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스님─지혜로운 신앙생활

지혜로운 신앙생활

-보각스님-

잘못인 줄 알면 바꿀 줄 아는 것이 지혜 있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습(習)에 젖어 있는 그대로 해가며 바꾸지 아니하면 오직 어리석음만 지을 뿐입니다.

도토리 나무 아래 사자 한 마리가 누워서 낮잠을 잡니다.

그런데 도토리 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져 누워 있는 사자 콧잔등을 때렸습니다.

사자는 천지개벽으로 착각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좌우를 돌아보니 변한것은 하나 없는데 자기 머리맡에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니 화가 나 도토리 나무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도토리 나무 아래 있었던 자기에게 탓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도토리 나무에게 맞아서 잠이 깼으니 도토리 나무에게 이놈 두고 보자 하고 악심을 품고 있는데, 그때 마침 목수 한 사람이 수레를 만들기 위해서 톱을 들고 산에 올라오자 목수한테 사자가 수레를 만드는 재목으로는 도토리 나무가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수가 도토리 나무를 톱을 들고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도토리 나무가 생각하니까 사자가 내 밑에 와서 자다가 괜히 날 죽이는 것으로 생각하며 원한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목수에게 수레바퀴를 묶는 가죽으로는 사자 가죽이 제일이라고 말하죠.

그러자 목수가 사자를 죽여서 그 가죽으로 수레바퀴를 묶는 가죽을 만들었습니다.

어리석음과 욕심으로 결국 죽고야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원한은 원한으로 그치지 않나니 원한은 참음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가 되느니라”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 테러전쟁으로 인해서 서로 원한과 증오가 오가지만, 원한을 가지고 싸움을 일으키면 그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일으키게 됩니다.

오직 인욕으로서 그 원한을 그치지 아니하면 중생세계는 끝없는 원망과 한만이 유산으로 물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나큰 마음으로 포용하고 자기 원한을 잡는 것으로 극복해야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화합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를 깨닫는 4가지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신심으로 믿을 것이요, 둘째는 배워서 해석할 것이요, 셋째는 실천에 옳길 것이요, 그리고 나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비라 일컫는데 그 자비를 실천에 옮기지 아니하면 무자비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악을 짓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을 꾸준히 행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누가 제일 부자인가? 만족을 하는 것이 제일가는 부자이며 욕심을 버리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옛 조사경에 보면 “내가 만약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 있다면 고통이 따를 것이고 욕심으로 구하지 않으면 모든게 즐겁고 행복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서산대사께서 선가귀감에서 이르시길 “천 칸의 집에 살아도 잠을 자는 데에는 방 한 칸이면 족하고 만석의 재산을 지닌 자도 하루에 쌀 한 말이면 양식이 족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원력은 크게 가지되 욕심은 적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원력이란 내가 애써 노력하여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게 원력이라 말할수 있지만 욕심이란 나나 내 가족만을 위해서 애쓰는 것을 욕심이라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구하는 이기적인 맘은 버려야 하지만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이타적인 맘은 많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원력도 크게 가지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도 적고 욕심도 적어서 고통과 번민이 따로 없으므로 적은 욕심은 선한 공덕을 쌓는데 근본이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가지는 것의 의미가 나를 위해서 갖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베풀고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 가지는 것에 의미를 둡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갖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절약해서 널리 베풀고 나누어주는 맘을 갖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일입니다.

달마스님이 지은 혈맥론에 불자가 가져야할 네 가지 마음 중에 그 첫 번 째가 보은행이라 하였습니다.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내가 인을 짓고 과보를 받는다는 생각을 가져서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맘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나쁜 업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이미 지은 업은 받아서 없애고 다시 악업을 짓지 않아서 바른 업을 짓는게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부지런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짓고 애써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지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지어 널리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어리석은 마음을 짓지 아니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계발하여 수승한 수행공덕으로 성불의 씨앗들을 가꿔 나가야 할 것입니다.

월호스님─ 윤회 _ 해탈한 이의 삶은 흔적 없는 ‘완전 연소’

***윤회 / 해탈한 이의 삶은 흔적 없는 ‘완전 연소’ ***

월호스님

삼세 중 어디든 집착 한다면 찌꺼기 남듯 윤회 굴레 매여 불교라고 하면, 먼저 ‘윤회’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불교는 윤회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 이해에 불과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불교는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죽은 사람의 해골만 보고도, 그 사람이 살아생전 무슨 직업에 종사했는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으며, 다음 생에는 어디에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말 그대로 족집게였다.

어떠한 해골을 갖다 대어도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해골 앞에서 그는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도저히 알아맞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탈한 이는 살아서는 물론, 죽은 이후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자면, ‘완전 연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 연소하게 되면 찌꺼기가 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음 생을 받지도 않는다.

윤회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불완전 연소’하는 삶은 찌꺼기가 남는다.

화력은 시원치 않으면서 연기만 풀풀 나온다.

눈물, 콧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심지어 죽은 이후의 해골에도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다.

그래서 다음 생을 받게 된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이다.

결국 윤회는 불완전 연소하는 삶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어딘가에 머물거나 무언가에 애착한다면, 윤회하게 된다.

몸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자신의 깜냥에 맞는 몸을 만난다고 보면 될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을 ‘옷 갈아 입는다’고 표현한다.

부인이 넷이나 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알게 된 그는 첫째로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부인에게 죽음에의 동행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상심한 그는 두 번째로 정을 나누던 부인에게 부탁했지만, 그녀 역시 ‘당신이 가장 아껴주던 부인도 안 가는데, 내가 왜 갑니까?’하고는 야멸차게 거절하였다.

세 번째로 아끼던 부인 또한, “성 밖까지는 전송하지요”하고는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평상시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던 네 번째 부인에게 요청하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아끼던 부인은 몸뚱이를 말한다.

사람마다 제 몸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부인 이상이지만 죽을 때에 몸은 땅에 누워 따라나서려 아니한다.

둘째 부인은 재물이다.

죽을 때 재물은 세상에 남아 따라나서려 아니한다.

셋째 부인은 일가족과 친구 등이다.

살아있을 때는 서로 친근하지만 죽고 나면 성 밖 무덤까지 따라왔다가는 되돌아간다.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이는 없다.

넷째 부인은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야말로 몸이 죽고 나서도 그대로 따라나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을까? 해탈이란, 풀 해(解), 벗어날 탈(脫), 즉 속박을 풀고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3조 승찬스님이 물었다.

“누가 그대를 묶은 일이 있는가?” 4조 도신스님이 대답하였다.

“아무도 묶은 이가 없습니다.” 3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그런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월호/쌍계사 강원 강사 -불교신문에서-

대행스님─바로 네가 걸음을 걷고 있다

바로 네가 걸음을 걷고 있다 – 대행 스님- 항상 내가 말하는 것은, 못났든 잘났든 바로 네가 걸음을 걷고 있다,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는다 이겁니다.

못 났든 잘 났든 자기만이 자기를 걷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이리로 가라고 하고 저리로 가게 하고 이럽니다.

그러니 그것을 둘 아니게 다잡아서 다스릴 수 있어야 하겠죠.

촛불이 켜져 있는데, 촛불 심지가 비뚤어졌다든가 한다면 심지가 비뚤어졌으니까 불도 비뚤어져 초가 한쪽 편으로만 타가지고 촛농이 줄줄 다 흘러내립니다.

심지가 너무 길어서 비뚤어졌다면 잘라버리고 똑바로 세워 놓으면 촛불이 양면으로 흐르지도 않고 곧고 밝게 잘 켜질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마음이 그렇게 비뚤어졌으면 다시 다스려서 바로 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초심지 다스리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소 고삐를 쥐고서 똑바로 다스려라 하는 뜻에서, 소가 남의 집 파밭이나 배추밭에 막 들어가서 짓밟으면 안되니까 고삐를 쥐고서 똑바로 길로 가거라 했던 거죠.

자기 고삐를 자기가 쥐고서 가는 거죠.

그래서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으로도 그려놓고 그랬던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살림을 윤택하게 잘 해나가려는 것도 그렇고 회사도 나라도 역시 그렇고, 어떠한 일을 하든지 다 그렇게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하는 겁니다.

전에 우리 신도 한 분이 남의 돈을 반이나 얻어 가지고 회사를 경영하는데 사장이 됐으니까 보란 듯 목이 뻣뻣하게 굳어졌단 말입니다.

또 사장이 되고 나니 외식도 하게 되고 외식을 하다 보니까 외식에 빠지는 수도 있고 하다 보니, 정신이 회사에 있는 게 아니라 사장이라는 이름에 매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회사가 뭐가 됩니까? 나중에는 회사가 몽땅 남의 손에 넘어가고도 식구들 사는 집까지 다 날렸습니다.

이런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스님네들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내가 해나가는 일에 자나 깨나 오직 정신을 거기다 두고서 삶의 보람을 자유스럽게 누리며 다른 사람도 돌봐주면서 나가야 되는 겁니다.

욕심이 과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또 세세생생에 버림을 받아서 오간지옥에 태어나서 국 냄새 밥 냄새도 못 맡고 벌레가 돼서 산다면 얼마나 치욕적인 문제입니까? 여러분들은 지옥이 따로 있지 않고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다고 하니까 그냥 생각으로만 알고 계시죠.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렇게 돌아갑니다.

살다가 금방 딴 모습을 가지고 나오는 수도 많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몸은 두고 가지만 업식은 가지고 간다 이겁니다, 한 치의 에누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