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 인과를 알고 인과의 주인공인 자기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잘 쓰는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근본과 현실의 원인을 깨달아 잘 살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마련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불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처의 본심을 알려고 하는 것이고, 부처의 본심이 곧 자기의 본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의 본심이 둘이 아닌 하니인 것입니다.

만물에는 상대의 근본이 둘이 아닌 하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파도치는 물의 그 모양은 여러 가지로 일어나지만 파도 속에 젖는

물의 성질이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만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모양 속에는 하나의 불성 자리가 있는것입니다.

이 불성 자리가 우주의 근본으로서 마음이니 불성이니 여러가지 대명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 언어 동작이나 만유(萬有)에는 이 불성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불성은 아주 멀리 크게 다 있을 뿐 아니라, 가깝게도 있기 때문에

또 대소 유무(大小有無)를 초월한 근본 자리이면서 일체 사물에 현현하게 나타나는 묘유(妙有)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일체 마음 그대로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삼대 거사(三大居士)의 한 사람인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는

[불법이 어렵고 어렵다.마치 아주까리 씨를 거꾸로 백천개를 올리는 것처럼

불법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때 방거사의 부인은 불법이 아주 쉽고도 쉽다고 하면서

[마치 일백초두(一百草頭)에 조사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일체 만유에 다 불법이 있는데 어려울 것이 무어냐고 했읍니다.

또 방거사의 딸은 [불법이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며 어렵고 쉬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그대로 일체가 불법이다] 했습니다.

한 생각이 나기 이전의 불성 자리는 유무의 상대가 없는 자리이면서

곧 한 생각을 일으켜 일체 상대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有)도 아나고 무(無)도 아닌 불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 불성이 용(用)으로 일어나는 것이 곧 불법입니다.

즉 체(體).용(用)을 바로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여 성불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고

다시 중생의 몸으로 화신(化身)하여 보살행을 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대소 유무의 모든 상대에 걸려 있는 병자(病者)로 비유하면

보살행은 일체 상대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행입니다.

불법은 한 물건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하고 한 마디의 설법도 한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청정한 불성 자리 즉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본 마음 자리에 입을 열어 말을 한들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며 도리어 불성 자리를 더럽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말 없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 즉 불성 자리는 본래 정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던 생각을 금방 취소할 수도 있고 유무의 상대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법을 했다고 정할 수도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

즉 아무도 설한 것이 없는 것이 불법이라고 정하는 것도 불법이 아닙니다.

묘허스님─천도재 왜 필요한가

천도재 왜 필요한가

-묘허스님-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러한 표현을 씁니다.

왜 돌아가는 것일까요? 돌아왔기 때문에 반드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生)은 사(死)의 근본이고, 사는 생의 근본입니다.

이렇게 돌아가고 나서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합니다.

중유를 경유해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중유에 머무는 동안, 선악간의 지은 업을 구별하고 가려내어서 미래생을 확정 짓게 됩니다.

극히 선한 자는 바로 극락으로 가고, 극히 악한 자는 바로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극선자도 존재하지 아니하고 극악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도 죄 안 지어본 사람 없고, 못 되고 악한 사람도 좋은 일 안 해본 사람 없습니다.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구석엔가 못된 면이 있고, 못되고 나쁜 사람이라고 멀리 했는데 그 사람에게도 착한 면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면으로는 복도 지어놓았고 악한 면으로는 죄도 지어 놓습니다.

선악간에 지은 업을 가려내어 미래 내생을 확정짓는 기간을 중유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중유 기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7×7, 49일이 걸립니다.

【 왜 49일인가 】 왜 49일이 걸리느냐? 우리는 일생동안 이 육체를 가지고 선과 악, 그리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 이 3종으로 한량없는 업을 짓습니다.

이때 항상 일곱 가지 기관을 움직이고 작용하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일곱 가지가 무엇이냐? 몸에는 다섯 가지 기관이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이 다섯 가지가 좋은 일도 저지르고, 나쁜 일도 저지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오관을 가만히 놔두면 좋은 일을 할 줄도 모르고, 나쁜 일을 지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을 움직이고 부리면서 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6 의식(意識)’, 즉 내 생각이 오관을 움직입니다.

눈에 가면 빛깔과 물질을 상대하고, 귀에 가면 소리, 코에 가면 냄새, 혀에 가면 맛, 몸에 가면 감촉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6 의식이 오관을 작용할 때에 염정(染淨: 깨끗하고 더러움, 좋고 나쁨)을 분별해서,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취하고 버리는 결정을 내려 업을 짓도록 하는 것이 있으니, 불교용어로는 ‘제7 말나식’입니다.

이렇게 7식 작용에 의해서 선·악·무기로 업을 지어 놓으면, 이 업이 ‘제8 아뢰야식’에 잠재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을 더듬어보면 기억이 되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중생들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7식이 작용하다가 그 작용이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7식 작용이 소멸되면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데, 제일 먼저 소멸되는 것이 여섯 번째의 의식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의식이 혼미해졌다가, 의식불명상태가 되었다가, 의식이 없어지면 죽었다고 합니다.

의식이 없어지니까 오관이 작용을 못하고, 오관이 작용을 못하니까 7식이 느낄 것이 없어져 소멸되는 것이고, 이것이 죽음입니다.

남는 것은 제8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업식입니다.

이 업식에 따라 숨 떨어지는 그날부터 7일까지는 눈으로 빛깔과 모양과 물질을 상대해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고, 8일부터 14일까지는 귀로 소리를 들어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고, 15일째부터 21일까지는 코로 냄새나 향기를 맡아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고, 22일째부터 28일까지는 혀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고, 29일째부터 35일까지 몸으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습니다.

36일째부터 42일째 되는 날에는 의식작용으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결정짓고, 이후 49일째 되는 날까지는 제7 말라식 작용에 의해 일생 동안 지은 선업·악업·무기업이 얼마나 되는가를 딱 가려내어서, 그 업에 따라서 미래생을 확정짓습니다.

육체를 끌고 다니던 영체가, 그 육체가 지은 업을 가지고 육체 없이 과보를 받는 기간이 49일이 되는 것입니다.

【 49재는 왜 필요한가 】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가 49재라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49재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들은 생전에 일곱 가지 식의 작용으로 알게 모르게 지은 업이 많습니다.

그 업에 따라 내생이 결정됩니다.

결정되기 전에 되돌이킬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정성을 다한 49재이고, 온 마음으로 지내는 천도재입니다.

수행이 깊고 진리에 밝은 스님들을 청해서 부모님이 생전에 지은 악업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길입니다.

그러면 49일만 되면 모든 영가가 윤회전생을 하고 없는데,왜 칠월 백중(우란분절) 때마다 천도재를 지내는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 조상님들이 영혼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조상님들이 많은 복을 지었으면 삼계 28천 천상에 가서 태어나게 됩니다.

천도재를 지내게 되면 선업은 다시 한 번 7일마다 일깨워서 증명을 하고,또 나쁜 업은 7일마다 하나하나 닦아줌으로써 나쁜 업장이 닦아져 소멸되고 천상락을 더 오래 받고 복력이 수승하게 됩니다.

또 우리 조상님들 가운데 삼악도(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진 분이 한 분도 없다고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은 업에 의해 나쁜 곳에 떨어졌을 때, 천도재를 지내면서 7일마다 하나씩 하나씩 닦아주면 업장이 소멸되어 다시 좋은 세상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 조상님들이 천상에 태어날 만큼 복락이 수승하지 못하고, 축생에 떨어질 만큼 업이 중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태어날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인간 세상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때에는 인연이 중한 중생을 통해서 몸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 조상님과 인연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후손 아닙니까? 바로 그 후손들입니다.

우리 부모 조상들은 우리를 의지해서 우리 자손으로 옵니다.

부모님과 조상님들은 우리를 의지해서 우리 자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불교를 깊이 공부하다 보면 조상은 우리의 전생이고, 우리는 조상의 후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도재를 모시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조상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보은 불사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의 전생 업을 닦는 것입니다.

천도재를 잘 모시면 안 되던 일이 잘 풀리고 어렵던 일이 쉬워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 이유는 바로 천도재를 지낸 조상이 바로 전생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몸을 바꿀 때 인연 있는 중생을 의지해 몸을 바꾸려고 하지만, 낳아줄 사람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산을 했거나, 산아제한 등을 하면 낳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태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알 수 없는 생면부지, 모르는 집에 가서 태어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태어나도 결국엔 인연관계로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 조상님이 남의 집 딸로 가서 있다가 며느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남의 집 아들로 있다가 사위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모실 때에는 결혼을 한 사람들은 양쪽 집 조상을 다함께 모셔야 해요.

아들딸이 결혼했으면 그쪽 집 사돈까지 다 해주어야 합니다.

【 백중의 진정한 의미 】 음력 7월 15일 백중은 우란분입니다.

우란분은 한문으로 번역하면 구도현(求倒懸)입니다.

팔만사천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려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영혼들을 다 구해서 제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날입니다.

왜 7월 보름날이 구도현이냐 하면, 부처님 당시에 목련 존자가 안거를 마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재식을 베푼 공덕으로, 팔만사천 지옥 중에도 그 무서운 아비지옥에 떨어졌던 어머니를 구제하고 제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또 7월 보름날은 여름 석 달 우기를 피해서 한 곳에 모여서 스님들이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해제한 날이기도 합니다.

지옥에 있던 모든 중생들이 함께 제도받기 위해서 지옥문이 열리는 날이 7월 보름날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우리 조상님들이, 7식 작용에 의해 지은 업장을 하나하나 닦아서 구제받게 하는 것이 백중을 맞이해서 봉행하고 베푸는 천도재입니다.

백중을 기하여 한량없이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해탈하기를 기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 묘허(妙虛) 스님 _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한산당 화엄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 하였다.

1965년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성암 강백 밑에서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했다.

보광선원 수선안거 이래 23안거를 성만하였으며, 현재 대전 신흥사, 김해 원명사, 단양 방곡사 회주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