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스님─ 관음기도로 불치의 병이 사라짐

관음기도로 불치의 병이 사라짐

진각스님

언젠가 광명사 신도회 총무 장상원 거사님은 당시 주소가 충북 청원시 석교동 육거리에 있는 뉴~코리아나 관광여행사이다.

몇 년 전부터 청원군 미원면 운교리에서 정미소를 하고 인삼 재배도 하며, 동네 이장도 보면서 시골에서 살고 있었으나, 얼마전 까지만 해도 청주에 나와 살았었다.

지금으로 부터 10 여년 전 장 상원씨가 간경화로 지라까지 붓고 아파서 수술도 못할 상태였다.

좋다는 약만 구해서 먹다가 병이 악화되어 다들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의 형 두분이 서울에 잇으면서, 특별히 의사에게 부탁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부터는 절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큰 아들 정 현태군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와서 집안 일을 도왔다.

겨울방학이 되자 경운기로 볏짚도 실어나르고 벼짝을 메어 나르며 장정 부럽잖게 일을 하였는데 봄이 되자 오른쪽 다리가 아프고, 허리 척추뼈가 3 개가 튀어나와 학교에 못 다니게 되었다.

청주의료원에서 디스크 병으로 진찰이 나와 고치려고 두 달이 넘도록 치료를 하였으나 병은 낫지를 않았다.

대전 대학병원으로 서류를 넘겻으나 그만두고, 스님의 권유로 휴학계를 내고 약도 썼다.

여름방학이 되어 구인사로 가서 한달 기도를 하였어도 병은 낫지를 않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닥쳐왔다.

스님은 또 권유를 하여 태현군을 구인사로 한 달 기도하도록 보내고 부친은 가까운 절에서 한 달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장 상원씨는 동네 이장도 보고 인삼포며 방앗간 때문에 낮에는 기도를 못하고 밤에 열두시가 넘어서야 기도를 할수가 있었다.

오랜 질병에 지쳤는지 하루는 스님 보고 “나는 내년 4 월을 못 넘길 것 같다” 는 마음 약한 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스님은 몸이 달아서 장 상원 처사님을 데리고 구인사로 가서 태현군을 만나 “너는 병을 못 고치면, 병신의 몸으로 가정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너의 부친은 본인의 아픈 것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고 네 병이 낳기만 바라며 밤 12 시가 넘어서도 밤마다 절에와 너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

어젯 밤에는 내게 하는 말이 내년 4 월 까지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게 급하니 네가 한달이 넘도록 기도를 하여야만이 병이 나아 너의 아버지가 너를 보고 신심이 생겨나 기도를 할 것이고 그래야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강조를 하였다.

장 상원씨는 아들을 보고 “병이 낫지 않으면 병신 자식 보기 싫으니 영춘강에 빠져 죽든지 집에는 오지도 말라” 고 하고서 왔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병이 낳았다.

태현군은 반가움과 두려움에 스님에게 달려 왔다.

태현군이 병은 나았지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밤이 되어 부모와 함께 절에 온 태현군이 스님께 인사를 하니 스님은 계속 기도를 해야 한다며 다시 기도를 시켰다.

그런데 태현군이 관세음보살을 몇 번 부르더니 ‘:쯔쯔 쫘쫘 쯔쯔 떠떠………’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부모는 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말고 “스님 얘가 집에서도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스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런 소리를 할수도 있다’ 라고 말씀 하셨다.

교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방언이라고 하고 절에서는 이런 경우를 변음이라고 하는데 자꾸 기도를 하다보면 과거의 업장이 들어나 없어지면서 그런말이 나오게 된다’ 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스님이 태현군이 언제 부터 그랬냐고 물으니까 태현군이 말하기를……..

“스님이 다녀 가신 뒤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낮에도 부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힘껏 뺨을 때리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아무도 안 때렸다는 거예요.

볼을 만져보니 분명 손가락 자욱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방에서 나와 대조사스님 묘소에 올라 갔더니 보살님들이 많기에 나는 한 쪽에 조용한데 가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데 또 누가 뺨을 너무 아프게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두 이상해서 묘소 지키는 스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스님은 웃으시면서 ‘너 기도 열심히 하라’고 신장님이 때리시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후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데 누가 ‘학생 공양하러 가지’ 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소리가 잘 되다가 ‘:쯔쯔 쫘쫘 쯔쯔 떠떠………’ 그러면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부르려해도 자꾸만 이상하게 변음이 나왔어요.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기도를 하였는데 언제 부터인가 다리가 안 아팠어요.

이말을 들은 부친도 “나도 이제 부터 기도를 열심히 해야겟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신심이 생겨나 남마다 잠들기 전에 꼭 관세음보살을 정진하고 낮에는 길에 다니면서도 불럿는데 하루는 꿈에 혜만스님이 :차차 괞찮아 질거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차도가 점 점 좋아져 농사일을 그만두고 그 뉴~코리아 관광여행사를 하고 잇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 같지만 관세음보살 부르다가 우는 사람, 귀신하고 싸우는 사람, 변음이 나오는 사람,들도 왕 왕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그만큼 사람마다 다르게 신기한 일들을 경험 할수 있다.

여기서 나의 얼마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곳 보성의 움막에 처음 올때만 해도 컴퓨터를 전혀 몰랐다.

크고 켜는 것조차 모르는 상태인데 얼떨곁에 컴퓨터 한 대를 보시 받고 나서 10 년 동안 비어있던 이 폐가로 들어와 홀로 책을 구입하여 보면서 컴퓨터를 공부했다.그러다 5 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우연히 인터넷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인터넷으로 인하여 사이버사찰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나의 신기한 가피는 이때 부터 일어났다.오늘 처음 글을 남기는데 아마 가피를 입어 보질 못한 사람들은 지금 부터 내가 적는 글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고 설마…설마…할 것이다.

하지만 원력을 입었거나 가피를 입은 재가불자들은 당연 하리라 생각을 한다.

내가 컴을 혼자 배운지 5 개월이 넘으면서 부터 홈 페이지 제작에 들어 갔다.가피는 그 때 부터 일어나기 시작 했다.

홈 페이지를 주무르다가 분명 컴퓨터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 분명 이렇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왜 안 되지…..? 하면서 그날 밤 끙 끙 앓으며 헤메다가 잠이 들면 꿈 속에서 얼굴도 볼수없는 하얀 가사장삼을 수한 사람이 나타나 정확하게 홈 페이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소스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럼 그 꿈을 꾸자마자 당장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그 생생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보면 과히 아니 놀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가피를 무려 1 년이 넘는 동안 매일 꿈 속에서 그렇게 배워 오면서 사실 지금의 인터넷 사찰의 기본 틀이 짜여 졌다고 보면 된다.

기도란……….

죽음의 직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 마냥 약에 의존하지 않고 돈에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나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마지막으로 부처님에게만 의지하지 않으면 않되겠다고 생각 할 때 그 때야 말로 참다운 기도정진이 된 다는 것이 보통 스님들의 한결 같은 말씀들이다.

다른 잡된 생각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한 생각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보살님을 불렀을 때 관세음보살은 그 사람을 도와 주는 가피를 내리는 것이다.

그런 기도정진을 함으로써 불자들은 어려운 난관을 미리막고,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수가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야 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닌 진실로 나는 하나의 원을 세우고 그 원에 대한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하기 바랍니다.

지유스님─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자 잡념의 동물이다.

생각은 신산한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힘이기도 하지만 몸을 갉아먹는 병균처럼 무서운 존재다.

진정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실패라고 믿는 착각 곧 뒤틀린 생각이다.

어제에 대한 향수와 내일에 대한 불안에 파묻혀 오늘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다.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고 아파하며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울러 어리석음의 극치이기도 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요지다.

“마음이란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입니다.

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 못살게 굽니까.

게다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에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선지식은 마음에 한 물건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불해야겠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망상입니다.”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스님의 주장은 깨달음의 원력마저 일축하는 듯해 적잖이 당황스럽다.

나쁜 생각이야 없애야겠지만 좋은 생각마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님이 보기에 선심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깨닫는다는 건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자리는 사량분별을 떠난 자리인데 우리는 여전히 사량분별 속에서 마음을 알아야겠다,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둥 생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마음이 뭘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것일 뿐입니다.”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결국

‘비움’에 길이 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목전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바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희로애락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즉물(卽物)의 경계에서 실상이 보인다.

바로 “주변의 일과 내가 일치되는 상태”다.

“거울에 묻어있던 때가 없어졌을 때 마음에서 생각이란 그림자를 걷어냈을 때 목전의 일과 하나가 되고 거기엔 어떤 괴로움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천재보다 바보가 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쉴새없는 생각으로 기발한 발명을 하기보다 1분이라도 생각을 끊고 지내기가 더 버겁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 영웅은 될지언정 돌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스님도 “생각을 끊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찻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안 보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 통장의 잔고, 내일의 할 일, 악마같은 상관 기타 등등 온갖 잡념이 시선을 메워버립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생각에 속아 찻잔을 나누고 쪼개고 빼돌리고 꼬여내느라 정작 찻잔은 온데간데없고 스트레스만 무성하다.

어떻게 이 지독한 번뇌망상을 없애야 하는가.

외려 스님은 혀를 찬다.

“번뇌망상을 없애겠다는 결심도 번뇌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망상이 계속 일어나면 그저 가만 놔두십시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마세요.

다만 물끄러미 찻잔만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님은 “망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망상을 ‘뚫고’ 보라”고 강조한다.

망상은 없애려고 마음먹을수록 더 강력해진다.

생각이 곧 망상이고 망상은 망상을 먹고살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에게 아무 망상을 제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굶주린 망상은 자연스레 목숨을 잃는다.

“망상은 물에 비친 그림자 같이 공한 것입니다.

비록 말을 하고 생각을 일으켰다 해도 생각 이전,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자리를 응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쓸데없는 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 자리가 무심이요 성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행은 구하는 것이 아닌 비우기 위한 연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두를 파고들지만 깨닫지를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을 들고있는 한, 못 깨칩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저절로 깨닫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탓에 팔이 아파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수행법에도 특별한 우열이 있지 않다.

“마음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 염불은 입으로 좌선은 엉덩이로 하는 소일거리에 불과한 것.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맑은지 혼탁한지는 스스로 알 것입니다.” 무심(無心),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의 경지는 쉬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망망대해도 물 한 방울에서 태동한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 우리는 왜 괴롭습니까.

어떤 사건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건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이 지나가더라도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거나 울상을 짓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 곧 생각에 얽매인 탓이죠.

고통이다 괴로움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이 그림자처럼 마음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남의 발자국 혹은 발길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오다가 새겨진 흔적이다.

발길만 되돌리면 그뿐이다.

“놓으면 됩니다.

놓고 보면 본래 자리입니다.

사실, 본래자리는 휘황찬란한 광명이 비추는 별천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고통 속에서 볼 땐 가장 좋은 자리인 것입니다.

한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늘 편안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한번도 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가장 귀한 자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다음부터는 들지 않게 되겠지요.” 깨달으면 대안심(大安心)을 얻는다.

“우리가 제일 편안할 때는 아무 것도 안할 때입니다.

그런데 으레 여기에 지루함을 느끼고 쌀 한 가마니 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여하튼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쳐봅시다.

등정의 기쁨은 잠시,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들고 맙니다.”

다시 야망으로 포장된 골칫거리를 찾아 고된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이야기다.

‘날고 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데 말이다.

비아냥조의 이 말은 ‘구태여 날고 기지 않아도 이미 나는 깨달아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덕담으로도 들린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본즉 그 자리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맨다고 해서 남의 자리로 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허송세월한 것이죠.” 건강을 되찾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하라는 말은 도처에서 들리지만 마음의 ‘군살’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없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생각 이전의, 생각 너머의 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비를 바로 내보이며 이것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금방 보인다고 대답하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믿죠.”

스님은 칼같이 되묻는다.

“당신은 단 5분이라도 딴 생각없이 이 죽비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이 죽비를 못 보는 사람이 과연 정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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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스님─공부에 대한 한 말씀

공부에 대한 한 말씀(기도와 절을 할 때)

-보성스님-

이제 불자들이 즐겨 행하는 공부방법에 대해 몇 마디 사족을 붙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나 절을 하는 불자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도나 절을 하는 불자는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땀을 흘린다는 것! 이것이 노력입니다.

이것이 절을 하고 기도하는 이의 정직입니다.

땀을 흘려 업장을 녹이고자 해야 합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절을 하기가 싫어집니다.

땀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땀이 진참회(眞懺悔)의 땀이요, 업장을 녹여 소원을 이루게 하는 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과 기도는 참으로 큰 힘을 발휘합니다.

매일 108 배라도 꾸준히 계속하게 되면 그 공력(功力)이 쌓이고 쌓여 평생을 별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되며, 지위도 오르고 경제력도 저절로 뒤따르게 됩니다.

하루 10 분 흘리는 참회의 땀방울이 평생을 평안하고 향상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고, 절하고 기도하는 수행을 절대로 거르지 마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집안이나 자신에게 특별한 어려움이 있을 때는 반드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등학교 3 학년을 아들딸로 둔 어머니들은 매우 열심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아들딸이 수능시험을 잘 쳤다고 하면 그날부터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절도 기도도 하지 않는 이가 많습니다.

그 때 나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표정을 이전처럼 지으시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기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마음을 푸는 순간 그릇됨이 침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더 다부지게 기도하고 절을 해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뜻하는 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 날로부터 나태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조금은 편안해져도 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비행기를 조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 비행기 조정사가 ‘아, 오늘은 날씨도 좋고 비행에도 별 어려움이 없구나.

조금 긴장을 늦추고 주위의 풍물을 즐기자’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중한 승객의 생명과 막대한 금액의 비행기가 위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조종사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착륙하여 모든 승객이 무사히 내릴 때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오늘의 내 책임을 마친 때’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백일기도를 작정하였는데 70 일만에 좋은 상서가 있을지라도 고삐를 늦추지 말고 백일을 마저 채우라” 는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불자의 공부이기 때문이요, 이어지는 기도 속에서 힘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경전을 독송’ 하는 분께 당부 드리겠습니다.

(독경.염불.법문 듣는 법) 불자들 중에는 ‘어떤 경전이 좋다’ 고 하면 뜻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많이 읽는 것에만 치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뜻은 몰라도 많이 읽기만 하면 공덕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며 독송하면 뜻을 모르고 독송하는 것보다 열배 스무 배의 공덕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독송할 때는 꼭 뜻을 새기며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한 페이지를 독송하더라도 가장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하며, 그 경전을 설하신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시간이나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과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독송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경전 속의 뜻을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 부처님께서 바로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렇게 설하셨구나.” 이러한 확신이 분명히 서면 ‘나’ 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나’ 스스로가 자신있게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부디 마음을 모아 맑은 정신으로 독경을 하십시오.

맑은 정신에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정성스럽게 독송을 하면 참으로 부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나는 절에서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법보시할 때 신도들에게 ‘한 권씩만 가지고 가지, 두 권 세 권 가지고 가지 말라’ 고 합니다.

또한 가지고 간 책은 꼭 읽으라고 합니다.

한 번 읽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읽어 도움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경전이나 불교서적을 읽어 ‘나’ 의 마음속에 맑고 복된 이해력이 생겨나면 모든 것이 ‘ 나’ 에게 평화롭게 다가서지만, ‘나’ 의 마음속에 탁하고 산란하고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득 차면 괴로움과 근심걱정의 태풍이 ‘나’ 를 향해 강하게 불어옵니다.

경전공부! 그것은 바로 ‘나’ 를 맑고 복되게 만들어주는 것이요, ‘나’ 를 차츰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주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정녕 공부하는 불자들은 마음을 모아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나’ 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잘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염불입니다.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의 명호를 부르며 염불을 하는 이들은 꼭 염(念)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명호를 부르지 말고 아미타불 등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뜻과 행동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내가 염불을 하지만 ‘나’ 를 버려야 합니다.

‘나’ 를 비우고 ‘나’ 의 마음 가득 불보살님을 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법문을 듣는 자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법회장에 참여할 때는 꼭 ‘오늘 단 한가지 가르침이라도 마음에 새겨야지’ 하는 자세로 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법사의 설법을 듣기 전에 귀를 한 번 만져주며 스스로 당부하십시오.

“귀야, 귀한 법문 부디 잘 들어라.

부디 정신 바짝 차려라.” 그리고 법문을 다 들은 다음에는 단 5 분이라도 명상을 하여 그 법문을 ‘나’ 의 것으로 만들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법사스님께 따로 가르침을 청하여야 합니다.

나도 많은 곳에서 법문을 하지만 의문점을 알뜰하게 물어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설법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기특한 공부인입니다.

모르는 것, 의문나는 것을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향상의 길로 열려 있는 진정한 불자입니다.

나는 가끔씩 부탁을 합니다.

“절에 왔으면 수행한 스님의 덕을 조금이라도 보고 가십시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스님의 법문을 알뜰하게 귀 기울여 듣고, 의심이 나든지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말씀에 대해서는 탐문(探問)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도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스님, 저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바른것인지요?” 이렇게 꾸준히 공부를 하고자 할 때 향상의 길이 열리고 행복의 문이 열리며, ‘부처침의 제자’ 라는 강한 자부심이 생겨납니다.

부디 ‘나’ 를 향상의 길로 이끌어 줄 스승을 잘 선택하여 그 가르침 속에서 한가지 공부라도 양심껏 실천하는 참된 불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