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탑스님─죽음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죽음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한탑스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상대(相對)세계로 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남과 대립하여 반목하고 지냈던 것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내 밖에 남이 있다고 한다면 절대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을絶(절)입니다.

너와 나라는 대립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내 밖에 남이 없기에 ‘일인칭의 세계’입니다.

극락이든 천당이든 아무리 기가 막히게 좋은 세계라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우리밖에 있다고 한다면, 그 또한 하나의 상대세계일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절대라는 것을, 어떤 특정한 존재를 절대자라로 인정하고 그가 세상을 심판하고 인간들을 섭리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러한 절대자가 있어서 우리 인간을 심사하고 심판해서 천당도 보내고 혹은 지옥도 보낸다고 한다면, 이 존재는 우리 인간과 대립해 있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절대자가 아닙니다.

극락이든 천국이든 내 밖에 있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면, 그곳에서는 우리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한 유한(有限)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내부적인 한계가 있다든지 ” 또 외부적딘 종말이 있다든지 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말 그대로 한계가 없는 무한(無限)세계를 실현해야만 우리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절대(絶對)이면서 무한(無限)이어야 근본 고뇌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여기보다 비교적 살기 좋다’든지, ‘여기를 떠난 어딘가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세계가 있다’든지 하는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유한을 벗어난다는 표현은 절대무한을 실현시킨다는 말과 같습니다.

절대무한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유한은 본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둠과 빛을 섞으면 어떻게 되나요? 당연히 빛만 남겠지요.

어둠은 본래 없는 것이니까 빛을 들이대면 즉시 사라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무한 앞에는 상대유한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상대유한 세계에서 겪고 있는 죽음이나 괴로움은 본래부터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탑스님─염불하면 천지가 고맙기 한량없는 세계로 바뀝니다

염불하면 천지가 고맙기 한량없는 세계로 바뀝니다

-한탑스님-

불교는 다툼이 없는 곳

불교의 화쟁이란 말은결국 다투지 말고 한마음, 한 뜻이 되란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다툼이 없는 곳입니다.그런데도 굳이 다툼을 만들어서조계종 내부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는가 하면태고종과 조계종으로 나뉘어 싸우기도 합니다.하지만 둘은 촌수로 따지면몇 촌 차이도 나지 않는,원래부터 같은 집안입니다.한 곳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세상판이온통 싸움으로 번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불교를 알게 되면서얻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일체 모든 적과 원수,공포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불교에 들어오기 전에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그것이 생존경쟁이었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나 이외에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부모, 자식, 친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내가 살기 위해서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죠.그러나 불교에는 내가 해쳐야 할 존재도,미워할 존재도, 다툴 존재도 없습니다.그런 세계가 바로 참생명의 세계입니다.아미타의 세계죠.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뜻입니다.귀명.

돌아갈 귀(歸)에 목숨 명(命)자를 써서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 밖에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조금 서운하게 들리시겠지만갓바위에 가서 기도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특정한 곳에특정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찾고자 한다면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은 존재합니다.귀명한다는 뜻의 나무는 언뜻 생각해보면뭔가 밖으로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이는 참생명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모두가 한생명이니까 다툴래야 다툴 수 없어요.

어디가든 모두가 나를 이끌어주시는,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부처님 밖에 없으니까요.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나무아미타불이고 귀명(歸命)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관세음보살이든 지장보살이든소원을 들어주십사하고 떡을 바치고 과일을 바치고 하죠.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주실 것이 있다면내가 달라기 전에 다 줬지떡을 얻어먹으려고 기다리고 계셨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절을 천 배 정도 하면 그제서야 부처님이눈을 한 번 뜰까말까 한다구요.부처님이 그렇게 잔인한 분이십니까.

절을 죽어라고 했을 때 잠깐 봐준다고 한다면그런 분을 믿어서 뭐합니까.부처님은 우리가 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다 주시는 분입니다.답답하다 하면 이미 해방되었다고, 자유롭다고 말씀하십니다.부처가 되겠다고 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이미 너는 부처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입니다.

나무아미타불로 모든 다툼 사라져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것,그것이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괴로움이 많습니다.생로병사는 물론이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미운사람과 만나야 하고,구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등,세상살이가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런데 여기다 대고 기도하면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짓말을 하니까사람들은 점점 더 괴로워지고 외로워지죠.

뭔가 의지하고 싶을 때,그 때 궁극의 의지처가 되는 곳이 종교입니다.

절대 무한이 됨으로써궁극의 의지처가 될 수 있습니다.절대(絶代)라는 말은 대립이 없다는 말입니다.끊을 절(絶)에 상대 대(代)자를 씁니다.상대나 대립이 없으면 대신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온 세계가 1인칭인 세계이고2인칭 3인칭이 없는 세계인거죠.그리고 무한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이자 법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나그 내용이 드러나 있는 것이 절대 무한입니다.무한은 자기 스스로 특정 모양을 가질 수 없어요.만약 둥그런 모양을 가졌다면네모와 세모 모양과 맞지 않을테죠.그래서 모양이 없는 절대 무한을 법신이라 합니다.법신불 밖에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없습니다.그러나 법신불은 모양이 없으니까우리 같은 못난이들은 보지를 못합니다.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아요.

그러나 알고 보면우리는 본래부터 법신생명이고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합니다.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가졌다는 뜻입니다.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간다는 신념만 있으면다툴 일이 없습니다.한생명의 세계니까요.

그러나 이 못난 이들이 참생명을 보지 못하고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눈이 팔려서 속고 지내는 것입니다.

법신불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으니법신불이 저절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떨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제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내는 거죠.그러나 눈먼 장님인 우리는 모양 없는 법신불을 보지 못하니까그는 원력에 부응해서 보신불이 됩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이라 부르는 분입니다.아미타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절대적입니다.이것이 바로 절대 무한입니다.우리와 떠나 있는 아미타가 아니라 함께 있는 아미타입니다.나무아미타불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그리고 다시 무지몽매한 이들을 위해상이 있는 존재로 변화해 나타난 불이 석가모니불입니다.화신불이죠.화신불은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한몸이라는 뜻도 있고 몸이 없는데도몸으로 변화해 나타난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조그만 나라의 태자로태어날 이유는 없었지만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범위 내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아미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려고특정한 공간에 시간에 인간의 모습으로드러나신 분이 석가모니입니다.또한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화하신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약사여래불 또한 아미타불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부처님이 낫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다툼이 일어났던 본래자리로 돌아가면아미타불을 만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로모든 다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데 추울 때는 따뜻한 태양이고밤에 생각할 때는 밝은 태양이죠.그러나 따뜻한 태양과 밝은 태양이 따로 있는 건가요?밝은 것은 문수보살, 따뜻한 것은 관세음보살입니다.문수보살 따로 있고 관세음보살 따로 있습니까.아닙니다.

겉모양에 속고 있으므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니까외견에 속지 말고 참생명으로 돌아가면내 밖에 남이 없습니다.세계일화(世界一花),세계는 한 송이 꽃이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만공 선사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내가 미워해야 할 적이 없습니다

다툼없이 사는 법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간에항복해야할 생각입니다.부처가 되겠다는 수보리 존자에게석가모니는 부처되고자하는 마음을 버리라 합니다.

자타일시성불도,나와 남이 함께 부처되어지이다,이것이 부처님의 기도입니다.나 자신을 위한 것은 부자되겠다는 생각은 물론,부처되는 것조차 생각하지 말고이 세상의 중생을 극락세계로보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은 지금은중생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스스로 중생이라고 우기기에 중생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참생명으로돌아가겠다는 마음만 가지십시오.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간에그건 전부 내버리고,본래 부처 자리 그것을 참생명으로 알고지내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이를 의지하면 세상 사람들이모두 다 나와 더불어 사는 것과 다름없으므로싸울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착하지 않은 사람이,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어요.그런데 왜 다른 이들이 나를 못살게 군다고 이야기합니까.그들은 적이 아니예요.나잘났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못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우리 마음 속에 얼마나 나가 강합니까.’내가 편해야겠다, 사랑받아야겠다,대접받아야겠다’ 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지는 것입니다.타인은 나를 꺾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시어머니도 시누이도아상을 꺾어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그런데 왜 우리는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우깁니까.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것,그게 바로 꿈입니다.

자다가 경기 일으키는 아이를 보면 엄마는 얼른 깨웁니다.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부처세계에 살고 있는데중생이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여러분들의 본래 이름은 아미타예요.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면 ‘예’ 하고 깨어나면 됩니다.이처럼 나쁜 꿈을 깨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다투면서 사는 것은내가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러는 것입니다.거기에 마음 뺏기지 말고 참생명으로 돌아가십시오.우리는 본래부터 빛나는 생명을 살고 있지만쓸데없는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다리가 짝짝이라면 짧은 다리를 보지 말고긴 다리를 보듯 남의 장점을 보십시오.공양은 보시에 정성과 공경을 더하는 것입니다.주는 마음으로 살면 그게 참마음입니다.어느 누구도 나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쟁.

평화로운 상태에서 남과 다투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원효성사의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생명으로 돌아가라는 나무아미타불입니다.여러분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참생명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방해하고 해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이로운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요.이처럼 참생각이 방해를 받으니까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나무아미타불 하십시오.이렇게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참생명인 부처생명으로 돌아갑니다.부처생명은 남이 없습니다.

남이 없으므로미워해야할 남도 없고 다퉈야 될 남도 없습니다.원망해야할 남도 없습니다.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한생명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면하늘에 낀 구름을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푸른 하늘이 나오죠.구름이 꼈을 때는 푸른 하늘이 어디 출장 갔었나요.하늘은 그대로 있었죠.이처럼 아무리 우리가 중생이라고 우겨도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나무아미타불하면천지가 고맙기 한량없는 세계로 바뀝니다.

-화쟁사상 주제로 한 한탑 스님 법문 발췌-

한탑스님─업보윤회 이치 알면 참생명 얻어

업보윤회 이치 알면 참생명 얻어

한탑스님

우리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불교의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업보윤회의 이치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 이 세 가지 업을 빼 놓고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은 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씨가 되어 그에 상응한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이를 바로 업보라 합니다.

전생(前生)에 지어 금생(今生)에 받는 업, 금생에 지어 내생(來生)에 받는 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운명적으로 현실에 부딪쳤다고 생각되는 것도, 나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즉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종일 하고 있는 일도 앞으로 받지 않으면 안될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밭에 콩이 난 것을 보았다면 과거에 그 밭에 누군가가 콩을 심은 것이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현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수행종교입니다.

여기서‘행,이란 바로 업을 말하는 것이며, 업은 일상생활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는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닦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것을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불교를 기복적으로 믿으면 절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한 예로 가시나무에 대한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집 마당에 가시나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나무를 복숭아 나무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농촌지도소에서는 분명히 그 가시나무를 뽑고 복숭아 나무를 심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귀찮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집에 찾아가 부적을 사서 가시나무 밑에 묻어 두면 해결이 될까요.

이와 같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가시나무는 복숭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우리 마음 밭에 난 가시나무는 부적이나 사주 팔자에 의존해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 하나 하나를 부처님 진리에 맞도록 고쳐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업보윤회에 따르면 과거의 업이 금생의 결과로 나타나고, 금생의 업이 내생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전생과 내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20세기 이후 현대과학에서 전생과 내생에 대한 문제가 밝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따라 현장을 확인하면 꼭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대 의과대학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 세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아 연구한 결과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례를 묶어 《전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들》이란 책을 펴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최면술을 걸어 현재에 깨어 있는 ‘나’는 놔두고 잠재의식에 암시를 주면 아무 논리와 윤리성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치 혼자서 잠을 자다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면술은 연역역행법으로 잠재의식 속에 나이를 거꾸로 돌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최면술사 ‘번슈타인’은 “세상사람 모두는 잠재의식 속에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며 한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40대의 미국 여인에게 최면을 걸어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가 말하는 것을 기록했는데, 그녀는 과거에 미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직접 현장을 확인해본 결과 그녀의 말과 95% 가 맞아 떨어졌는데, 나머지 5%는 세월이 흘러 과거에 있던 것이 없어지고 현대의 새로운 것과 교체된 사항들이었습니다.

번슈타인은 최면술로 전생을 밝히는 사례를 들어 《서치 오브 브라이드 머피》란 책을 썼는데 1967년《사자와의 대화》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본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생을 47번이나 겪은 사람의 얘기도 나오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또 초심리학 분야인 심령과학에서는 그 사람 내면의 건강상태나, 굳게 닫혀진 금고 속에 돈이 얼마가 들었는지 알 수 있는 투시법으로 전생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에드가 케이시는 투시법으로 사람에게 현재 나타난 문제에 대한 원인을 전생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가 투시법으로 사람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총 2만 건 중에 2500건이 전생과 금생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선천적으로 귀머거리인 사람이 찾아와 원인을 묻자, 에드가 케이시는 “당신은 전생에 로마제국의 귀족이었는데, 거지들이 구걸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금생에 귀머거리가 된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또 미국의 의학·철학 박사인 데이몬드 무드 박사는 뇌사와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로 죽은 사람이 분명한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몸뚱이가 죽어도 영혼을 가지고 다니는 ‘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짓고 있는 업에 의해 전생과 금생 내생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겠습니다.여러분들은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남이 내게 무언가를 해주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끝이 없어 채울 수 없으니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같이 탐욕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신앙하는 목적은 업보윤회를 벗어나는‘생사해탈’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과 함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여러분들은 이미 부처님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나무아미타불‘의 ‘나무’는 ‘참 생명으로 돌아가자’란 뜻입니다.‘아미타’는 우리보다 먼저 성불한 이들이 사는 곳을 뜻합니다.

‘지심귀명례’는 지극한 마음으로 참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불교의 바른 법을 배워 업보윤회을 알고 하루 하루 나의 업을 닦아 가는 것이나의 참생명을 찾아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