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환스님─내가 금강경이 되려면

내가 금강경이 되려면 -인환 스님-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이 못 알아들을만한 가르침을 법문하신 것이 없습니다.

아주 받아들이기 쉽게 근기에 맞게 하셨습니다.

경전은 본래 인도에서 성립되어 인도말로 되어 있는 경전이 중국에 옮겨와 중국 사람들이 중국말로, 말하자면 한문으로 번역을 하였고, 이 한문 경전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종 임금이 한글을 제정하기 전엔 한문으로 글을 읽었으며, 일반인은 이두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불교경전도 천년이 내려오며 한문 경전으로 읽었으며 요 근래까지도 그랬습니다.

30년 전에서야 동국대학교에서 번역을 해서 근래에 완간을 하여 한국 사람들 누구든지 불경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문은 열심히 배워서 능하게 아는 사람 소수 얼마를 제외하고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에게 남의 나라말이 되어서 어렵습니다.

한문으로 되어있는 경전을 어지간한 보통 사람들이 보면 “아이고, 경전이라고 해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요.

“라는 선입관이 있어 “금강경은 어려워, 읽기 좋다고 해서 읽기는 읽지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읽긴 읽는데 잘 몰라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금강경뿐만 아니라 여러 경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왜일까요? 참선하는데 화두 들고, 염불하는데 나무아미타불, 기도하는데 관세음보살, 지장보살하고, 주력하는데 신묘장구나 옴마니반메훔을 하듯, 금강경 읽는 것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금강경을 읽기는 읽지만 우리 한글로 읽는 것처럼 쏙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때 경전을 수행방법으로 알아서 그 뜻을 알고 모름을 상관하지 않고, 오직 믿는 마음으로 늘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알고 모르고 할 게 없습니다.

금강경을 읽을 때 읽다 말다 하지 말고, 내가 하루에 몇 번 읽겠다 정하면 계속해서 독송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하루 세 끼 밥 먹는 시간과 양을 정하고 먹으니까 싫지 않고 우리 일생동안 몸을 유지하는 좋은 음식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강경은 우리 마음의 양식입니다.

여기서는 마음의 양식 금강경을 주로 예를 들었지만,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경전을 조금 읽어 내려오다가, “힘들어, 아이고, 목이 아파, 허리 아파, 이것 밤낮 읽어서 돈이 생기냐, 밥이 생기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얼마 하다 말고, 얼마 동안 쉬었다 하게 된다면 수박 겉핥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수박을 몇 달 동안 껍질만 핥아봐야 그 맛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음식은 먹어야 맛을 알고, 병도 낫습니다.

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을 자꾸 읽다 보면 처음에는 조금만 읽어도 나도 모르게 오만 생각이 왔다갔다 합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나를 쳐다보고 법문을 듣지만 여러분의 주인공은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여닫고, 대형마트 가서 쇼핑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일더라도, 그 생각을 쫓아가지 말고 ‘내가 딴 생각을 했구나.

‘ 깨닫고 얼른얼른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참선을 하면 화두로 돌리고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로 돌리고, 기도를 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로 돌리고, 경을 읽는 사람은 경을 읽는 데로 돌리고, 이를 몇백 번 몇천 번 돌려 그 읽는다는 생각을 계속되게 해야 합니다.

일생 동안 읽어도 잘 안되지만, 자꾸 열심히 생각을 돌려 그 생각이 계속 되도록 열심히 한다면, 차차 할수록 읽어지고 경을 모두 읽기 시작하여도 딴 생각을 않게 됩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아이고 스님, 얼마나 하면 그렇게 돼요?” 하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일생을 해도 세세생생해도 안 되지만, 일념으로 되도록 하려고 애쓰면 3일이면 됩니다.

10일을 읽어도 되고 20일을 읽어도 되고 100일을 읽어도 됩니다.

정 안 되더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3년이면 됩니다.

빈 말이 아니고 3년이면 1,000일 아닙니까? 그런데 1년 정도가 되어 금강경도 주욱 읽게 되고 탁 생각을 돌려 집중을 하게 된다면, 딴 생각 천 생각 만 생각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강경을 일념하게 되면 얼마 있어 무념(無念)에 들어갑니다.

무념이 없을 무(無), 생각 념(念)자인 데 글자 그대로 생각이 없어져서 무념이 아니라 일념(一念)이 가득한 무념이 되어야 합니다.

선풍기의 날개는 보통 3∼4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선풍기의 스위치를 누르면 날개가 안 보입니다.

이것은 선풍기의 날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꽉 차서 하나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법과도 같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마음도 일념으로 하게 되면 일념이 가득찬 무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우리가 상대적인 세계에 살았으나, 무념에 들어가게 되면 금강경에는 나도 없고 읽을 금강경도 따로 없습니다.

“내가 바로 금강경이야.

금강경이 바로 나야.

”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니, 이 세상을 피해 달아나서 살 순 없지만, 인연 따라 뭐든지 생활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꾸준히 금강경이 곧고 튼튼한 기둥이 되어 준다면, 여러분들이 가면서, 오면서, 뭐하면서, 운전하면서도 금강경이 모두 다 머리에 들어 좌락좌락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금강경이고 금강경이 내가 된다면 그게 바로 독경 삼매입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여 그렇게 되면 화두 삼매요, 나무아미타불 열심히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은 염불삼매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은 기도 삼매요, 경을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은 독경삼매요.

불교의 어떤 수행이든지 근본은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삼매라고 하는 것은 뭐냐? 어렵게 말하면 모두 어렵지만 아주 알기 쉽게 말하면 우리 정신, 보통 때는 자꾸 눈으로 귀로 듣고 보고 하는 대로 자꾸 밖으로만 내던 것이 금강경을 열심히 읽는 것을 통해 싹 안으로 일념으로 된다면 그게 바로 독경삼매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앉아 있으면 금강경 보살님이요, 여기 앉아 있으면 금강경이 앉아 있고 집에 간다고 걸어가면 금강경이 걸어가고 집에서 설거지하면 금강경이 설거지하고 운전하면 금강경이 운전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이고, 그러면 위험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생각이 바로 서 있어 딱 일념으로 한다면 절대로 사고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경 읽는 것을 수행으로 합니다.

만일 그렇게 못하더라도 금강경의 뜻이라도 제대로 배워 알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금강경의 문자에 있는 위에 어떤 깊은 말을 우리에게 일러 주려고 하는가를 살필 줄 알아야 해요.

이것을 경을 공부하는 세계에선 경안(經眼)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그것이 금강경 읽는 것이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소 생활하고 행동하는 것에 다 반영이 되고 행하게 됩니다.

– 중동 서래사 동지법회 법문 –

인환스님─관세음보살기도 3단계

『관세음보살기도 3단계 』

인환스님

보조스님은 (초발심자경문)에서 법문을 듣는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류는 ‘아무리 법문을 들어봐야

나는 깨달음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밤낮 들어봐야 그 말이 그 말이다’하며

법문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입니다.

법문을 듣는 것은 생각을 가다듬어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때문에 법문을 들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법문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나 염불도 모두 같은 이치로 해야 합니다.

관음기도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올바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요즘 말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바로 듣는 것이 바로 불성의 작용입니다.

불성이란 어디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자람 없이 보고 듣는 것이 불성인 셈이죠.

제 이야기를 듣고 ‘불성이 그렇게 간단한 거야?’라고 의심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셨지만

우리는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판단대로, 본대로 느낀대로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곱다 밉다…, 쉴 새 없이 차별과 분별을 합니다.

시쳇말로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지요.

흔들리는 마음으로 보니 만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고, 구하는 바가 있어 기도를 하면서도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기도만 해도

가피를 입을 수 있는 것일까’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의심을 내려놓으시고 지금 일러드리는

세 가지 단계를 자신의 기도와 견주어 하나하나 짚어 보십시오.

기도를 하는 첫 번째 단계는 어린아이가 배고프고 불편하면 울음을 터트리듯,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부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부처님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세요’, ‘도와주세요’하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상황에서 불·보살님에게 의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기도를 계속하면서도 밤낮 이 생각만 하는 것은

아이가 덩치가 큰 후에도 힘든 일만 있으면 울며 부모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두 번째 단계로 기도가 이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 자신만을 위해 소원을 비는 것에서 벗어나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조건 없이 제도해주시는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 잘되겠다, 우리 아들만 좋은 대학 가야된다,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과욕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대중들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중생이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해 보십시오.

그 기도는 자연히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세 번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기도가 되는 단계입니다.

경계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내 마음을 부처님과 똑같은 깊고

바른 반야의 마음으로 돌려 놓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다 어느 순간 진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그 순간

과거도 미래도 떨어져나가고 오직 그 순간만 남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물론 초심자들은 “~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절박한 마음이 없으면 기도를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원은 기도를 시작할 때 한번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자신의 소원을 중얼중얼 되뇌는 사람들이 있어요.

불·보살님이 소원을 못 들었을까봐 자꾸 되뇌는 겁니까?

이러한 것은 일종의 번뇌요 망상이요 기도의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오직 ‘관세음보살’할 뿐,

거기에 어떤 단서나 조건을 붙이면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를 할 때의 큰 방해꾼이 있으니, 잡념과 졸음입니다.

물론 초심자들에게는 잡념과 졸음이 끊임없이 덮치게 마련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쉴 새 없이 번뇌 망상을 피워왔으니까요.

하지만 잡념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그때마다 얼른 호흡이나 화두로 마음을 돌려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정념으로 돌리고 또 돌리다 보면

한 곳으로 집중하는 순간이 오게 되고,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필코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다보면

‘무념(無念)’의 상태가 됩니다.

곧 일념(一念)이 가득 찬 무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풍기가 빠르게 돌아가면 날개가 보이지 않듯,

번뇌 망상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상태인 무념으로 들어가면

부르는 나도, 불리는 관세음보살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때 비로소 내가 바로 관세음보살이 되고

관세음보살이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삼매(三昧)라고 하는데, 기도를 이렇게 하면 기도삼매,

염불을 하면 염불삼매, 독경을 하면 독경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삼매에 드는 기도법을 알았으니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인환스님─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

동국대 명예교수

인환스님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열정.노력이 ‘무아’의 참모습

그런 모습으로 살 때 너그럽고

참다운 내일의 삶도 가능해져

(사진설명: 정릉 경국사에 20년 넘게 주석하며 늘 온화한 얼굴과 웃음을 잃지 않는 스님은 지금도 전국의 불자들을 만나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김형주 기자)

4년 만에 만난 스님은 한결 같았다.

만면에 웃음을 거두지 않는 온화한 얼굴에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말투, 낙엽이 뒹구는 정릉 경국사 풍경, 작고 소박한 스님의 처소 등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핵실험으로 어수선 하던 지난 10일 서울 정릉의 경국사는 깊은 산사 마냥 고요했다.

차를 건네던 스님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온 일도 아닌데 너무 놀랄 필요가 없다”며 “평상심을 유지하라”고 말했다.

스님은 하지만 “국민들은 편안한 마음을 갖되 정책 당국자들은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며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즉 긴장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정책 당국자들이 있을 때 국민들은 안심하고 믿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여야 정치인등 이른바 사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고견’을 듣는다는데 큰스님들을 찾아뵙는 것이 지혜를 빌리는 첩경(捷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해외포교에 매진하던 중 지관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 경국사 조실)의 청을 받고 한국에 들어온 뒤 24년간 줄곧 경국사에 주석 중인 스님은 1982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 한 뒤 정년퇴직까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세속 나이로 76세인 스님은 15년 째 매달 한차례 법회를 하는 회룡사를 비롯 부산 내원정사, 조계사, 인천, 대전 등 전국의 불자들을 만나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스님은 “체력과 기력이 닿는 한 열심히 일할 것”이라며 “자기일 열심히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른 세 명이 들어서자 더 이상 앉을 공간이 없는 스님 방에서 몇 말씀 여쭈었다.

가장 기본적인 불교교리인데도 불자들이나 국민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질문했다.

스님은 “불교는 제대로 잘 알아야하며 바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한다”며 “제일 무서운 것이 무지(無知)”라고 강조했다.

– 업(業)이론을 본 뜻과는 다르게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신도나 국민들이 많습니다.

또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교리도 허무주의로 많이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불교 교리가 본 뜻과 다르게 변질되거나 잘못 받아들여져 불교를 왜곡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다투는 말로써 〈장아함경〉에 ‘일체의 행은 무상(無常)하다.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다.

열반은 적정(寂靜)하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믿고 불교의 정신을 바로 실행하는 데는 깊이 모든 것이 무상함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무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는 오직 어떠한 경우에 실망하여 허망함을 맛보게 되는 것과 같은 다분히 감정적이며 소극적인 입장에서 사용되는 일이 많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이란 결코 그러한 감정적인 느낌이거나 무엇이 끝나는 것을 표현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쉼 없이 변천하면서도 활발하게 역동하는 양상을 무상하다고 표현하는 아주 적극적인 뜻이 들어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봄철에 뿌려진 씨앗이 태양에 의한 적당한 빛과 열을 받으며 비에 의한 적기에 적량의 수분을 얻게 되는 천지자연의 혜택과 땀 흘려 가꾸는 정성스러운 사람의 손길에 의하여 잎이 피고 가지가 늘며, 꽃이 피어 열매가 맺어서 시절 인연이 무르익은 가을 절기에 풍성한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무상의 모습인 것이며, 사랑스런 젖먹이 아이가 차츰 자라나 마침내 헌헌장부로 성장하는 것도 바로 무상한 까닭에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이지, 늙고 병들어서 죽어가는 현상만이 무상한 모습은 아닌 것이다.

만일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다면 삼라만상과 우주법계가 생멸하며 변천하는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래서 모든 것이 상주불멸하며 고정불변 한다면 아무런 진보도 발달도 없을 것이다.

병으로 누워서 치료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병이 나아서 건강하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에 투병생활 가운데서 사는 보람을 찾을 수 있고, 어려운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앞으로 나아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 진보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바로 무상의 모습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스님은 이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열정과 노력이 바로 무아의 참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서 인연에 따라 흩어지니 이렇게 연기한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까닭에 그것은 무상하고 무상한 까닭에 그것은 무아(無我)이다.

그런데 무아에 대해서도 역시 발전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그 뜻이 올바로 살아난다.

말하자면 현재에 직면한 문제를 설사 그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피하려 하지 말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성의를 다하여 정열을 기울여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진이며 주어진 일에 전신전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무아의 참모습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깊이 자각하고 온 힘을 다하여 오늘을 열심히 무아의 모습으로 살 때 틀림없이 너그럽고 진실로 행복한 내일의 삶이 약속되는 것이다”

– 욕망 때문에 고(苦)가 생긴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성불하겠다는 의지도 욕망이 아니냐며 반문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할 까요.

“그것은 욕심과 원력을 혼동한데서 나온 잘못된 견해다.

올바른 원력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면 올바른 원력과 욕심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이익됨(自利)이 중심인가, 아니면 이타(利他)를 위한 것인가를 보면 된다.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렇다고 욕심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욕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자세다.

문제는 이를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있다.

지혜를 갖추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 스님들 중에는 신도들은 너무 많이 알면 신심이 떨어지고 건방져지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너무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불교는 출가자나 수행자를 위한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무지해서는 안된다.

바로 알 수 있도록 깨우쳐야한다.

그것이 바로 포교다.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될 때 자발적으로 자신 있게 삼보도 공경한다.

성전의 가르침을 못 배우게 하는 것은 중세 전제군주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우민(愚民)정치와 다를 바 없다”

스님은 최근의 인문학 위기론에 대해서도 언급, “세계적인 풍요가 철학 등 인문학 경시로 이어졌다”며 “아무리 물질이 풍부해도 임제스님의 말씀대로 내가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정신을 가르쳐야한다”고 덧붙였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