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 ‘고마운 마음을 연습해야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고마운 마음을 연습해야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 월호 스님

하루는 인근의 젊은 불자 부부가 찾아 왔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맞벌이 부부의 애환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이를 키워주시는 어머니와 아이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얼굴에도 그러한 마음이 나타나 보였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당장 맞벌이를 그만둘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이러한 경우,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미안한 마음은 불편한 마음입니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선 스스로가 불편하고, 또 그 상대방도 편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 또한 뻔뻔스러울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습니다.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좋을지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미안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음은 방송국의 수신 안테나와 같아서 동일한 주파수를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은 미안해 할 일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은 고마워 할 일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므로 미안한 마음을 연습하다보면 자꾸만 미안해할 일이 생겨나고, 고마운 마음을 연습하다 보면 자꾸 고마워할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가 나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어렵게 대한다면, 내 마음인들 편하겠습니까?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미안해하는 느낌이 전달되니까, 아이도 불편해서 오히려 미안스러운 일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짜증을 내거나 자꾸 아프거나 하는 식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래 엄마가 항상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이렇게 잘 커주어 정말 고맙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아이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고마워하는 상대에게는 자꾸 고맙게 생각 할 일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대방의 기대심리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나 직장 상사, 동료 등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고마워할 일이 생겨납니다.특별히 누군가가 나에게 고마운 일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그대로를 고맙게 생각함으로써, 실제로 고마워할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주인 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탄생도 당신의 삶도 당신의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감사할 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월호스님

/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

원명스님─마음을 올곧게 써야 成佛 이뤄

마음을 올곧게 써야 成佛 이뤄

-원명스님-

불자들이 절에 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백팔참회, 참선, 염불 등을 하는 것은 마음 가득 자리하고 있는 탐·진·치 삼독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거울에 먼지가 가득 끼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마음에 삼독이 가득하면 성불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자들은 자신의 업장을 소멸해 복을 짓기보다는 남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참회에 그치고 있습니다.

또 절에 오는 불자들이 욕심에 찬 발원만 하고 갑니다.

“돈 많이 벌게 해 달라.”, “아픈데 낫게 해달라.”는 발원을 하고 가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마음을 갖든지 부처님이 복을 주고, 약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마음에 욕심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 부처님에게 절을 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게 부를 축적한다 해도 그것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선량한 사람을 속이는 등 부당한 방법으로 쉽게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얻으려는 이기적인 발상이 팽배한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적 발상 때문에 불신이 쌓이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은 손해본다는 마음으로 형제·가족·이웃을 대한다면 복은

자연스럽게 찾아 올 것이며, 불신도 싹트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예쁘다.”하면 무릎에 와서 앉습니다.

하지만 버럭 화를 내면 멀리 달아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복이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보다는 자신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내 이웃에게 마음을 썼는지 먼저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어머니들은 딸에게 “결혼하면 시집살이 못한다고 집 얻어 달라 해라.”라며 자식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은 딸이 자신의 며느리로 들어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또 결혼한 딸이 남편과 다투고 집에 오면 “당장 이혼해라.

남자가 어디 그 사람 한 사람 뿐이냐.”고 말합니다.

이렇다보니 이혼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것이 업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집안에 그렇게 교육받은 며느리가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이 이혼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부인들의 과욕은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부인들의 과욕 때문에 남편들만 불쌍해졌습니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대우받고 살았지만, 최근에는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지만 부인들은 항상 부족하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것은 남편에게 도둑질하라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혹여 조금의 여유 돈이 생겨 부모님에게 드리면 부인들은 “내가 식순이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남편을 다그쳐 결국은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그렇다보면 가정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도량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절에 가서 스님, 스님하며 보살인 것처럼 행동하는 불자들이 밖에 나가면 사찰에서 보여준 자비스러움은 없어지고, 심술만 남아서 일반사람을 대하니 일이 잘 되겠습니까?

가정에 가서도 절에서 스님들에게 배운 그 마음이 바로 남편과 자식,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에게 전달돼 모두를 부처님처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을 부처님처럼 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 위에 있는 거품이 사라졌다 해서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거품이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잘 못 쓰는 사람 주위에는 이웃도, 친구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 용심(用心)을 잘하면 한 폭의 잘 그려진 그림처럼 얼굴이 아름다워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예쁘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을 말한 것 뿐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내포한 표현입니다.

불자들이 이 절, 저 절 찾아가서 부처님을 찾기보다는 가족, 이웃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생활한다면, 모두들 아름다움을 발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을 짓는 길이고, 성불을 이루는 길입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논리적, 체계적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배고플 때 밥 먹을 사람이 여기에 재료가 얼마 들어가고, 영양가가 얼마 포함되어 있고, 또 몸에 좋은지 나쁜지 따지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들에게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병이냐 하면 그것은 ‘안다는 병’ 입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알아도 불교에서는 병이 됩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알수록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 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을 수행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자정기심성모향(自淨其心聖母鄕)’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티 없는 마음씨가 우리들의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영원한 진리는 이 우주공간에 다 있지만 남을 해치고, 속이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처님 말씀 속에서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디 먼 데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성불하는 길을 다른 먼 곳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항상 베푸는 마음으로 서로를 돕는 것이 바로 성불의 길이고, 부처님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또한 불국토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을 돕고, 이웃이 ‘나’를 배려한다면 지금 불자들이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인 것입니다.

인환스님─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

동국대 명예교수

인환스님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열정.노력이 ‘무아’의 참모습

그런 모습으로 살 때 너그럽고

참다운 내일의 삶도 가능해져

(사진설명: 정릉 경국사에 20년 넘게 주석하며 늘 온화한 얼굴과 웃음을 잃지 않는 스님은 지금도 전국의 불자들을 만나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김형주 기자)

4년 만에 만난 스님은 한결 같았다.

만면에 웃음을 거두지 않는 온화한 얼굴에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말투, 낙엽이 뒹구는 정릉 경국사 풍경, 작고 소박한 스님의 처소 등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핵실험으로 어수선 하던 지난 10일 서울 정릉의 경국사는 깊은 산사 마냥 고요했다.

차를 건네던 스님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온 일도 아닌데 너무 놀랄 필요가 없다”며 “평상심을 유지하라”고 말했다.

스님은 하지만 “국민들은 편안한 마음을 갖되 정책 당국자들은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며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즉 긴장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정책 당국자들이 있을 때 국민들은 안심하고 믿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여야 정치인등 이른바 사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고견’을 듣는다는데 큰스님들을 찾아뵙는 것이 지혜를 빌리는 첩경(捷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해외포교에 매진하던 중 지관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 경국사 조실)의 청을 받고 한국에 들어온 뒤 24년간 줄곧 경국사에 주석 중인 스님은 1982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 한 뒤 정년퇴직까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세속 나이로 76세인 스님은 15년 째 매달 한차례 법회를 하는 회룡사를 비롯 부산 내원정사, 조계사, 인천, 대전 등 전국의 불자들을 만나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스님은 “체력과 기력이 닿는 한 열심히 일할 것”이라며 “자기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른 세 명이 들어서자 더 이상 앉을 공간이 없는 스님 방에서 몇 말씀 여쭈었다.

가장 기본적인 불교교리인데도 불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질문했다.

스님은 “불교는 제대로 잘 알아야하며 바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한다”며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無知)”라고 강조했다.

– 업(業)이론을 본 뜻과는 다르게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신도나 국민들이 많습니다.

또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교리도 허무주의로 많이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불교 교리가 본 뜻과 다르게 변질되거나 잘못 받아들여져 불교를 왜곡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다투는 말로써 〈장아함경〉에 ‘일체의 행은 무상(無常)하다.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다.

열반은 적정(寂靜)하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믿고 불교의 정신을 바로 실행하는 데는 깊이 모든 것이 무상함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무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는 오직 어떠한 경우에 실망하여 허망함을 맛보게 되는 것과 같은 다분히 감정적이며 소극적인 입장에서 사용되는 일이 많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이란 결코 그러한 감정적인 느낌이거나 무엇이 끝나는 것을 표현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쉼 없이 변천하면서도 활발하게 역동하는 양상을 무상하다고 표현하는 아주 적극적인 뜻이 들어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봄철에 뿌려진 씨앗이 태양에 의한 적당한 빛과 열을 받으며 비에 의한 적기에 적량의 수분을 얻게 되는 천지자연의 혜택과 땀 흘려 가꾸는 정성스러운 사람의 손길에 의하여 잎이 피고 가지가 늘며, 꽃이 피어 열매가 맺어서 시절 인연이 무르익은 가을 절기에 풍성한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무상의 모습인 것이며, 사랑스런 젖먹이 아이가 차츰 자라나 마침내 헌헌장부로 성장하는 것도 바로 무상한 까닭에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지, 늙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현상만이 무상한 모습은 아닌 것이다.

만일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다면 삼라만상과 우주법계가 생멸하며 변천하는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래서 모든 것이 상주불멸하며 고정불변 한다면 아무런 진보도 발달도 없을 것이다.

병으로 누워서 치료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병이 나아서 건강하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에 투병생활 가운데서 사는 보람을 찾을 수 있고, 어려운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앞으로 나아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 진보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바로 무상의 모습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스님은 이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열정과 노력이 바로 무아의 참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서 인연에 따라 흩어지니 이렇게 연기한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까닭에 그것은 무상하고 무상한 까닭에 그것은 무아(無我)이다.

그런데 무아에 대해서도 역시 발전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그 뜻이 올바로 살아난다.

말하자면 현재에 직면한 문제를 설사 그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피하려 하지 말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성의를 다하여 정열을 기울여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진이며 주어진 일에 전신전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무아의 참모습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깊이 자각하고 온 힘을 다하여 오늘을 열심히 무아의 모습으로 살 때 틀림없이 너그럽고 진실로 행복한 내일의 삶이 약속되는 것이다”

– 욕망 때문에 고(苦)가 생긴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성불하겠다는 의지도 욕망이 아니냐며 반문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 까요.

“그것은 욕심과 원력을 혼동한데서 나온 잘못된 견해다.

올바른 원력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면 올바른 원력과 욕심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이익됨(自利)이 중심인가, 아니면 이타(利他)를 위한 것인가를 보면 된다.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렇다고 욕심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욕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자세다.

문제는 이를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있다.

지혜를 갖추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 스님들 중에는 신도들은 너무 많이 알면 신심이 떨어지고 건방져지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너무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불교는 출가자나 수행자를 위한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무지해서는 안된다.

바로 알 수 있도록 깨우쳐야한다.

그것이 바로 포교다.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될 때 자발적으로 자신 있게 삼보도 공경한다.

성전의 가르침을 못 배우게 하는 것은 중세 전제군주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우민(愚民)정치와 다를 바 없다”

스님은 최근의 인문학 위기론에 대해서도 언급, “세계적인 풍요가 철학 등 인문학 경시로 이어졌다”며 “아무리 물질이 풍부해도 임제스님의 말씀대로 내가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정신을 가르쳐야한다”고 덧붙였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