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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등불을 든 까닭은
-원철스님-
사내(寺內) 통신망에는 평택 천안함 빈소의 조계종단 문상 소식과 송광사 법정 스님의 사십구재 과정을 머리기사로 나란히 띄워 놓았다.
더불어 며칠 동안 초겨울에 어울릴 것 같은 사나운 봄비가 연방 내렸다.
차 한 잔을 들고서 연구실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니 조계사 일주문 앞에는 예년처럼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등(燈)을 조심조심 내걸고 있었다.
오가는 길손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가라앉아 있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제 때깔이 나지 않는다.
극락전 앞에 가신 이들을 위해 달아놓은 하얀 영가등과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에 높이 걸린 형형색색의 다섯 가지 오방색 등이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복잡한 현재의 우리들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었다.
등이야 해마다 같은 등이지만 바라보는 이의 느낌은 시절의 형편따라 달라보이기 마련이다.
그동안 많은 등을 보고 듣고 또 만났다.
그래서 등은 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다.
남포등 이야기는 불일암 후박나무 밑에 잠든 법정 스님의글에 나온다.
남포는 램프를 동아시아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 등을 굳이 ‘호야등’이라고 표현했다.
이 한마디 단어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이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스님은 해인사 시절, 밤새 등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경전을 번역했고, 또 윤문하는 일까지 돕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큰절에서는 밤 아홉 시만 되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그때 이미 ‘큰그릇임’을 알아본 산중 어른인 자운(慈雲·1911~1992) 대율사의 배려로 밤새도록 불을 밝힐 수 있었다.“아궁이에 군불이 타는 동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램프의 등피를 닦아 둔다.” 등피인 유리를 닦으며 마음을 함께 닦았을 것이고, 기름을 채우면서 젊은 날 괴팍했던 당신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었던 그 어른을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남포등은 당신에겐 추억의 등이었다.
얼마 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만난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신사의 삼천등(三千燈)은 소원의 등이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가장 큰 건물로 이름 높은 도다이지(東大寺)와 사이좋게 권역을 함께하고 있었다.
입구부터 본당까지 참배로에는 석등 2000여 기가 일렬로 섰고, 또 회랑에는 크기가 만만찮은 구리로 만든 등 1000여 개가 줄을 지어 처마에 매달려 있다.
이끼 낀 석등과 푸른 녹이 슨 구리등은 오랜 연륜을 과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사이사이에 방금 만든 듯한 새 등도 함께 끼여 있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말없이 증명했다.
1년에 두 번, 밤에 일제히 불을 켜는데 그때를 제대로 맞추어 오면 수많은 등불이 온 세상을 밝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등불축제 기간에는 등을 시주한 후손들이 불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비는 내용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전통이 오랜 세월 면면이 이어진 원당(願堂)이었다.소설처럼 아름다운 등불 이야기도 들었다.
작은 방석 한 개를 갖고도 절반씩 나누어 같이 앉을 만큼 ‘절친’ 관계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여든 살 중반의 두 노장님이 주인공이었다.
그 옛날 젊다는 호기만을 믿고 무리하게 길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심심산골의 암자는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이미 산 언저리에서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만 것이다.
한참을 헤맨 후 칠흑 속에서 저 멀리 가물가물 비치는 창호문의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터라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불빛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얼마 후 멀리서 등불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인기척을 내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얼굴을 마주한 후 오늘까지 수행길을 함께해 온 둘도 없는 벗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등은 ‘만남의 등’이라고 할 것이다.등은 예나 지금이나 한밤중에 들어야 제격이다.
깜깜한 산길이라면 더욱 빛날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대왕과 또 다른 의미에서 단짝이었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낮에 등불 들기를 즐겼다.
온 시내를 쏘다니면서 입으로 연방 “어둡구나! 어둡구나!”를 외치며 천천히 걷곤 했다.
안근(眼根·눈) 없는 그에게 곁을 지나가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유를 물었다.“혹여 남들이 나를 보고서 부딪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돌아온 답변이 참으로 절창(絶唱)이다.
오히려 눈뜬 이를 위한 ‘배려의 등’이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듯이, 한낮에 등을 든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세계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훈계하려는 선지식의 대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정말 어두운 줄조차 모르는 내면의 마음세계도 함께 비춰보라는 자비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는 추억·소원·인연·배려의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서해에서 산화한 46인을 위한 ‘호국의 등’ 구역도 있어야겠다.
‘연등불’이란 우아한 이름을 가진 낭자가 진흙길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모두 덮어버리듯이, 연등빛으로 마음의 어둠까지 환히 밝혀야겠다.
그리하여 그간의 우울함을 훌훌 털고 눈부시게 빛나는 오월맞이를 해야겠다.
그리고 디오게네스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해도 좋을 것이다.
자등명(自燈明)하라자기를 등불로 삼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