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봉스님─작은일 하나에도 우주 진리 담겨있어

작은일 하나에도 우주 진리 담겨있어 / 대구 대원사 조실 벽봉 스님

단조로운 생활 속에 염불의 끈을 놓지 않는 벽봉 스님.

노스님의 잔잔한 모습이 꽃보다 아름답다.

기자가 팔공산 자락의 대원사를 찾았을 때, 자그마한 체구의 벽봉(碧峰·84) 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 다시 도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빠르지는 않지만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오전 포행을 다녀 오신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정지되어 있는 듯 고요하고 스님의 눈은 영원한 진리의 길로 이어진 듯 그윽하다.

법당 앞에서 기자를 본 스님은 봄볕처럼 따뜻하고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동자의 천진면목이 드러나는 웃음이랄까.

벽봉 스님은 3년 전 신축법당 지하에 고인 빗물을 밤새 퍼내다 쓰러져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경험이 있다.

이후 스님은 더 이상 밭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 포행을 중요한 일과로 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작은 일 하나에도 우주의 진리와 생명의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잊지 않는 생활 속 수행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벽봉 스님의 일상은 하루 두 번 한 시간 남짓 동네 한바퀴를 도는 포행시간을 제외하면 새벽 4시에 일어나 염불하고 책보고 공양하는 것이 전부다.

스님의 수행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 걸까? 포행 후 요사채로 들어와 초를 켜고 향을 사르는 스님에게 조용히 여쭈었다.

“스님, 늘 방편으로 삼는 화두가 있으십니까?” “‘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라고 염하지.”

“무슨 뜻인가요?” “뜻? 없어요.

진언이지” 생각 너머 본래면목을 찾는 정진을 쉼없이 이어가고 있음을 스님의 말 한마디에 알 수 있었다.

산책을 할 때, 스님이 쉼없이 입을 오물거렸던 이유도 이제 알았다.

스님은 “3년 전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을 때조차도 오직 염불삼매에 몰입했고, 6시간 만에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날 수 있었다”고 먼 옛날 이야기를 하듯 말씀하신다.

“나는 무조건 부지런하면 좋은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새벽4시쯤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맞아요.

새벽2시에도 1시에도 일어나 일을 했더니 그만 어지러워 눕게 됐거든요.”

3년전이라야 그때도 여든이 넘은 나이인데 새벽 1~2시에 일을 하면 몸에 큰 부담이 올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스님은 직접 몸을 움직여 사찰을 돌보며 밭일을 못하는 것을 미안해 하셨다.

불현듯 노스님의 출가인연이 궁금해졌다.

“열 서너 살 쯤 되던 해에 해인사 약수암으로 출가한 누님을 따라 절에 가게 됐지요.

그게 인연이 됐어.

어려운 시절 집에 있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텐데 정말 잘한 일이야.”

스님의 출가는 전생에서 이어지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또, 어릴 때부터 무작정 공부를 하고 싶었다는 스님은 나이 30이 넘어 중학교에 들어가고, 40이 넘어 경북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명대 교육대학원까지 수료하는 열성을 보였다.

스님은 서양학문을 공부하면서 불교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를 더욱 느끼게 됐다며 철학은 불교와 비슷하지만 그 깊이를 따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18년째 스님을 시봉해온 이춘자(61)보살은 벽봉 스님의 삶도 이와 같다고 말했다.

“스님은 한없이 부지런하고 머슴처럼 일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3년 전만해도 아침 저녁 예불시간과 하루 세 끼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밭에서 산에서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래서 옷은 항상 더럽혀져 있었지요.

그런데도 스님은 한사코 그 옷을 그냥 입고 다니셨어요.

‘검은 물 들인 셈 치면 된다’면서요.

괜히 시봉하는 보살들이나 스님 체면 생각해 안달이었지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은채 묵묵히 일만 하셨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검으면 검어서 좋고 희면 희어서 좋은 분이었다.

게다가 평소 말 없는 분으로도 통했다.

예나 지금이나 누가 와도 뭐라 하는 일도 없고, 하루 종일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법도 없다.

또 왜 이렇게 했느냐 추궁하는 일도 없다.

말은 없지만 실천으로 보여주는 스님의 가르침에 신도들이 모두 좋아하고 상좌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80노구에도 직접 예불하고, 필요하면 손수 몸으로 행으로 보여주시는 벽봉 스님이 자비스런 시골 할아버지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스님의 검소함 또한 정평이 나 있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절대 내 것을 사는 법이 없었던 스님은 그저 일하고 기도하고 불사하는 것 밖에 몰랐다.

평생 옷 한 벌 먹을 것 하나 사는 법이 없었던 스님은 혹 외출해야 할때면 꼭 버스만 타고 다녔다, 그것도 입석 버스만.

벽봉 스님은 평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늘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로 무심의 법을 은연중 설했다.

상좌들에게 늘 이르듯 평생 생활 가운데 바른 것을 실천하며 오롯이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벽봉 스님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행의 바른 지침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수행을 쉼 없이 일관하는 노스님의 자취에서 푸른 향의 서늘함을 이렇게나마 느낄 수 있음은 분명하다.

벽봉 스님은 1923년 성주에서 출생한 벽봉 스님은 1936년 해인사에서 석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39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48년 석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49년까지 해인사에서 5하안거를 성만하고, 해인사 강원 사집과를 수료했다.

거창 연수사 칠곡 송림사, 대구보현사 주지를 거쳐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고 76년에는 조계종 총무원 종정 사서실장을 91년에는 대구 보현사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소임을 맡기도 했다.

벽봉 스님은 1993년 대원사 주지에 취임한후 현재 대구 팔공산 대원사 조실로 뭇수행자들의 바른 지침이 되고 있다.

벽봉 스님의 가르침 어릴 때부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 40이 넘어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지요.

철학은 불교와 매우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그 깊이가 불교를 따르지 못합니다.

반면, 불교는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평생 스스로 닦아가야 하는데, 철학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나의 은사 석우 스님께서는 항상 “이놈아 잘해라” 하시며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셨지요.

나는 상좌들에게 “수행은 누가 대신 할수도 없고 본인이 바르게 하는 것이니 열심히 하라”고 이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바른 것이 있으니 항상 바른 마음, 바른 생각, 바른 행동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작은 일 하나에도 우주의 진리와 생명의 가르침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것도 강조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깨침을 얻으려는 수행인의 본분인 것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일 하나에도 온 마음을 쏟아 바라본다면 작은 옥수수 한 알에도 온 우주 생명의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고 하찮은 옥수수 하나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연히 바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마음은 바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바른 행동으로 옮겨져 생활속에서 스스로 정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자의 삶이요, 수행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가르침이나 수행이 멀리 고차원적인 그 무엇이라는 기대와 환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번뇌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돈을 삶의 척도로 삼고 생활하다 보니 끝없는 욕심으로 번뇌에 끄달리지요.

바른 마음으로 바른 생각을 갖고 바른 행동으로 정진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좋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좋은 것을 탐하는 법이니까요.

자기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추고, 나머지는 남을 위해 써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항상 번뇌에 끄달리는 것입니다.

나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선사의 가르침대로 살기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아침 저녁 예불시간과 하루 세끼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밭에서 일을 했지요.

가을에는 밭작물을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땅을 파서 다음해 농사를 대비했습니다.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하는 동안 작은 일 하나에도 우주의 진리와 생명의 가르침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깨 한 대공과 옥수수알 하나에도 우주의 진리와 생명의 가르침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어느덧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과 수행, 기도와 정진이 따로 없이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끔 힘든 일도 생기지요.

모두 수행의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모두 끊임없이 배우는 수행의 과정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어렵다 힘들다 생각했던 일들이 저절로 풀려나갈 것입니다.

예전처럼 일을 못하게 된 요즘도 나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 속에서 단조롭다 지겹다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하루 두 번의 포행시간에서 또 다른 수행의 맛을 느낍니다.

내가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정성을 다하지요.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본심미묘진언’을 염하는 가운데 건강도 차츰 좋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일을 하는 재가불자들도 일을 수행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가정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곤 하는데 기도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기도를 하는 ‘편리한 사고’를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은 불자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불자의 삶 자체가 기도이고 수행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이를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연법을 철저히 믿고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늘 참선하는 마음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연법을 확실히 믿기만 해도 삶 자체가 조심스럽고 신중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생명이 불성을 지녔음을 알게 되고, 당연히 그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따라 지혜도 갖추고 착한 일만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깊은 믿음이 있어야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가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마대사와 양무제 사이에 오고간 유명한 이야기를 통한 가르침을 명심해야 합니다.

달마가 불심이 강하고 공덕을 많이 쌓은 양무제에게 “공덕이 없다”고 한 까닭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수행을 통한 무루(無漏)의 공덕이야말로 참 공덕이며, 밖으로 쌓는 공덕은 인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루(有漏)의 공덕일 뿐이라는 간절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즉 출가자라면 불사도 좋고 포교도 좋지만 먼저 치열한 수행을 통한 자신의 본래면목을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올바른 포교와 불사를 할 수 있고, 참된 공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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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스님─집착 놓을때 업장 사라지고 좋은 부처님 씨앗 자라난다

집착 놓을때 업장 사라지고 좋은 부처님 씨앗 자라난다

-진우스님-

상대적 생각과 반복행동 등 과거생활 농축된 것이 업장 상대적 마음만 있으면 중생 상대가 허상임을 알면 부처 참선으로 생각을 비우고 보시로 내 마음을 바꿀 때 인생 항로의 새길도 열려 여러분, 오늘은 업(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업장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보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또한 일체유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장을 말할 때 ‘자업자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통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내가 힘든 것은 그만큼 업장이 두텁다는 증거에 다름 아닙니다.

이 업장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행과 불행, 대소, 노소, 희로애락, 극락과 지옥 등 어느 하나가 생기면 다른 쪽도 따라서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좋은 것만을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나쁜 것만 없앤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반대되는 둘을 다같이 없애는 것이 바로 해탈이고 피안이며 성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과 형상, 욕심과 집착, 정에서 떨어져서 무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두터운 업장이 사라지고 좋은 불종자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업장이 사라지고 좋은 불종자가 생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을 해서 생각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시를 비롯한 육바라밀을 통해서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없어지는 것처럼 마음은 그렇게 생겼습니다.

따라서 행복을 구하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의 불행한 마음도 생기게 됩니다.

세상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은 서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높은 것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생기고, 큰 것이 생기면 작은 것이 나타납니다.

또 건강이 있으면 병도 있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생기면 다른 하나가 반드시 생겨나는 필연적인 것들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반드시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니 욕심을 내지 않으면 저절로 괴로움도 없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자명해집니다.

더불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빈부귀천 또한 상대적인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를 보기 때문이고, 귀한 것은 천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 또한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더 가난한 것에 비하면 부자가 되고, 귀한 것은 더 귀한 것에 비할 때 천한 것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과 불행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비교되는 마음이 항상 교차되기 때문에 행과 불행도 반복된다는데 있습니다.

마음이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쪽만 바라보면 불행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작고 낮은 곳을 바라보게 되면 불행도 사라지게 됩니다.

행복하고 불행한 마음이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어떤 분들은 ‘나는 부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권력과 명예욕도 없는데 왜 힘들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를 너무나 모르는 생각입니다.

이미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코 속상하고 마음 아플 일이 없습니다.

업이라는 것은 그렇게 나타나게 됩니다.

오랜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반복되고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업은 바로 과거의 모든 것이 농축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갖는 상대적인 생각 역시 버릇이라고 말하는 습관에 해당합니다.

행복하려는 마음, 불행하지 않으려는 마음, 즐거워하려는 마음, 괴롭지 않으려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동시에 불행이 생기고, 즐겁고자 하면 괴로워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자동으로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행복하면 할수록 불행도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생사를 없애는 척도라 할 수 있는데, 생각이란 것 역시 상대적으로 이루어져서 시시비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행과 불행이 교차하고 생과 사가 거듭되어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업이란 이렇게 상대적인 생각과 행동이 반복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업이 좋다는 것은 상대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고, 업이 나쁘다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보고 듣는 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돈 많고, 권세와 명예가 높다는 것은 모양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내 마음이 상대적으로 불편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비교함으로써 불행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의 마음, 즉 업장에 의해서 행과 불행이 다르고 욕심의 크기에 따라 업장의 폭도 넓어지고 커지게 됩니다.

결국 잘되고 못 되는 것, 잘 살고 못사는 것도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만드는 것인데, 내 마음이 그렇게 된 것은 수많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망상을 하며 습관적으로 버릇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각자의 업입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업이 만들어 낸 모양이고, 그 세상을 바라보는 것 또한 나의 업에서 파생된 내용들입니다.

일체가 마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만들어낸 상대적 세계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실체 없는 허상인 실체, 즉 업장만 있을 뿐인데 이것 또한 상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윤회 반복만 있을 뿐입니다.

이 실체 없는 업장과 상대적인 마음만 있으면 중생이고, 이것을 없애면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업을 바꾸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인데,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 중에서도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꿈틀거리는 업장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업이란 상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욕심이 생기고 없어질 때 마음을 비우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들어 참선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금강석처럼 굳어있는 업장을 녹이려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수행과 더불어 해야 할 중요한 것이 보시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의 업장을 녹이고 바꿀 수 있으려면, 내 것이라고 고집하고 있는 생각을 비워서 업을 없애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자꾸 비워야 하는데, 이때 보시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주는 마음 없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보상심리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여 자신의 불행을 없애고 또한 다른 업을 쌓지 않게 됩니다.

무조건 줌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비워나가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업도 사라지고 상대적 생각도 없애게 됨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나 생사까지 해탈하게 됩니다.

특히 보시 중에서도 법보시가 좋습니다.

그리고 보시와 더불어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도 함께 행해야 합니다.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역시 업장을 소멸하고 마음을 비우는 최적의 수행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행과 육바라밀 실천에 힘쓰다 보면 생사윤회, 도탄, 사바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내 팔자가 어떻다’거나 ‘내 운명이 어떻다’고 비관하고 의기소침해 하지 마시고, 오늘부터는 수행하고 보시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으로 업장을 녹여서 인생의 항로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일관스님ㅡ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참 세월이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

길가의 나무들은 붉은색 노란색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 있다.

거리의 나무들처럼 삼라만상이 다 변화하고 있고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조건 지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좀 무딘 것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연이 가르쳐 주는 것도 많고, 세월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는 것도 많은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현재 격고 있는 세상의 많은 괴로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부처님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왕국을 버렸다.

우리 역시 마음속으로는 그 답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에 대한 아픈 문제를 묶어놓고 틀어막는 많은 기술을 익혀왔다.

그러나 부처님의 의문이란 바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진주가 자라기 위해서는 진주조개 속에 거친 모래알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아픈 문제를 조개 속의 거친 모래알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무시하거나 알지 못하고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부처님은 ‘우리가 윤회라는 괴로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대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무지 때문이다.

’ 말씀하지만 우리 자신의 정신을 해방시켜 대자유인으로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그 거친 모래알이다.

거친 모래알은 고통, 괴로움, 혹은 불편한 마음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비유다.

부처님은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 슬퍼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늙는 것을 싫어하고, 병드는 것을 싫어하며, 내키지 않는 상황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는 한순간도 완전히 편안할 때가 없다.

우리의 몸은 순간순간 변하지만 결코 완전히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다.

마음은 더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편한 마음 상태는 전쟁, 박해, 투쟁, 경쟁, 억압, 잔인함 등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이야말로 우리의 최상의 친구라고 여긴다.

괴로움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는 괴로움의 거친 모래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진주로 만드는 재료로 활용함으로써 ‘진정한 존재’ 즉 진정한 보석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통과 괴로움은 더 이상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며 우리를 이끄는 ‘도반’으로서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바로 행복의 길로, 해탈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지금 다시 원력을 세워서 100일 자비실천수행 기도를 시작하자.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터전에서 꾸려 갈 수 있다.

– 일관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