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 해탈한 이의 삶은 흔적 없는 ‘완전 연소’ ***
월호스님
삼세 중 어디든 집착 한다면 찌꺼기 남듯 윤회 굴레 매여 불교라고 하면, 먼저 ‘윤회’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불교는 윤회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 이해에 불과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불교는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죽은 사람의 해골만 보고도, 그 사람이 살아생전 무슨 직업에 종사했는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으며, 다음 생에는 어디에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말 그대로 족집게였다.
어떠한 해골을 갖다 대어도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해골 앞에서 그는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도저히 알아맞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탈한 이는 살아서는 물론, 죽은 이후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자면, ‘완전 연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 연소하게 되면 찌꺼기가 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음 생을 받지도 않는다.
윤회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불완전 연소’하는 삶은 찌꺼기가 남는다.
화력은 시원치 않으면서 연기만 풀풀 나온다.
눈물, 콧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심지어 죽은 이후의 해골에도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다.
그래서 다음 생을 받게 된다.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이다.
결국 윤회는 불완전 연소하는 삶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어딘가에 머물거나 무언가에 애착한다면, 윤회하게 된다.
몸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자신의 깜냥에 맞는 몸을 만난다고 보면 될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을 ‘옷 갈아 입는다’고 표현한다.
부인이 넷이나 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알게 된 그는 첫째로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부인에게 죽음에의 동행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상심한 그는 두 번째로 정을 나누던 부인에게 부탁했지만, 그녀 역시 ‘당신이 가장 아껴주던 부인도 안 가는데, 내가 왜 갑니까?’하고는 야멸차게 거절하였다.
세 번째로 아끼던 부인 또한, “성 밖까지는 전송하지요”하고는 거절하였다.
마지막으로 평상시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던 네 번째 부인에게 요청하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아끼던 부인은 몸뚱이를 말한다.
사람마다 제 몸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부인 이상이지만 죽을 때에 몸은 땅에 누워 따라나서려 아니한다.
둘째 부인은 재물이다.
죽을 때 재물은 세상에 남아 따라나서려 아니한다.
셋째 부인은 일가족과 친구 등이다.
살아있을 때는 서로 친근하지만 죽고 나면 성 밖 무덤까지 따라왔다가는 되돌아간다.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이는 없다.
넷째 부인은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야말로 몸이 죽고 나서도 그대로 따라나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을까? 해탈이란, 풀 해(解), 벗어날 탈(脫), 즉 속박을 풀고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3조 승찬스님이 물었다.
“누가 그대를 묶은 일이 있는가?” 4조 도신스님이 대답하였다.
“아무도 묶은 이가 없습니다.” 3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그런데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월호/쌍계사 강원 강사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