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스님─부처의 마음

부처의 마음 무진장 스님(전 포교원장)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진여본성 찾아야” 우리가 진실로 인생을 복되게 살고자 한다면, 아침저녁으로 십 분씩 참선을 하고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해야 합니다.

불자라면 의무적으로 아침마다 금강경을 독송해야 할 것입니다.

참선도 아니하고 독경도 아니하고 염불도 아니하면서 복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면 먼저 무릎꿇고 예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24시간 모두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버릇 해야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있는 사람의 불성이 본래 차이가 없건만은 다만 어리석은 자와 깨달은 자가 달라서 같지 아니할세.

그런 까닭에 어리석은 자도 있고 지혜로운 자도 있는 것이니라.

세상사람들이 하루종일 반야를 외우는데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밥을 말하되 배고픈 것과 같으니 입으로만 지혜를 논하면 만겁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견성할 수 없느니라.

입으로 밥을 말하되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지혜의 능력을 본래 갖추고 있으며, 결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지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내던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치로 알기만 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입으로 말하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문을 들어도 자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느냐를 생각지 않고 법사만을 원망해요.

법사가 똑같은 법문을 열 번을 해도 여러분이 실천하지 않고 있는 내용이라면 항상 스스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법사는 반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천이 될 때까지 법문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논둑을 걸어갈 때,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걸어가 보면 때때로 매우 좋은 흙을 밟고 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옛날 어른들은 대부분 흙을 빚어 부처님을 조성했어요.

그런데 이 신발을 신고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그 흙을 밟고 걸어가지만 끝내는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깔려 있을 때는 밟고 갔지만 그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흙 앞에 우리는 절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범부가 없으면 부처님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지혜라는 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범부라 할 것이요, 한 생각을 깨달은 즉 부처라 할 것이며, 한 생각이 경계에 부딪히면 곧 번뇌요, 한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보리라 하는 것이니라.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애로 인해 똑같이 법문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어떤 장애로 인해 보리 즉 번뇌의 실상에서 항상 번뇌로 기울까요.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에는 부처이니 만가지 법의 이치가 다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하여 자신 가운데를 쫓아서 진여본성을 보려하지 않는가.

? 보살계경에 일러 말씀하기를 나의 본원자성이 청정하니 만일 스스로의 심성가운데를 바로 알 것 같으면 다 불도를 이룰 수 있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앉은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도리어 본래본심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말이죠 만 피트만 올라가면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끼어 있는 날 구름아래 내려오면 세상이 캄캄하죠.

세상이 캄캄한 게 아니라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에 캄캄한 거죠.

우리 마음 가운데 탐진치라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리워서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지 만일 법문을 듣고 그와 같은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다면 우리는 실로 맑은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도 금으로 만든 부처님도 참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들 심성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참부처님.

조주스님어록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깎아 만든 부처님은 불을 지나가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님이 아무리 찬란해도 용광로를 지나가지는 못한다.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나 나무로 깎은 부처님이나 금으로 조성한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 아니라 참 부처님은 우리들 심성가운데 부처가 참부처이다.

그러므로 그 참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자는 자기의 심성가운데에 착하지 못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왜곡된 마음 내가 하는 그릇된 망령된 마음, 남을 업신여기고 가벼이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교만한 마음, 옳은 진리에 대해서 옳다고 말하지 못하는 삿된 마음, 아첨하는 마음, 내가 아는 오만심을 24시간가운데 불생지양을 행해서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잘 살피고 다른 이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귀의하는 것이 된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대로 행하고 계신가요.

만일 만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 법이 청정하지만은 한 생각 쓸데 없는 망념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니, 악한 생각을 하면 지옥이 될 것이요, 사람이 어리석은 과보를 받는 것이 축생이고,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귀신이니라.

한 지혜가 능히 말년의 어리석음을 구제하나니.

무슨 지옥이 있냐하면 발설지옥, 화탕지옥, 도산지옥도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정말 이런 지옥이 있을까요.

상징언어와 사실언어의 구별이 못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리면 눈에 들어와서 눈병이 나요.

더러운 먼지는 악한 먼지예요.

선한 먼지는 참 좋은 것이에요.

다이아몬드나 금가루는 선한 먼지 아니겠어요.

하지만 악한 먼지를 제거하고 선한 먼지를 넣는다고 해서 눈병이 낫느냐.

이 눈동자가 왜 환하게 보입니까? 선한먼지도 없고 악한먼지도 없어서 눈에 가리워진 것이 없으므로 잘 보이는 것입니다.

이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어서 밝은 것이에요.

우리 성품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선한 것이 가리워지고 악한 생각을 하면 악한 것으로 가리워지고 그러므로 이 성품이 밝아지려면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서 아무것도 없어야만 합니다.

마음 가운데를 향해서 의지하며 자기의 성품가운데서 진실로 뉘우쳐 참회를 해야합니다.

평상스님─깊은 마음으로 배우고 실천하라

**깊은 마음으로 배우고 실천하라**

평상스님

| 무주 백련사 주지 “진실로 불법을 구하는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실천한다.

피안에 가까이 가는 해탈은 죽음보다 더욱 높은 것이네 (誠貪道者 攬受正敎 此近彼岸 脫死爲上)” (법구경) 중에서 (법구경)의 이 경구는 직역하면 ‘진실로 불법을 구하는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실천한다.

피안에 가까이 가는 해탈은 죽음보다 더욱 높은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경구는 배우는 자세가 진정 어디에 근거를 둬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되짚어 준다.

인간은 무엇을 배우든지 진실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일깨우고, 배움과 진실은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그러므로 ‘그 마음은 깊은 마음이다’는 합리적 논리 구조를 자연스레 설정하고 있다.

흔히 즐겨 쓰는 유교용어인 입지(立志)라는 말도 이와 같다.

또 ‘배운 것을 실천하라’는 주문에 익숙해진 것도 여기에 기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곧 실천은 배움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며, 실천이 없는 배움은 허상이라는 점을 통찰한 경구다.

성장에는 늘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부작용은 배운 것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된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무조건 밀어 붙이며 성장하면서 그 뒤에 일어나는 잡음을 무시 하는 습관이 문제의 관건이다.

여기서 도덕성의 부재, 무조건 자기 자신의 이익 에만 급급한 인간상을 지식인상으로 만들어냈다.

불행히도 인류 역사와 같이 해온 이들에게 공자는 ‘소인배’라 칭했다.

최근에 더 두드러졌지만 사회는 소인배들이 더 득세하는 경향이 확실하다.

교육과 수행은 이런 사회구조를 치유하는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소인배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경구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죽음보다 높은 피안을 바라 볼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것을 흔히 말하는 덕성교육으로 연결하면 된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제일 힘든 교육 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덕육(德育)이 실제 지름길을 찾아간다면 바른 수행이 답이다.

이는 배운 것을 바로 실천을 통해 아름다운 이상세계(피안)로 만드는 구조이다.

불자들의 발원도 여기에 모아진다.

‘진실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부처님 말씀을 통해 피안의 세계를 긍정의 힘으로 받아들이고 매진하면 불교 수행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자들 에게 이 말을 첨가하고 싶다.

호인(好人)은 외롭지 않고 어진 사람은 항상 즐겁다.

언제 어디서나 남을 도우면 자기 자신도 이로워지고 언제 어디서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자비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정한 보살행이다.

[불교신문]

월운스님─당신은 향기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향기나는 사람입니까*** -월운 큰스님- 오늘 여기 모이신 분들께 ‘불교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옛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아독존이라는 것은 ‘나 혼자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위 하늘 아래 ‘내’가 가장 높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에서 ‘我’는 부처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다 해당됩니다.

이 고사는 “내가 어떻게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가는 길을 만들어낸다.

남이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남에게 기대해서도 안되며, 잘못되었다고 남을 원망해서도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내가 빨리 가고 싶어 한번쯤 살짝 반칙을 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통하질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다룰줄 알 때에 비로소 복을 맞이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개인 개인이 철저히 자신을 제어하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불교에서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 즉 나와 남이 함께 부처의 길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을 철저히 제어하기 때문에 내가 훗날 재앙받을 것이 없고, 개인 개인이 아름다워지면 이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

나와 남이 한꺼번에 성불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이야기는 가장 건강한 자유를 찾는 길이며, 나 자신이 떳떳하게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나 하나만 바로서면 천하가 바로선다, 내가 변하면 천하가 달라진다, 나 하나가 깨끗하게 살면 대한민국의 4000만분의 1이 깨끗해진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불교를 믿는 긍지, 불교를 믿는 보람을 여기서 찾으셔야 합니다.

나 자신이 무한한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후회없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부여받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깨우치시고 2주일만에 “안되겠다.

중생들을 구제해야겠다” 결심하시고 속세로 내려오십니다.

그 부분을 이야기한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이라는 것인데

『화엄경』 약찬게에 보면 여래 당신께서 산에서 내려오면서 중생들에게 절대 변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를 소위 사자후라고 합니다.

제1 사자후 부분을 천번만번 읽어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것만 제대로 습득해도 불교를 더 배울게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 다같이 합장을 하고 따라합시다.

장하고 귀하도다.

일체중생은 나와 같은 똑같은 부처이건만 스스로의 망상 때문에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지 못하니 가엽도다.

내 이제 방편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여 그들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닫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불교교리의 골자입니다.

‘장하고 귀하도다’ 라는 것은 당신 마음의 감격스러움을 표현하시고, 아울러 부처가 중생이 되고 중생이 부처 되는 길이 참으로 장하고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 자리에서 중생으로 옮겨가고, 중생 자리에서 부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자기들 선택에 달린 것인데, 그걸 모르니 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똑같다고 설법하셨습니다.

너도 나도 다같이 부처라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내가 1대1 같이 맞짱 뜨자고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처님은 본생불이고, 부처님은 수행불 즉 닦아서 드러나신 부처님이에요.

이것은 마치 거울과 같은 원리입니다.

옛날에는 거울이 없어서 청동을 닦아서 거기에 얼굴을 비췄어요.

시커먼 쇳덩어리를 윤이 날 때까지 갈면 얼굴이 비치지만 그걸 갈지 않고 내버려두면 또 녹이 슬어요.

즉 우리는 본래 밝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내 스스로가 갈지 않고 자꾸 녹물만 뒤집어쓰고 있으니 부처님이 보시기에 그런 모습이 아주 딱하신 거에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뭘로 벗겨야는가.

스스로가 녹을 벗겨내야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전지전능한 신에게 벗겨주십사 빌고 있기만 하면 벗겨낼 수가 없어요.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예불드릴 때 뭐라고 합니까? 삼계도사 사생자부라고 하잖아요.

인류의 길을 먼저 걸어 간 사람이 그 길을 일러주고, 그 방법에 따라 이득을 취하는 것은 너희 몫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 몫을 아무도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알아서 다 해 주겠지’라는 생각은 불교에서는 통하질 않습니다.

이 법문을 듣고 ‘올커니! 나도 한번 해보자’ 이 마음을 내지 않으면 불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나옹 스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사를 다 지낸 후에 따님이 서러워서 막 울고 있으려니 나옹 스님이 누이에게 말씀 하셨어요.

“여보게 누이.

울지 말고 염불하시게.

슬퍼하는 마음을 염불로 돌리시게.”

하셨어요.

그랬더니 누이가 “오리버니나 실컷 염불하시오.

눈물이 나는데 어찌 염불을 하겠소”하고 쏘아붙이더래요.

그리고는 염불을 안하네.

얼마후에 점심을 차려서는 스님이 꾸역꾸역 혼자 다 드시고는 싹 다 치워버렸어.

누이가 실컷 울다보니 오래비가 지 혼자 밥을 다 먹고 치워버렸네.

이런 괘씸한 경우가 다 있나.

“오라버니는 사람도 아니여? 내가 울고 있으면 달래고 밥을 좀 먹어보라고 해야할꺼 아녀.”

누이의 말에 나옹 스님이 받아치길 “아까 누이가 뭐라 그랬는가.

누이 대신 염불하라고 그랬으니 밥도 내가 대신 먹고 화장실도 내가 갈 터이니 자네는 계속 울고 있게나.”

누이가 “어째 내가 지금 배가 고픈데 내 밥을 오라버니가 먹소.”

하자, 스님은 “그 말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네.

염불도 자기 몫이라고, 내 염불은 내가 하고 누이 염불은 누이가 해야지 어찌 그걸 남이 대신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하셨답니다.

이 말에 나옹 스님 누이가 번뜩 깨닫고 염불을 했다는거 아닙니까.

그와 같이 스스로가 닦고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가장 기쁜 것입니다.

속담에 하루에 고기를 다섯 상자씩 보내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일러주라고 한 것과 같이 자기 스스로가 싸워서 자기 자신의 악습을 이겨낸 뒤에 기쁨을 누리는 것을 희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생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선각자께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걸어가시고 어디에는 평지가 있고 어디에는 샘이 있다는 것을 일러주신 거에요.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서 가기만 하면 되는데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노정이라고 하는 것이 가만히 보면 일반 여행길이라고 하면 들도 있고 산도 있고 물도 있고 그렇지만, 우리 인생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지.

내가 젊었을 때 유행가를 좋아했는데, 부를 줄은 몰라도 가사를 들어보면 그렇게 좋아.

참 신기한게 인생길을 읊는데, 희안하게 잘 맞어요.

인생길 굽이굽이, 슬퍼서 울고 기뻐서 웃고 그런단 말이지.

부처님도 인생을 굽이굽이 보셨는데, 굽이굽이가 산이 됐건 물이 됐건 한결같이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그 자체가 고통이요, 깨치신 분에게는 그 자체가 극락이에요.

똑같은 보름달을 보고도 마음이 슬프면 저 달도 슬퍼서 내 마음처럼 저렇게 슬프게 울고 있고, 내 마음이 기쁘면 저 달도 기쁘게 춤을 추고 있단 말이지.

실제로야 달이 그 높은데 앉아서 우리 중생이 기분 좋으면 웃고, 기분 나쁘다고 콧방귀라도 뀌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자기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남을 미워하고 남도 비뚤어져 보이는 등 변덕을 부리는 거에요.

부처님은 중생들이 오랜 습관에 의해서 그렇게 위험의 길, 고난의 길 그 그 험한 길을 잘 일러서 가는 길을 잘 이겨내고 가는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이 방법이 바로 네 마음으로 네 어려움을 잘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업자득이라고 해요.

자기가 나쁜 업을 지으면 또 다른 나쁜 업을 받고 맑은 업을 지으면 맑은 업을 받는다.

우리가 본래 맑던 자리에서 왜 중생이 되었겠습니까.

언젠부터인지도 모르게 우리는 중생이 되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꿈에 비유를 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잠이 슬며시 들어버리듯이, 자기도 모르게 미혹의 세계를 고개를 돌려서 홀연히 맑은 하늘에 구름이 한점 구름이 생기듯이 허망한 마음이 생기는데, 허망한 마음을 이름 짓기를 무명이라고 합니다.

이거 잘못 외어서 ‘광목’이라고 하지말고 ‘무명’이라고 합니다.

무명이 생기는데 이게 없을 무(無)에 밝을 명(明)자입니다.

본래 밝은 자리였는데 밝지 못한 것이 조금 생기고, 이것이 바이러스처럼 새끼를 칩니다.

무명이 쌓여가다 보면 사람이 달라져요.

처음에는 이러면 안되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오히려 안하면 재미가 없는데… 이렇게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변한다고 하잖아요.

불교신자는 내 마음을 그런데다 허용하지 말고, 틈새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돌아보고 자기를 찾으라는 겁니다.

뻔히 아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찾는 나방처럼 뛰어드는게 우리 중생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중생들의 실상을 잘 알고 그 길로 가지 말라고 계를 내려주신 겁니다.

우리가 예불문을 외울 때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5분향을 독송합니다.

이 다섯가지가 갖춰지는게 향기가 난다고 그래서 오분향이라고 합니다.

계와 정과 혜와 해탈향으로 부처님께 향을 몰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때 ‘나는 향기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계향은 맨 첫단계에요.

계를 잘 지키는 것으로 향을 삼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겁니다.

계가 뭡니까.

내 마음과 뜻을 가지고 부당한 짓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남의 생명을 뺏지 말고, 부당한 남의 것을 취하지 말고, 부당한 남의 남자, 여자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계법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을 향기로운 사람, 그 향기를 계향이라고 합니다.

계를 잘 지키는 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미망에서 벗어나 맑고 맑은 부처님 세계로 홀연히 선업의 씨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불교가 다들 어렵다고 말합니다만 뻔히 틀린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그 어려움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불교가 쉽기는 세수를 하다 콧물 닦는 것보다 쉬운 것이니, 이는 콩 심은데 콩나는 법과 같은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복스러운 일을 해야하고, 부정한 업을 받기 싫은 사람은 부정한 일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원리입니다.

이게 어렵죠.

하지만 어려운줄 알고 도전해나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스스로를 가꾸어서 내 몸값을 올리고 나에게서 향기가 나도록 만들어 나 자신을 값진 사람으로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라.

스스로 나를 높이는 길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유아독존의 진짜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불교 믿게 되신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정향 혜향 해탈 지견향 등 이 다섯가지를 갖추면 바로 부처님의 핵심, 법신이 되는 것 아닙니까.

계향 정향… 독송할 때 ‘이게 뭔소리여, 개장국 냄새라는 소리여’ 라고 생각하지 말고, 예불 드릴 때 계를 잘 지킬 때 나는 향기가 무엇일건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평소 언동에서 향기가 나는가.

나의 말마디를 얘기 듣는 대상이 다시 듣고 싶어하는가.

내가 지나가는 발자취가 과연 언제 돌아봐도 언제든지 떳떳할 수 있는가.

모퉁이 모퉁이 마다 돌아봐도 내가 언제든지 극락에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나를 값진 사람으로 만드는 길이 여기 있는데, 내가 이 불법 만난 것을 어찌 경하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동감하십니까.

제 말씀에 조금이라도 동감하신 분은 갈수록 삶이 이런 곳이구나, 참으로 기쁘도다 라고 깨닫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시련을 만나고 곤경에 처해도 늘 법문을 마음에 새겨서 ‘나는 불자다’ 하는 신념으로 살다보면 여러분들의 영향을 받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 말씀이 이 사회를 바로잡을 큰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