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스님─극락과 지옥은 욕망에서 시작

극락과 지옥은 욕망에서 시작 – 현호 스님 – [극락과 지옥은 욕망에서 시작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 늙음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 병고(病苦)입니다.

모든 사람이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 부위가 크게 아프거나 드러나지 않아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병은 항상 몸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찍이 의왕이신 약사여래 부처님을 보신불로 보내셨습니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병을 404가지로 진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병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양을 드시게 되면 혼자 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나눠 먹는 것입니다.

몸 안에는 기생충도 있고 암 덩어리도 있습니다.

좋은 백혈구 나쁜 백혈구가 섞여 있습니다.

몸 안에서 서로 공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늙기 마련이고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늙고 병들면 필연적으로 사고(死苦)를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의 표정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보살님은 염주를 들고 아미타불을 찾다 가시니까 죽어서도 표정이 밝고 얼굴이 평온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약을 먹고 돌아가셨는데 원망이 있는 상태로 가셔서 그런지 얼굴 표정이 험악하고 무섭습니다.

사후세계의 육신은 마지막 임종할 때의 마음자리가 그래도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락이나 천당 가시려면 웃으면서 가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놓고 집착을 끊고 훌훌 털어버려야 합니다.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죽는 고통 또한 모두 다릅니다.

중환자실에서 죽지 못하는 이도 있고, 반대로 평온하게 가시는 이도 있는데 모두 전생의 업에 의한 것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죽지 못하는 이는 전생의 업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는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어떤 사람의 명(命)을 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나의 생명은 자신이 지어 받는 업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어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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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곳이 있다면 과연 어디서 왔느냐도 중요합니다.

일단 부모를 의지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배속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것이 화두입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고 합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었는가.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그 생명의 본질은 있었을 겁니다.

그 주체가 불교에서 보면 법신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영원하며 불생불멸하는 것은 법신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법신의 의식작용으로 여러분이 저를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법신은 어디에 있을까요.

머리에 있을까요.

심장에 있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습니다.

이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육체는 유한적이기 때문에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법신은 불생불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죽음은 두렵습니다.

죽음이 좋아 웃으면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과의 도리를 안다면 죽음은 필연이고 그렇다면 죽음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느냐.

한 가지만 일념으로 하면 됩니다.

아미타불을 10번만 염송해도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혹한 중생인 우리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법인스님─어느 누가 아프지 않으랴

어느 누가 아프지 않으랴

-법인스님-

“어떤 스님이 좋습니까?” 요즘 내가 한 잔의 찻값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대화의 끎말(=이끄는 말)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종교, 친소에 관계없이 이 말이 나만의 ‘일상적 질문’이 된 것은, 확고한 승려 교육의 목적과 지표를 설정하는 데 있어 대중이 바라는 수행자상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 대답은 ‘대동’하고 ‘소이’하다.

똑똑하고 친절한 스님, 내 말을 정성으로 들어주는 스님, 근엄하기보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스님, 나를 성숙시켜 주는 스님,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스님, 늘 그 자리에 있는 스님, 내 삶의 중심과 나침반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는 스님, 현실성 있는 법문을 해주는 스님, 사회와 역사 의식이 있으면서 일상의 삶은 절도 있는 소박한 스님, 원칙을 지키고 공평무사하며 공심으로 일하는 스님, 옳고 그름이 분명한 스님, 내 삶의 위안과 힘이 되어주는 스님 등등.

대동(大同)은 지혜와 자비의 양 날개를 갖춘 수행자였으며, 소이(小異)는 저마다의 염원에 응답하는 시대의 관음보살이요, 보현보살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나는 한동안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혼돈을 경험했다.

지극히 당연한 정답이 왜 이리도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왜 이런 답들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새삼스럽기만 한 것인지….

며칠 동안 켜켜이 쌓인 생각의 나이테를 정리하면서 어색하고 머쓱한 그 원인을 찾게 되었다.

  그건 세간과 출세간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의 차이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출가 수행자들은 수행, 깨달음, 직지인심, 견성, 성불, 간화선, 돈오돈수 등 이런 언어와 어법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이 언어들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 사고와 삶의 지향이 실려 있다.

간간이 말하는 세간을 향한 보시와 자비는 언저리의 일시적 방편 언어이다.

  그러나 세간의 이웃들은 실질적인 일상과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출가 수행자의 중심언어와 가치지향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 수행자들에게서 참되고 행복한 삶의 지혜와 답답하고 힘든 현실의 위안과 격려를 얻고자 한다.

세간의 벗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도 좋지만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낯선 수행자보다는 겸허하고 따뜻한 시선의 친근한 스님에게 위로와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 시각, 나에게는 많은 반성과 자책이 따른다.

수레는 분명 두 바퀴로 목적지를 향해 굴러간다.

엄정하면서도 친근할 수 있고, 침묵하면서도 귀기울일 수 있으며, 여럿이 함께 할 수 있으면서도 홀로 있을 수 있고, 비우면서도 나눌 수 있음에도 왜 우리는 한쪽으로만 시선을 고정한 채 살았을까? 눈은 뜨면 안팎 모두를 볼 수 있고, 귀는 열면 안팎 모두를 들을 수 있는데, 왜 눈과 귀를 반쯤만 열고 살았을까?   결국 이것은 세상에 대한 연민과 자애의 부재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더불어 존재하고 더불어 생동한다는 연기의 질서에 철저하지 못한 소치이다.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위해 헌신과 자비를 실현한 부처님의 삶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이고 게으름이리라.

그러고 보니 오랜 세월 수행과 깨달음에 짓눌려 자비심을 그리 염두에 두고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수행의 길에서 다시 ‘자비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니 요즘 내 삶의 화두는 온통 자비심이다.

자비로 뭇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수행과 깨달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런 수행과 깨달음은 진정한 수행과 깨달음일까? 그것은 한낱 사치스런 관념과 수식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비심은 무엇이고 자비행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보현보살의 손길은 어떤 모습일까? 자비는 당장의 마음이고 당장의 실천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지금에도 미래에도 늘 생동하는 평등의 눈길이요, 구제의 손길이요, 연민의 가슴이다.

  내게 처음 자비심이 무엇인가 절절하게 온몸으로 가르쳐 준 분은 우리 할머니이시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가난한 시골의 우리 마을은, 6·70년대 가난한 시골 마을이 그렇듯이, 그때는 걸인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이 아픈 상이용사와 나병환자들이 참 많았다.

하루 걸러 남루한 사람들이 어김없이 구걸하러 왔다.

가난한 살림에도 우리 집은 나름 적선의 원칙이 있었는데, 탁발 온 스님에게는 쌀 한 그릇, 걸인에게는 보리쌀 한 접시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걸인에게 적선하면서도 꼭 한마디씩 위로와 축원을 해주셨다.

“아이구! 어쨌든지 굶지 말고 아프지 말고 몸 간수 잘 하시우!”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수줍은 몸짓과 더불어 눈시울이 붉어졌던 걸인들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나의 할머니는 혹여 걸인들이 끼니를 채우지 못한 것을 알면 없는 반찬과 보리쌀 많이 섞인 밥일망정 밥상을 정성스레 닦아 차려주셨다.

  하지만 어린 나는 걸인이 먹는 밥상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니, 저들이 먹는 밥그릇과 수저로 내가 밥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어느 날 할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할머니! 보리쌀을 주는 것은 좋은데 거지들에게 밥은 안 차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할머니는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애야, 먹는 입은 다 똑같은 거란다.”   ‘아….’ 나는 그때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것 같다.

‘차이가 있지만 차별해서는 안 되는’,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절대적 빈곤에 내몰린 걸인에게도 신체적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도, 예의와 인정을 베풀었던 할머니에게서 나는 별다른 이론적 학습 없이 겸손과 평등과 자비를 저절로 체득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의 할머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신 분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고행과 명상, 오묘한 설법만을 하시는 부처님의 모습(평면적 시선)에서, 온전히 중생을 향한 자비행으로 헌신하신 부처님의 모습(입체적 시선)으로 옮겨보자.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임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나에게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는 (법구경)의 간명한 말씀에서 평화와 평등, 자유를 염원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이 배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을 반대했고, 계급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부정했고,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중생과 동행한 당신의 삶에 굵직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부처님은 똥을 푸는 직업을 가진 수드라 신분의 니디에게는 “너는 세상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다.

자,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내 손을 잡아라.”라고 자비의 언행을, 계급이 높다고 교만한 바라문에게는 “악행을 하면 누구나 나쁜 과보를 받고 보시하고 선행하면 누구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나는 출생을 묻지 않는다.

다만 행위를 묻는다.”라고 하며 알량한 개념에 물든 이에게 등을 후려치는 죽비소리의 말씀을 내리셨다.

  일상의 통념적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새로운 방식의 자비 복권을 제시해주셨다.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심은 어느 개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시대와 역사의 광장에서 정의와 공정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덧붙여 부처님은 동물을 희생시켜 복을 받고자 하는 의식의 허구성도 지적하고 반대하셨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한 마리를 제주 앞바다로 방사하는 선언에서, 이것이 우리 모두가 생명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만약 부처님이 오늘 여기에 계신다면 사람들의 잠시의 즐거움을 위하여 엄청나게 학대 받으며 사육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동물 쇼를 중단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도 아파하고 기뻐하는 생명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람과 조금의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왜 자비심인가? 그것은 생명의 질서이고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은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씨앗이요, 열매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애의 마음 없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 없이 행하는 수행은 상자에 갇힌 관념이요, 소승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구에게 해악을 끼치는 가해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 즉시 피해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해하는 당신의 마음은 곧 고통과 분노가 기반이 되어 평화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면 모든 사람과 동물 그리고 물과 흙과 돌멩이 풀꽃에게도 자비심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웃에게 자비심을 나눌 때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결국 자비심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

  자비심! 그것은 더불어 평등하고 평화롭고 환희롭게 살아가는 깊은 지혜이며 실천이다.

오로지 이 길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아프지 않겠는가?

수경스님─ “권력과 돈 두바퀴 수레서 내려오라”

권력과 돈, 두바퀴 수레서 내려오라

-수경스님-

“비구란 다만 걸식하는 자가 아니다./세속의 모든 법을 받아 지니고서/어떻게 비구라고 이름할 것인가.//공덕과 허물을 모두 떠나서/언제나 옳고 바른 행을 닦으며/그 마음에 두려움 전혀 없으면/그를 곧 비구라 하리라.”

‘잡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말에 비추어 현재 조계종단의 승가가 처한 모습을 살피면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중생제도는커녕 자기제도도 버거운 집단으로 보일 정도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극히 일부 승려의 비리를 섣불리 일반화하고, 의혹 수준의 문제제기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손익 계산은 세간의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조계종의 승가 집단이 진정 수행 공동체라면, 그러한 비리를 가능케 한 구조를 만들어낸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 집단으로서의 위의는 결코 바로 세울 수 없다.

-‘사회 건망증’ 바라며 방관자세-

“대중이여, 부디 나를 가엾게 여겨 (내 죄를) 지적해 주시오.

죄를 알면 마땅히 제거하리라.” 안거를 마친 부처님께서 대중 앞에서 한 말이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

내부 성찰과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조계종단의 태도는 어떠한가.

종단 운영의 책임을 맡은 어느 누구도 내부 성찰을 촉구하고 대중 앞에서 공개 참회하는 수행자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직 ‘사회적 건망증’만을 해결책으로 여기며 방관하고 있다.

올해 초 나는 ‘불교평론’ 봄호에 ‘조계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조계종단의 문제점을 진단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지금 조계종단은 ‘권력’과 ‘돈’이라는 두 바퀴의 수레를 타고 위태로운 질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나의 문제인식은 현실로 드러났다.

그런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불교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언론이 신정아씨의 얼굴 뒤에 숨어서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까지 거론하며 불교계 전체를 부패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뉘앙스의 보도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독자들에게 ‘사실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보다는 부정적 ‘가치 판단’을 우선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선 조계종은 종단협의회라는 우산까지 들고 나와 일부 승려의 문제로 불교계 전체를 음해한다며 공세적 방어에 나섰다.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는 당연한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이 또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일보의 보도보다 더한 모욕은 상당수 언론에서 조계종 중앙종회의 계파간 알력을 분석하면서 공공연히 ‘여당’과 ‘야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종단 정치권이 세속 정치판보다 한 술 더 뜬다는 식의 보도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이 분명해진다.

조계종단 총무원 집행부의 권력화와 종회 계파 간 권력다툼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러운 사실은 현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불교계 안팎에서 드높은 학덕과 수행 이력으로 칭송을 받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이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종단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수행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실 지금도 대부분의 스님네들은 투철히 수행하고 일념으로 기도하면서 본분사에 충실하고 있다.

조계종 정치권에 대한 나의 비판도 그러한 스님네들의 정진력에 의지하고 있다.

-정치권력과 거리유지도 실패-

요컨대 신정아 사건의 본질은, 신정아씨 개인과 관련된 정부 관료와 일부 문화계, 재계, 학계 인사와 몇몇 스님들의 잇속 챙기기였다.

그런데 왜 불교계 전체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야 하는가.

신정아 사건을 계기로 조계종 정치판의 맨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평소 ‘무소유’를 말하면서 늘어놓던 온갖 거룩한 말씀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는 얘기다.

무소유의 상징인 ‘삼의일발’조차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소유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종단 정치판의 일부 소임자들의 실제 모습은 돈과 권력에 찌들대로 찌들고 속박된 모습이다.

태산 같은 번뇌 뒤에는 그만큼의 깨달음이 있다 했다.

결론 삼아서 그 태산 같은 번뇌의 실체를 적시해 보자.

이미 밝혔듯이 조계종단 총무원과 중앙종회의 권력화와 세속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종단 정치권은 세속의 정치권력과의 거리 유지에 실패했다.

이로써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계종 정치권의 치부가 정적 공격의 수단으로 동원되었고, 이것이 언론사에서 선호하는 정당의 이익과 선정적 보도 태도와 맞물리면서 불교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다.

더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조계종 총무원과 중앙종회에서 해법을 내놓아야 할 때다.

간단하다.

더이상 숨기고 가릴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문제를 직시하고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실천하면 된다.

수행자는 본분사로 돌아가고 총무원은 청정성을 회복하는 길 말고는 없다.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그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삼각산 화계사에서 수경 합장|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화계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