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참 세월이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
길가의 나무들은 붉은색 노란색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 있다.
거리의 나무들처럼 삼라만상이 다 변화하고 있고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조건 지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좀 무딘 것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연이 가르쳐 주는 것도 많고, 세월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는 것도 많은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현재 격고 있는 세상의 많은 괴로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부처님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왕국을 버렸다.
우리 역시 마음속으로는 그 답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에 대한 아픈 문제를 묶어놓고 틀어막는 많은 기술을 익혀왔다.
그러나 부처님의 의문이란 바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진주가 자라기 위해서는 진주조개 속에 거친 모래알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아픈 문제를 조개 속의 거친 모래알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무시하거나 알지 못하고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부처님은 ‘우리가 윤회라는 괴로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대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무지 때문이다.
’ 말씀하지만 우리 자신의 정신을 해방시켜 대자유인으로 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바로 그 거친 모래알이다.
거친 모래알은 고통, 괴로움, 혹은 불편한 마음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비유다.
부처님은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 슬퍼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늙는 것을 싫어하고, 병드는 것을 싫어하며, 내키지 않는 상황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과 떨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는 한순간도 완전히 편안할 때가 없다.
우리의 몸은 순간순간 변하지만 결코 완전히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다.
마음은 더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편한 마음 상태는 전쟁, 박해, 투쟁, 경쟁, 억압, 잔인함 등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고통과 괴로움이야말로 우리의 최상의 친구라고 여긴다.
괴로움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는 괴로움의 거친 모래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진주로 만드는 재료로 활용함으로써 ‘진정한 존재’ 즉 진정한 보석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통과 괴로움은 더 이상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며 우리를 이끄는 ‘도반’으로서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바로 행복의 길로, 해탈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지금 다시 원력을 세워서 100일 자비실천수행 기도를 시작하자.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터전에서 꾸려 갈 수 있다.
– 일관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