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깨달음은 차고 더운 줄 아는 것 마음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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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차고 더운 줄 아는 것 마음 밑바닥서 보고 들어야 禪”

[7인 선사 초청 대법회]범어사 조실 지 유 스님

여러분은 무엇을 궁금해 합니까.

여러 스님들이 온갖 좋은 말씀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정하고 수행하며 공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잘 산다’, ‘못 산다’ 하는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릅니다.

잘 먹고, 재물을 갖고, 편안한 것을 잘산다 할 것이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불편한 자리에 거처하면 못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못산다는 개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뜻대로 안되고, 중병에 걸려도 잘사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도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살고 못산다는 기준이 뭡니까?

우리는 법회 때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라고 삼귀의례를

합니다.

양족(兩足)이란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구족했다는 뜻으로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구족하신 어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하며 ‘성불합시다’ 합니다.

그러면 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복이라 하고 갖추지 못하면 박복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가진 것이라고는 발우와 가사 한 벌 뿐이었습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지요.

그런 분을 우리는 복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복덕 구족한 어른

불안하고 불평스러워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부처님은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정신이 모자라는 바보는 아닌가? 이렇게 의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쳤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깨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럼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불합시다’, ‘부처님이 됩시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부처님하면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신통광명으로 범인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뛰어난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는 깨친 사람이란 뜻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궁금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궁금해 하냐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머리만 복잡해 질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골치를 해결하고자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마음의 편안과 의지처를 찾아 불교를 선택했는데 여러분은 더 불편하고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복잡한데 불교 공부까지 하라고 하니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머릿속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불문에 들어왔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크게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한 걸음씩 부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

니다.

지금은 ‘성불(成佛)’이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과거

부처님도 몇 생에 걸쳐 육바라밀을 닦고 수행을 다해 마침내 성불을

이뤘습니다.

‘범부인 내가 감히 성불이라니’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부처님도 그렇게 노력해왔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성불을 향해 가야 합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여여러분은 그러한 희망을 보고 계십니까?

깨달음으로 생사 문제 해결

무술을 배우면 한 달 전과 한 달 후가 틀리고 일 년 전과 일 년 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문에 들어와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좌선하는 모습이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남이 볼 때 저절로 존경심이 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것은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을 찾아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편하게 사느냐 편치 못하게 사느냐는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이 근본적인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 한 바라문을 만나 출가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한줄기 빛과 같은 실마리를 듣고 용기를 내 출가를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정진 끝에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했습니까?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무엇으로 깨달았습니까? 마음을 깨친 것입니다.

깨닫고 보니 생사를 초월한 본래의 모습(眞我)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인 나와 가짜인 나가 구별이 됩니까?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입니까? 가짜인 나입니까? 두 모습 모두 나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이런 말들에 현혹되고 있습니다.

진짜 나, 가짜 나 모두 나이지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진아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생사는 본래 없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체중생 모두가 불생불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행동과 생각에 붙잡혀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과 생각을 망상,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 망상과 집착은 자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이 원인만 제거하면 진아는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에 입으로 이 사실을 그대로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불이었다.

공부해서 성불한 것이 아니다’고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입을 다물고 혼자 성불한 것으로 끝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오래도록 고행한 것은 혼자만 누리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생각 끝에 진짜를 감춰놓고 가짜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방편이라 합니다.

8만4000 경전 모두가 가짜입니다.

간혹 진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미묘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49년간 진짜를 감춰놓고 콩을 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야 진짜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마음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위빠사나’, ‘선’ 등 다양한 수행법이 유행합니다.

선도 대승선, 조사선, 여래선, 간화선 등 수없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까?

일찍이 서산대사는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설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얻어지는 것에는 본래라고 이름붙이지 않습니다.

달마대사도 불심법(佛心法), 마음을 바로 보는 법을 강조했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고 성불하게 한 것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깨닫고 보면 선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동이 공부고 선입니다.

그런데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것은 선이고 어떤 것은 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선사들은 혼자 고심고심 하다가 종소리에, 활짝 핀 꽃의 모습에서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종소리를 수없이 듣고, 꽃피는

모습을 봤지만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도 누구는 깨닫고 누구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선이라 하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은 아닙니다.

조금 전 언급한

것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서고, 걷고, 뛰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고요하고 즉 일상의 모든 생활이 선입니다.

여기서 선을 찾으란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일상에서 선을 찾아

봤습니까?

선은 불심이요 교는 불설이다

도대체 선이 뭘까요.

똑같은 행동을 해도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선이 아니다’고 구분을 짓습니다.

자기 마음의 밑바닥(了達)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 보고, 듣지 못하면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밑바닥은 또 무엇인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고 적적고요한 자리에서 보고 듣는 것입니다.

종소리를 들었지만 종소리가 나는 아닙니다.

찻잔을 보고, 꽃을 봤지만 찻잔과 꽃이 내가 아닙니다.

나는 형태도 아니요, 소리도 아닌데 형태도 소리도 아닌 내가 소리를 듣고 깨닫고 형태를 보고 깨닫습니다.

서산대사는 팔만대장경을 다 꿰고 있었지만 학문과 지식은 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깨달음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몇 년을 수행했습니다.

몇 년을 정진해도 도저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리고 바람이나 쏘이겠다며 행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어느 마을을 지나던 중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깨쳤습니다.

깨달음이란 경전이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모든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깨닫겠냐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힌트를 주고 정보를 줘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소소영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애 울음도 진리의 법문

왜 나는 보지를 못하는가.

이유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니 참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참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서산대사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허탈한 마음에 모든 것을 놓으니 바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문이 없는 사람은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의문은 깨달음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의문 없이 깨닫겠다는 것은 영원히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속의 학문과 과학기술도 마찬가집니다.

저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고 밤낮으로 연구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알고자 하는 의문을 갖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의 밑바닥에 사무쳐서 홀연(忽然)히 깨닫습니다.

마음의 밑바닥.

우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고 합니다.

마음 밖에 나타난 것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꿈에 부처님을 뵈었다고 하고 기도 중에 부처님이 나타났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그건 부처가 아닙니다.

물체를 보고 있는 놈이 부처지 보이는 것이 부처가 아닙니다.

선문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간단하고 확고히 깨칠수 있냐’는 질문에 ‘자기 마음이 마음인데 무슨 방법이 필요한가’라고 답변돼 있습니다.

‘어떻게’가 왜 필요합니까.

본인은 본인의 눈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인다는 것은 눈이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똑같은 소리를 듣는데 깨달은 사람은 웃습니다.

그러나 망상과 집착이 머릿속 깊이 파고들어 있으니 머리로서 이해가 안 되고 말로는 설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서산대사도 그렇게 기진맥진할 정도로 생각하던 것을 놓아 버리자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종소리를 들었지만 방해물이 가리고 있어 그 참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옛날 도명 스님은 육조 스님의 의발을 빼앗으려 뒤쫓아 왔습니다.

육조 스님의 길을 막아선 도명 스님은 “의발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육조 스님은 “발우와 가사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라”며 바위 위에 의발을 올려놓았습니다.

도명 스님은 순간 ‘앗 내가 착각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육조 스님은 의발을 훔친 것이 아니라 홍인 스님께서 전수해 준 것을 완력으로 빼앗으려 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명 스님은 바로 합장을 하고 법을 구하려 왔음을 고했습니다.

이에 육조 스님은 “정말로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음 속 생각을 모두 털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공부한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할까봐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이 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 도명 스님은 홀연히 깨치고,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찬 줄 더운 줄 아는 것이라 한다면 상식적으로 믿어집니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신(信)’ 성취입니다.

‘신’이라 하면 부처님이나 신을 믿는 신앙심으로 표현되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깨치고 자기 마음을 바로 믿는 사람이 신심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찻잔을 보고 있는 것이 나이고 차 맛을 본 것이 나입니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좌선을 할 때 벽을 보고 자세를 잡아 무엇인가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공부의 생각을 잡고 있는 것이지 아직 선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 도달해 보고 들을 때 그것이 선입니다.

찬줄 알고 더운줄 아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되, 맛보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깨닫고, 대부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망상분별이라는 생각 속에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 소리가 시끄러워 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마음 밑바닥에서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듣고 있으면 어린애 우는 소리도 굉장히 아름다운 진리의 법문이 됩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

모든 것이 청정하고 참된 몸이어서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 법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보면 시장 패싸움 소리도 법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밑바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본래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밑바닥을 찾으려 하니 오히려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시간만 벽을 보고 있어보세요.

벽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잡념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한 번 해 보세요.

재미없죠? 그러니까 딴생각이 생기는 것이고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

졸고 있는 것은 나 아닙니까? 딴생각하는 것은 나 아닙니까? 소소영영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 나입니까?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본래의 모습이겠습니까? 이 가운데 어떤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육조 스님이 도명 스님에게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깨치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

선도 악도 아닌, 차가운 것은 오로지 차가울 뿐이고 뜨거운 것은 오직 뜨거울 뿐입니다.

선이다, 악이다, 좋다, 나쁘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있었던 것을 모르고 밖에서 ‘진리다’, ‘도다’, ‘선이다’ 하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불자들은 선사라 하면 가사, 장삼을 갖추고 점잖게 앉아서 조용히 참선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사 중에서는 지게지고 거름주고, 나무하고 하는 선사도 아주 많았습니다.

젊은 납자들이 큰스님에게 공부를 배우러 왔다고 하면 그저 묵묵히 일만합니다.

그러면 큰스님이 일하는데 젊은 사람이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만히 일을 하다가 문득 의심이 납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스님은 그런 것 없다고 합니다.

옛날 경허선사는 나의 살림살이를 물어본다면 털어도 털어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복잡한 보따리를 머리에 짊어지고 있느냐 이겁니다.

심중무일물(心中無一物)이로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기에 차를 마시면 오로지 차요, 일할 때는 오로지 일이고,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오직 그러할 뿐입니다.

죽비를 보여주면 죽비를 봐야지 왜 다른 것을 보려고 합니까.

그 짓을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깨칠 때까지 하려고 합니까? 깨치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상하지 마십시오.

깨달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 물어보면 바로 알려 줍니다.

그러나 아무한테나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솔직히 일러줍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한탑스님─업보윤회 이치 알면 참생명 얻어

업보윤회 이치 알면 참생명 얻어

한탑스님

우리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불교의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업보윤회의 이치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 이 세 가지 업을 빼 놓고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은 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씨가 되어 그에 상응한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이를 바로 업보라 합니다.

전생(前生)에 지어 금생(今生)에 받는 업, 금생에 지어 내생(來生)에 받는 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운명적으로 현실에 부딪쳤다고 생각되는 것도, 나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즉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종일 하고 있는 일도 앞으로 받지 않으면 안될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밭에 콩이 난 것을 보았다면 과거에 그 밭에 누군가가 콩을 심은 것이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현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수행종교입니다.

여기서‘행,이란 바로 업을 말하는 것이며, 업은 일상생활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는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닦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것을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불교를 기복적으로 믿으면 절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한 예로 가시나무에 대한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집 마당에 가시나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나무를 복숭아 나무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농촌지도소에서는 분명히 그 가시나무를 뽑고 복숭아 나무를 심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귀찮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집에 찾아가 부적을 사서 가시나무 밑에 묻어 두면 해결이 될까요.

이와 같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가시나무는 복숭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우리 마음 밭에 난 가시나무는 부적이나 사주 팔자에 의존해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 하나 하나를 부처님 진리에 맞도록 고쳐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업보윤회에 따르면 과거의 업이 금생의 결과로 나타나고, 금생의 업이 내생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전생과 내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20세기 이후 현대과학에서 전생과 내생에 대한 문제가 밝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따라 현장을 확인하면 꼭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대 의과대학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 세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아 연구한 결과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례를 묶어 《전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들》이란 책을 펴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최면술을 걸어 현재에 깨어 있는 ‘나’는 놔두고 잠재의식에 암시를 주면 아무 논리와 윤리성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치 혼자서 잠을 자다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면술은 연역역행법으로 잠재의식 속에 나이를 거꾸로 돌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최면술사 ‘번슈타인’은 “세상사람 모두는 잠재의식 속에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며 한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40대의 미국 여인에게 최면을 걸어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가 말하는 것을 기록했는데, 그녀는 과거에 미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직접 현장을 확인해본 결과 그녀의 말과 95% 가 맞아 떨어졌는데, 나머지 5%는 세월이 흘러 과거에 있던 것이 없어지고 현대의 새로운 것과 교체된 사항들이었습니다.

번슈타인은 최면술로 전생을 밝히는 사례를 들어 《서치 오브 브라이드 머피》란 책을 썼는데 1967년《사자와의 대화》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본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생을 47번이나 겪은 사람의 얘기도 나오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또 초심리학 분야인 심령과학에서는 그 사람 내면의 건강상태나, 굳게 닫혀진 금고 속에 돈이 얼마가 들었는지 알 수 있는 투시법으로 전생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에드가 케이시는 투시법으로 사람에게 현재 나타난 문제에 대한 원인을 전생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가 투시법으로 사람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총 2만 건 중에 2500건이 전생과 금생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선천적으로 귀머거리인 사람이 찾아와 원인을 묻자, 에드가 케이시는 “당신은 전생에 로마제국의 귀족이었는데, 거지들이 구걸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금생에 귀머거리가 된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또 미국의 의학·철학 박사인 데이몬드 무드 박사는 뇌사와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로 죽은 사람이 분명한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몸뚱이가 죽어도 영혼을 가지고 다니는 ‘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짓고 있는 업에 의해 전생과 금생 내생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여러분들은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남이 내게 무언가를 해주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끝이 없어 채울 수 없으니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같이 탐욕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신앙하는 목적은 업보윤회를 벗어나는‘생사해탈’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과 함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여러분들은 이미 부처님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나무아미타불‘의 ‘나무’는 ‘참 생명으로 돌아가자’란 뜻입니다.‘아미타’는 우리보다 먼저 성불한 이들이 사는 곳을 뜻합니다.

‘지심귀명례’는 지극한 마음으로 참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불교의 바른 법을 배워 업보윤회을 알고 하루 하루 나의 업을 닦아 가는 것이나의 참생명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무비스님─ 일곱가지 진정한 보시

■일곱가지 진정한 보시/

무비스님

■ 돈 없이 베푸는 일곱가지 (無財七施) (잡보장경) 보시(布施)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보시가 있습니다.

《대지도론》 제 14에 보면 보시의 유형으로 법시(法施)·재시(財施)·무외시(無畏施)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시란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으로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외시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당연히 어떤 물질적인 것이 상정됩니다.

특히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시하면 당연히 돈이나 물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을 갖지 않고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뜻의 무재칠시(無財七施)입니다.

1.

안시(眼施)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시가 됩니다.

요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기고 극복해야할 경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첫눈에 강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이런 눈빛은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심어주며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럴 때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안시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흔히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 늘 싸우는 표정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성난 표정,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사회를 삭막하게 하고 서로간에 말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얼굴에 화기애애하고 기쁨으로 가득찬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소중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3.

언사시(言辭施)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우리는 늘 험악한 말들을 쉽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게시판이나 대화방 같은 곳에 가보면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이렇게 험악한 말이나 가시돗힌 말은 자칫 상대방과 언쟁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말리게 합니다.

언사시는 삼업(三業) 가운데 구업(口業)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열가지 업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첫 구가 바로 우리의 구업을 깨끗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시(身施) 예의 바르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신업(身業)에 해당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공손한 자세로 반갑게 인사하고, 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할 줄 알고, 몸으로 남을 돕는 이런 행위들이 바로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입니다.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몸가짐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는 보시행입니다.

5.

심시(心施)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심업(心業)에 해당합니다.

마음 가짐을 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결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사람를 대하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보시행입니다.

6.

상좌시(床座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 같은 때 얼마나 필요한 보시인지 모릅니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탓을 때 젊은이들이 노약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노약자에게 또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방사시(房舍施) 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같이 부동산을 재산의 중요한 목록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무재시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이미 있는 집에 사람을 재워 준다고 했을 때 돈 드는 일이 아니므로 무외시로 분류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옛날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밤길을 가다가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은 어려운 시절이라면 이것도 크고 아름다운 보시행이겠지요.

이상이 물질을 가지 않고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행입니다.

어쩌면 요즘 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있어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