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나’라는 주인공

‘나’라는 주인공

-서암스님-

‘나’라는 주인공, 능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면서 갖은 조화를 부립니다.

이것은 큰 것인가요? 혹은 작은 것인가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니, 크다고 하면 다시 작아지지 못하고 작다고 하면 다시 커지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모난 것도 아니고 둥근 것도 아니며 푸른 것도 붉은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착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니 결국 그 정체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갖은 조화를 부리는 것입니다.

방 안의 허공은 네모난가요? 공 안의 허공은 둥근가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착각을 하여 둥근 허공이니 네모난 허공이니 하지만 실제로 허공 자체는 네모나거나 둥글지 않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분별로 악한 마음을 쓰기도 하고 착한 마음을 쓰기도 하고 큰 마음을 쓰기도 하고, 작은 마음을 쓰기도 하니 스스로 온갖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기 마음자리는 한계가 없어 모양도 빛도 없는 대소장단(大小長短) 일체가 끊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한탑스님─내 이웃은 중생 아닌 미래의 부처님

내 이웃은 중생 아닌 미래의 부처님!

-한탑스님-

한탑 스님은 ‘올바른 불자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법문했다.

“단 한 번의 나무아미타 염이라도 간절하게 해야 자신을 정화할 수 있다”며 “무아와 공의 도리도 바로 알아야 집착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여러분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자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의미를 잘 알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만 하는 ‘나무아미타불’은 효험(?)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우리 자신을 정화해 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단박에 자신을 정화할 수 없으니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정화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이 ‘나무아미타불’을 염해야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이 서방정토에 있다는 말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이생의 삶을 다한 우리도 서쪽으로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자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마십시오.

이 생의 삶에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불법에 따른 삶을 산다면 이곳이 곧 극락정토입니다.

극락정토에 산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리 만무하니 죽음 이후의 삶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첫걸음은 바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 정화하며 염불 – 기도해야 집착을 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이생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불가의 실천덕목 중 하나인 ‘보시’도 어떤 마음으로 행하는지에 따라 그 삶도 달라집니다.

그저 내 것을 베푼다는 정도로 보시를 해서는 안됩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개념을 떠나 서로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보시 정신입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하라 하지 않습니까? 집착을 버리려면 ‘나’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에게 ‘나’를 버려라 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무아’와 ‘공’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아’와 ‘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고는 평생 ‘나’라는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아’라고 하니 ‘내가 없는 나는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공’이라 하니 ‘아무것도 없으면 지금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고 합니다.

이런 이분법적 서구 인식으로는 ‘무아’와 ‘공’은 제쳐두고라도 ‘무아’의 그림자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 경전이 있지만 『금강경』을 꼭 공부하세요.

그러면 ‘무아’와 ‘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사구게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의 함이 없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무아의 가슴에 풍요를 심어라 바다 위의 파도와 물거품을 보세요.

파도를 바다라 하지 않고 물거품을 파도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거품은 곧 파도이며 파도는 곧 바다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버린다고 해서 한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탑은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아’와 ‘공’을 조금 이해했다고 해서 바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에 의한 업장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만 염하고 자신을 바로 알아 집착을 버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불자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여러분 개인 한 분 한 분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 마음을 뒤집어서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라”하셨습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도 “받을 생각말고 주는 마음을 가져라”했습니다.

달마대사는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고, 구하는 마음이 없을 때 거기가 바로 극락”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은 불국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분들을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이웃을 보세요.

모두 ‘중생’이라 하지만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베푼다는 생각을 떠나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불교의 진정한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려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 공양 많이 올렸다고 해서 많은 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받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가난하다고 느끼는데 기인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가난’이라는 씨앗을 자꾸 심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풍요롭게 살고 싶다면 ‘풍요’의 씨앗을 가슴 속에 심어야 합니다.

‘집착’을 떠난 ‘무아’의 가슴 속에 ‘풍요’의 씨앗을 심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내 가슴속에 핀 꽃 한 송이가 열매를 맺어 또 다시 씨앗을 퍼트리면 세상은 그만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곧 불국토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염하지 말고 단 한번을 하더라도 간절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간절함 만큼 자신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종진스님─일하는 즐거움

일하는 즐거움

-宗眞스님법문- 사람은 저마다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 인과(因果)의 정리(定理)다.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내가 심지않고 남이 심은 것을 빼앗으려 해도 안된다.

저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깨닫고 성실 하게 살아야 한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한다.

옛말에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했다.

뿌려야만 거둘 수 있고, 더 많이 땀흘려 노력해야만 탐스런 수확을 할 수 있다.

땀을 흘리지 않는 곳에 성공의 꽃이 필 수 없고 행복의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 보람있는 것, 가치 있는 것은 노력의 산물이요 땀의 결과다.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려는 허망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땀을 흘리지 않고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것과 같다.

일하지 않으면서 열매만 따는 것은 도둑질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는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방법이 없다.

불교의 계율은 노력없이 남의 물건을 갖는 것을 큰 죄악으로 보고 있다.

[사분율(四分律)]에 보면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말라’고 했다.

만약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면 바라이죄(波羅夷罪) 에 해당한다고 했다.

바라이죄란 승단에서 쫓겨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이 죄는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물건을 훔치면 사회에서 격리시켜 감옥에 보낸다.

인생은 결코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일하고 노력해야 한다.

노력은 모든 성공의 어머니며 노동은 행복의 아버지다.

때문에 옛부터 노동은 인간생활에서 무엇보다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로 인식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해지는 시간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때다.

회사에서 눈코뜰새 없이 일하는 남자의 모습은 가장 아름답다.

남편을 기다리며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보다 아름답다.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학생은 믿음직 스럽다.

사람은 가치있는 일을 달성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참다운 즐거움이나 행복은 느낄 수 없다.

회사에서 실직(失職)을 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더욱 괴로와한다.

실직으로 수입이 없어 생계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중국의 백장(百丈)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고 가르쳤다.

하루는 제자들이 스승이 노구(老軀)에도 일하는 것이 민망해 호미를 감추자 스님은 하루를 굶었다.

철저한 작무생산(作務生産)의 정신이야말로 인생을 지켜주는 기둥이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모든 것을 주물러 황금으로 만든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어떤 일을 하든지 힘껏 하면 그곳에서 광명이 발견된다’는 좌우명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부(富)와 명성을 얻었다.

열심히 일하고 땀흘리는 사람, 그는 모든 것을 주물러 황금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성불(成佛)은 수도(修道)라는 일을 통해 이뤄지고 수확의 기쁨은 밭가는 노동을 통해 이뤄진다.

땀흘리는 사람에게만 성공의 열매를 딸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