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큰스님이 직접 겪으신 관음 가피력◆ 이 이야기는 혜암 큰스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입니다. 여기 혜암 큰스님은 얼마전 열반에 드신 종정스님이 아니십니다. 근대 선종사에 큰 획을 긋고 오래전에 열반에 드신 큰 스님이십니다. 간단히
혜암스님
에 대해 말씀드리고 글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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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큰스님이 직접 겪으신 관음 가피력◆ 이 이야기는 혜암 큰스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입니다. 여기 혜암 큰스님은 얼마전 열반에 드신 종정스님이 아니십니다. 근대 선종사에 큰 획을 긋고 오래전에 열반에 드신 큰 스님이십니다.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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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절대 평등이요 절대 公器” 만암 종헌스님
인생과를 간단히 말하면 인연이라 말할 것이다. 인(因)이란 우리의 본성이고, 연(緣)이란 우리들의 세계 바로 연이다. 그러면 인연의 뜻은 무엇인가. 인은 종자와 같고 연은 물과 흙 같으니 아무리 종자가 있더라도 물과 흙의 연을 맺지 않으면 발생치 못함과 같다. 대개 사람은 개개인이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이성은 천지보다 먼저 하여 그 시작이 없고 또한 천지보다 뒤에 하여 그 종말이 없다. 그러므로 곧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부른다. 이성은 사람마다 같을 뿐 아니라 중생과 모든 부처가 함께 동일하다. 모든 부처는 연을 따라 본성을 여실히 수련하는 까닭으로 본래 가진 공덕을 많이 지니고 있으나 우리 중생은 연을 따라 작업의 차별이 있으므로 지혜롭고 어리석기가 중생마다 차별이 있어 선악의 인과응보가 다르다. 이와 같이 이생, 저생에 깨끗한 연이 물듦에 따라 선(善)을 짓고 악(惡)을 지음이 다양하다. 그러므로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며 이 다함없음을 따라 생사(生死)가 무궁하여 이 무궁함을 따라 모든 부처님의 인연이 더욱 무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관은 인연이라 부른다. 생(生)이라 함은 만물의 번영함과 같고 사(死)라 함은 만물의 조락함과 같다. 그러므로 번영이 곧 쇠락의 근본이요, 쇠락이 곧 번영의 근본이다. 사람의 생사도 이와 같아서 같은 뿌리 다른 가지에 그 간극이 천지차이다. 이른바 깨달은 사람의 중대한 관념을 둘 것은 못 되나 지혜롭고 어리석음은 물론하고 생사에 대한 관념이 경중의 차별까지는 있을지라도 아주 무심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른바 어리석거나 현명치 못한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자기를 위하여 무수한 행복과 영원한 안락을 꿈꾸므로 그 생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근심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바른 길을 보이는 교화방편은 봄바람이 높고 낮음 없는 것 같아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인연이든지 이 몸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초목처럼 썩어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가운데 도덕으로 자기를 닦으며 공덕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여 즐겁게 하고 남의 근심을 근심하는 것이니 생사의 관념은 동일한 경우나 그 가볍고 무거운 차별은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생사관이 그 정도에 따라 이와 같이 달라 이는 세간상에서 면할 수 없는 차별이거니와 만약 출세간상에서 논한다면 생사가 청천에 뜬 구름이 일어났다 흩어짐과 같으니, 꿈과 같이 허망한 나의 육신이 법신과 같다. 멸하여도 멸함에 슬프지 아니하니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요 생하여 생함에 착하지 아니하니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로다. 이 생사관이란 또한 대체 어떤 것인가? 내가 불교관을 말하고자 함은 마치 우물안 개구리의 격을 면치 못하는 줄을 안다. 각기 그 지식의 깊고 얕음을 따라서 우열의 차이는 없지 않다 할지라도 그 기량을 따라서 느껴지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내 개인의 소감 일부분을 펼친다. 특히 나는 불교의 첫 머리에 절대 평등이 절대 공기(公器)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각 세존께서 소아(小我)를 버리시고 대아(大我)를 성취하시고, 자(自)와 타(他)가 둘이 아닌 가운데 대자대비로 중생의 근기를 따라 이끌어 주시되 진리도 설하시고, 사상도 설하시며 권(權)과 실(實)도 설하시어 어둠 가운데 밝은 빛을 지으시고, 길 잃은 자에게 바른 길을 보이시는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선택이 없고, 얻고 버림이 없는 무한의 교화방편은 마치 봄바람이 높고 낮음이 없는 것과 같다 . 또한 봄바람은 원래 높고 낮음이 없지만 꽃가지가 스스로 깊고 얕음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중생의 근기가 똑같지 않으며 도의 깊이가 하나같지 않아서 도에 나아감이 느리고 빨라서 천차만별하고 우열이 각각 다르다. 이는 교화받는 자에 한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도가 원만히 성취되어서는 또한 절대 평등이요 절대 공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도리는 사람에 있고 사물에 존재치 않음이 아니며 인격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이 진리를 찾아 근원으로 돌아가니 허공이 모두 다 녹아 없어진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나의 불교관은 허공처럼 원융하여 남고 모자람이 없고,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니며 선악이 따로 없어 원수와 친한 이가 하나와 같으므로 절대평등이요, 절대공기라 부른다. 연기 사라지고 구름 걷힌 뒤에 밝은 달밤은 깊고 깊다. 붉고 푸른 빛이 도대체 무슨 빛이냐. 탄연한 옛부처 마음이다. – 〈만암집〉에서 발췌
만암스님
(1876~1956) 만암 스님은 1876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해 1889년 장성 백양사에서 도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종헌, 법호는 만암.
환응 강백으로부터 전강을 받았으며, 석전 한영 스님 문하에서 경학을 공부했다.
백양사 운문암과 청류암에서 경을 가르치다가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됐다.
당시 교학에 통달한 대강백으로 명성이 높았던 스님은 학명스님과 함께 참선 수행, ‘이 뭣꼬’를 참구한지 7년만에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다.
평소 승풍진작을 위한 선농일여(禪農一如) 사상을 몸소 실천했고, 불교중흥과 국운융창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근대 한국불교의 사표가 됐다.
특히 가난한 중생들을 위해 사중에서 죽을 쑤어먹으면서 구휼에 앞장서기도 했다.
1929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고, 1946년 호남 고불총림(한국 최초의 총림)을 결성, 선교겸수의 종합도량을 설립하였다.
이어 1947년 종립 정광고등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대중들의 만장일치로 조선불교 교정으로 추대되었고, 1954년 조계종 종정에 취임했다.
1956년 세수 81세, 법랍 71년으로 백양사에서 좌탈입망했다.
불교신문 2102호/ 2월4일자
노력한 만큼 달라지는 인생
서암큰스님 우리 중생의 번뇌는 창공에 구름이 일듯이 무한히 일어 납니다.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라는 말은 팔만사천이란 숫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많고 많은 번뇌가 무한히 일어 난다는 말이지요.
중생들이 팔만사천가지 번뇌를 갖고 있으니, 그 번뇌를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서 많은 교설을 한 것이지, 부처님은 한 법도 설하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무유정법無有定法’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라 합니다.
부처님 법이란 꼭 ‘이것이다’라고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부 하나로 통합니다.
그러니까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모르고 보면 말이 다르지만 알고 보면 다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온갖 번뇌를 소멸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모든 것은 누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지은 번뇌를 없애려면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없애는 것이지 어느 부처나 어느 신이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평등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배급을 주듯이, 주는 사람이 마음대로 없애주거나 보내준다면 얼마나 불평등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한 주먹 쥐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까 한 주먹이 생긴 것입니다.
또 여기에 내가 보태서 누군가에게 주면 저쪽에서도 또 다시 나에게 무엇인가 보태줍니다.
산다는 것이 다 이런 반응작용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이지, 어느 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인연법이고 또 윤회법輪廻法입니다.
어느 신이 ‘너는 미우니까 지옥 가거라.
‘ 해서 지옥 가고 ‘너는 예쁘니 천당으로 가거라.
‘해서 천당으로 보내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출가하기 전에는 머리도 기르고 구두도 신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중이 되어 얼마 동안 수행을 하니까 꿈을 꾸어도 머리 깎은 중의 모습이지, 머리 기르고 구두 신은 모습은 꿈에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어느 창조주나 조물주가 나를 그렇게 변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몇 해 동안에 나 스스로 그렇게 변해 간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여 술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면 어떤가요? 그런 사람은 돈이 없으면 논밭을 팔아서라도 술을 사 마시겠지만, 본시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술이 한강으로 흘러 가도 그까짓 것은 본체만체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술의 세계가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술의 세계를 지어서 술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부 자업자득이고, 이것이 윤회법이고 인과법입니다.
콩을 심어야 콩이 나지 팥을 심었는데 콩나는 법은 없어요.
권력 있는 사람이 심으나, 다리 밑의 거지가 심으나, 남자가 심으나,여자가 심으나, 잘난 이나, 못난 이나, 누가 심든지 콩을 심으면 그 자리에 콩이 납니다.
이 이치는 아무리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모두 서로 속이며 살아 갑니다.
내가 불행해지면 부모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합니다.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고 남을 원망합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내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반성하고 정진하고 노력해서 그 원인을 개선해야 하는데 남을 원망하게 되니까 점점 더 불행으로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불교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불교를 알면 길가에 수많은 재물이 흩어져 있어도 줍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닐진대 그 재물이 어떻게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수용하는 것이 불법이요, 인과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