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후스님─불자의 사랑법

불자(佛子)의 사랑법

-도후스님-

이 세상에서 쓰이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 일 것이다.

꽃이 비록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천만송이의 장미꽃을 합친다 해도 사랑보다 아름답지는 못하다.

금강석이나 보석이 아름답다 해도 역시 사랑과는 비교할 바 못된다.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친구사이나 스승 제자간의 사랑이든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사랑은 모든 가치의 최우선이고 모든 아름다움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다.

사랑에는 하나의 율법이 있다.

끝없는 희생과 헌신과 봉사다.

진실한 사랑일수록 이 율법은 처절하리만큼 철저 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의 완결된 미학(美學)을 보게 된다.

물론 세상에는 가끔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볼상 사나운 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며칠전 신문의 사회면 은 바람난 남편이 이혼을 하게되자 위자료를 주지 않으려고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는 끔직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또 언젠가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정부(情夫)를 따라 도망간 비정(非情)한 어머니가 고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놓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덕성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사랑의 율법인 헌신과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완벽한 사랑, 세기적인 사랑을 꿈꾼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극적인 우여 곡절을 뛰어넘어 감동적인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현실의 그것은 늘 그렇지 못한 예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온 세상은 이같은 사랑의 실연자(失戀者) 로 가득하다.

누구나가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면서도 모두가 허망해하고 심지어는 그토록 소중했던 상대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너무나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헌신하기 보다는 지배하려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무한정 소유하려고만 하는데서 일은 그르쳐진다.

지배와 소유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고통이 되고 미움이 되는 것이다.

헌신과 희생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늘 즐거움을 가져온다.

지배와 소유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즐거움은 반드시 괴로움 을 가져온다.

원인은 여기에 있다.

사랑하려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소유하고 지배하는 일이 아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속에 들어있는 깊은 뿌리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뽑아내야 한다.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이타주의 (利他主義)를 심어야 한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탐욕은 가장 나쁜 병이고 애착은 가장 큰 슬픔이다.

이것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얻는다.” 집요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렇게 비워진 마음이라야 사랑의 법칙인 끝없는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부모에 대해서, 애인이나 자식에 대해서 무한정한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완벽해지지 않을 까닭이 없다.

행복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법장스님─깨달음을 향하여

깨달음을 향하여

법장스님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법문(法門)을 많이 들으라고 권하셨으니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가 부처님에 대하여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였다면 지옥이나 축생, 아귀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또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들은 남의 믿음이나 욕심, 남의 지식을 따르지 않고 남의 뜻을 취하거나 남의 생각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진실하게 보고 아는 지혜를 가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배워서 바른 견해로 스스로 다짐하고 노력하기를 부처님의 행적만을 따라가고, 부처님의 말씀만을 따라하고, 부처님의 마음만을 따라가야 하는데 오늘날 신도님들이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말씀을 배울 교육기관이 부족하므로 금번 본사에서 신도님들의 교육을 위한 불교대학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불교는 철학적(哲學的)인 내용이 기본으로 이루어진 교리가 많아서 무조건적으로 신앙심만을 가지고 이해할 수가 없고 철저히 과학적이고 이지적(理智的)이라 일정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그 기본정신과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불교역사에서 초기 교단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당시 대표적인 제자들이 거의 부처님보다 연장자로서 넓은 지역에서 존경받았던 종교인, 정치인 철학자였습니다.

이분들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의 출가집단을 지도하던 이교도의 지도자였으나 부처님을 뵌 후 부처님의 신통력과 자비하신 마음과 대상에 따라 방편으로 지도하시는 지혜로움과 논리 정연하신 이론, 막힘없으신 말씀에 감동을 받아 자신은 물론 가까이는 처자, 제자, 친지, 친척들을 비롯하여 이웃나라 사람까지 교화해서 함께 출가하거나 재가신도로서 부처님을 신봉하며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였습니다.

실로 불교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해 한 종교가 성립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교육, 수행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지난 사십여 년의 출가 생활을 조용히 돌이켜보면 처음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승가(僧伽)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좋아서 살 때보다 선지식을 만나서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더욱 구도심과 선심(善心)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저의 마음이 이러하니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일은 자신의 출가수행만을 기쁘게 생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만심과 아만심(我慢心)을 버리고 오직 정성으로 후학을 가르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시기를, “나는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徧知)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이다.

나는 괴로운 사람을 기쁘게 하며, 알지 못하는 사람을 알게 하며, 불안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중생들을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보고 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한다.

그대들은 다 나에게 와서 나의 설법을 들으라.

여래의 설법은 하나의 진리를 가르친다.

그것은 해탈 열반의 진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해탈과 열반에 궁극의 목적을 두고 수행을 하고자 원을 세웠다면 부처님 당시처럼 부처님의 설법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법을 설하는 것은 대지 위에 비를 내리는 것과 같고, 중생이 여래의 설법을 듣고 각자 자기에게 알맞은 길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은 비를 맞고 초목이 자라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시며 설법 듣는 중생을 세 종류의 약초로 구분하시어 비교하시니, “중생들이 나의 설법을 듣고, 자기의 역량을 따라서 기쁨과 만족을 구하되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이는 소약초요, 열반과 신통을 얻고 홀로 깊은 산 속에서 선정(禪定)을 닦는 이는 중약초요, 최고의 성불을 위해서 늘 정진하는 사람은 상약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여 하늘에서 고르게 내리는 비와 같거늘 중생의 근성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같지 않음이 같은 비를 맞고도 자라는 형태가 다른 초목과 같은 것이니 이왕이면 우리도 큰 나무같이 불도에 전심해서 신통으로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이 되어야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오늘 신심을 발해서 정법을 배우려고 입학하신 불자님들은 우선 부처님과 보살님의 지혜와 자비를 흠모하고 가르침을 굳게 믿어서 겨자씨만큼도 의심이 없어야 하며 한 구절의 법문을 더 듣기 위해서 나찰(羅刹 : 아귀)에게 몸을 던졌던 설산동자(雪山童子)와 같은 용맹심을 발휘하여 열심히 배우고 한편으로는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삼매(三昧)를 잘 닦아서 온갖 선행을 베풀어 중생을 제도하여야겠습니다.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원력이 자리이타 (自利利他 :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함.)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의 배움에 게을리하겠습니까? 오나가나 간절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고 자신의 죄업과 어리석음을 깨치고 낱낱이 실천에 옮기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이르시기를, “널리 듣는 것만으로 도를 사랑하면 도는 알기 어렵고 뜻을 지키어 도를 받들면 그 도는 크고 큰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수행인이 되고자 하면 널리 가르침을 듣고(聞) 그 가르침의 뜻을 사유하여(思) 가르침대로 실천할 때(修) 도를 이룰 수 있으니 이 문사수삼혜(聞思修三慧)의 방편을 잘 익혀야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입학생 여러분들께 특히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공부를 하시다가 모르는 내용이 있어도 오늘의 용기를 잃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팔만사천 경전의 내용이 다 내 마음속 경장(經藏)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하십시오.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에서도 부처님께서 “불자들아! 일심으로 들어라.

내가 불안 (佛眼: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일체 중생을 보건대 욕심, 성냄, 어리석음 등 여러 번외 가운데 여래의 지혜(如來智), 여래의 눈(如來眼), 여래의 몸(如來身)이 있어서 염연히 부동하니라.

일체 중생은 그 몸에 여러 번뇌가 있어도 여래장(如來藏)이 있어 항상 때 묻거나 물듦이 없고 덕상(德相)이 원만하게 갖추어 있어 나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의 발심(發心)이 부디 성불(成佛)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사바세계의 연꽃은 진흙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성불합시다.

능허스님─천수경은 관음신앙의 핵심

천수경은 관음신앙의 핵심

-능허스님-

부처님은 빛으로 오시지만 보살은 음성 즉 파장으로 우리 곁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큰 어려움이 있든 없든 간에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를 불러왔으며 우리들도 언제부턴가 무의식중에 되뇌곤 합니다.

그만큼 친숙한 신앙의 대상이며 또한 그만큼 가피를 입어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어느곳 어떤 상황이든 소리로서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가와 구호의 손길을 뻗어 고뇌로부터 건져주시는 분! {보왕경}에 이르시기를 “이 법계에 한 사람이라도 불행과 고뇌에 빠져있는한 나는 결코 열반의 문에 들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가장 가까이서 가장 친숙하게 정신을 모아 올리는 기도가 관음기도이며 의례히 읊조리는 경이 천수경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가장 흔히 읊조리는 이 경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알고 독경한다면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더욱 경건할 것이며 가피 또한 더욱 빠를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 경에서 마땅히 대자비심을 배우고 무상보리심을 배우며 보살도를 닦아 일체 중생을 구호하는 큰 지혜와 힘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경을 배우는 사람은 분명히 수승한 인연을 성취한 분이십니다.

이 경에서 부디 대비대원 무애위신력을 성취하시어 대보살로서 정법의 구현자가 되기를 발원합시다.

“盲龜遇木(맹구우목.

눈먼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남)”이라 했던가? 불법과 인연을 맺음이 얼마나 만나기 어렵고 소중한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귀한 시간을 만들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