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세상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세상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광덕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깊이 믿으며,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가 행하고 있는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하는 것을 표준삼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아 힘써 닦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지않는 사람은 자기 일만을 생각하여 마음이 좁고 언제나 초조 불안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배후에 있는 부처님의 힘, 크신 자비를 믿음으로써 마음이 크고 넓어져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목을 탓하지 않고 내 자신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기 마음 자기 행에 중심을 항상 두고,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을 돌이켜 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 개성을 어떤 사람은 업보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인즉 개성은 부처님 큰공덕 바다가운데 있는 하나의 싹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잘 키우면 무한공덕의 열매가 거기서 열립니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 다름으로 개성이 느껴지고, 저만의 아름다움, 특성을 갖는 것입니다.

꽃밭에 똑같이 빨간 꽃만 있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꽃이 어울려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것이며, 그 천지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몸짓, 발짓도 기계처럼 똑같아서는 역시 멋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하나하나는 모두가 귀합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개성의 뿌리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착실하게 행하고 나 자신을 돌이켜 보되, 남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너무 남한테 한 눈 팔지 마십시오 이것이 첫째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부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을 소중히 여기되 집착하지 말라.

겉으로는 나 혼자 이렇게 외롭게 일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도 내 배후에, 내 생명 깊은 곳에 부처님이 함께하고 있고, 부처님의 큰 자비가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흔들리지 말고 초조하지 말고 불안하지 말고 여유있는 너그러움으로 씩씩하게 대해 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무상(無常)한 것으로 보고 괴로움이 모여드는 근원이라고 보며 악한 일이 흘러나오는 뿌리라고 보고 그 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몸을 소중하게 기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기고 탐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을 배워 얻고, 법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몸을 다듬지 않으면 목숨을 온전히 하기 어렵고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면 거룩한 가르침을 받아서 몸으로 행할 수도 없고 또한 널리 전하지도 못합니다.

물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은 뗏목을 잘 간수하며, 말 타고 여행하는 사람은 말을 잘 돌보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은 그 몸을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의복을 입어도 헛된 치레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수치스러운 것을 가리고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식욕에 사로잡히지 아니 하고 몸을 길러서 진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한 이것을 남을 위하여 설할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집에 머물러도 또한 이와 같이 향락을 생각하거나 허영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진리의 집에 머물러 번뇌의 도적을 막고 그릇된 가르침의 풍우를 피하기 위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 일신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으며, 오직 깨달음을 위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위하며 타인에게 도움 줄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은 항상 부모를 섬기고 가족과 자신을 섬기며 부처님을 섬길 마음이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보시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탐심을 없앨 것을 생각하며 사람들의 모임에 있을 때는 부처님 모임에 들 것을 생각하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얻고자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서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대도 얻기를 바라고, 법에 귀의하고서는 대중과 더불어 깊은 가르침의 바다에 들어가 큰 지혜를 얻기를 원하며, 승가에 귀의하고서는 대중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온갖 장애를 없앨 것을 원하여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 우리들이 항상 배우는 전법지상,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을 최상의 믿음으로 삼고, 정진으로 삼고, 보은으로 삼고, 마침내 전법을 함으로써 불국토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의 전법지상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 모든 법을 닦고 이루어가며 부처님의 법을 전해줄 것이기에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거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할 때 합장하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좀 더 길게 부처님 은혜를 생각하는 게송을 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때로는 부처님 크신 은혜에 비하면 내 공덕이 적은 것을 참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것이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해서 이 밥을 먹노라.”

하는 오관게의 끝대목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가 무엇인가.

’ 우리가 사는 목표는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법을 이웃에 전해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몸뚱이가 이 몸뚱이로써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이룬다고 하는,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는 불멸의 생명을 이루는 그러한 궁극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법을 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람, 완성자의 덕을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을 최상의 공덕으로 삼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먹이고 거두는 것도 이렇기 때문에 거두고 먹이는 것이니까 그 목적을 향해서 성실하게 잘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보를 보면 몇 말씀을 적어두었는데 함께 보기로 합시다.

“부처님은 진리다.

눈물로 호소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부처님 앞에서 눈물로 무엇을 구하고 원하고 그럴 수도 있는데 부처님은 인정에 팔리는 분이기보다는 진리이신 까닭에 내가 먼저 마음을 바꿔서 진리로 마음을 바꿔라.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고 욕심을 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복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다.

이것이 영원한 인과법칙이다.”

주지도 아니 하고 남한테 친절도 베풀지 아니 하고 남한테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남이 나한테 많이 갖다주기만 바라는 그런 이기주의는 통하지 않습니다.

호흡을 하더라도 호흡을 들이마시고 토하고 해야 사람이 삽니다.

그러나 들이마시기만 하고 토하지 않고 틀어막고만 있다 보면 죽을 것입니다.

토해내야 삽니다.

“주는 자가 받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욕하지 말라.

마음을 바꾸자.

처처에 새 천지가 열린다.”

천지가 나쁘고 이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바꾸고 보면 환경도 바뀌고, 밉게 보이던 사람들도 내가 마음을 바꾸고 보면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이며, 천지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환경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

처처에 새 천지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면스님─육신의 출가 마음의 출가

육신의 출가 마음의 출가

일면스님

스님은 왜 출가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속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 전까지 맺고 있던 모든 인연과 즐거움만이 끊어지고, 괴로움은 그대로 남아 수행 생활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분명 출가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출가(出家)’는 단순히 집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출가’는 범어로 프라브라지타(pravrajita)라고 합니다.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생활과 인연을 여의고 성자의 수행 생활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가정이나 세속의 집착, 속박을 모두 끊고 집을 떠나서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티끌을 여의었다고 해서 출진(出塵)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물론 번뇌를 가리키는 말 입니다.

또 출가자는 모든 것이 공(空)함을 알고 이 공에 의지해서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공문자(空門子)라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출가는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출가의 본 뜻을 새긴다면 육신의 출가는 수행자가 되기 위한 일차적인 출가이고, 궁 극적으로는 정신과 마음의 대자유를 이루는 것을 참된 출가라고 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를 통해서 우리는 출가의 참된 의미와 불교의 본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자 시절에 출가를 하시면서 4가지 원(願)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것을 ‘출가사원(出家四願)’이라고 합니다.

첫째,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겠다.

둘째, 중생의 혹장(惑障) 즉 번뇌의 장애를 없애겠다.

셋째, 중생의 사견(邪見) 즉 잘못된 견해를 끊겠다.

넷째, 중생의 생사윤회의 바다에서 헤매는 것을 제도하겠다.

이상의 네 가지 서원이 부처님의 출가사원입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 원력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를 한 사람은 엄격한 수행 생활을 거쳐 중생을 제 도할 수 있는 근기를 갖추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부처님의 뒤를 이어 진리를 깨닫고 중생의 제도하겠다는 대원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집을 떠나 집이 없는’ 환경에서 오직 한 가지의 목적인 중생제도를 위해 혹독한 수행 생활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출가 수행자가 ‘집’을 가지려 하고, 그 집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려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때부터 출가의 본래 목적은 사라집니다.

그 순간부터 오로지 집과 집에 속한 것들을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출가는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인 스님들은 산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을 낮추는 일부터 배우게 됩니다.

마음까지 없애는 수행을 합니다.

그것을 하심(下心)이라고 합니다.

겸손과 절제를 통해서 세상의 온갖 지식과 명예, 돈과 권력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운 참 자유 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문 입구에는 그래서 ‘산문을 들어서는 자는 반드시 세속의 지식을 벗어던지라((입차문내 (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출가 이전의 지위나 학벌, 권위, 세속에 있을 때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리고 평등한 출가 수행의 길에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해인사의 오래 주석하셨던 고암 큰스님께서는 출가 시작부터 철저하게 하심을 실천하신 것 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께서 출가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대중 스님들의 고무신이 항상 깨끗하게 닦아 놓은 것입니다.

뒤에 밝혀졌지만 바로 고암 큰스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함께 수행의 길을 걷는 도반들의 신발을 남모르게 닦아 놓는 일, 쉬운 일 같지만 하심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스님께서는 평생을 이렇게 수행에 전념하셨고, 한국불교에 큰발자국을 남긴 큰스님이 되셨 던 것입니다.

출가해서 바른 수행을 쌓지 못하는 것은 부처님과 수많은 선지식, 조사 스님들을 속이는 일 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과 생명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 업력(業力) 또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입니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자 불자들에게 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육신의 출가를 형식적인 출가라고 한다면 마음의 출가는 진정한 의미의 해탈입니다.

적당히 불자인 척 하면서 살아가며 업을 쌓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항상 도(道)에 마음을 두고 대도성취(大道成就)의 원력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하는 생활이 되어야겠습니다.

일오스님─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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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일오스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부둥켜 안고 살고 있지요.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내가 잘 살아야 하는데 내것, 내 집, 내 가족, 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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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내가 앞섭니다.

그러나 탐욕의 원인은 ‘나’라고 하는 아집때문입니다.

나를 놓아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업장이 됩니다.

업장을 없애는 방법중에는 염불도 있고 화두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팔정도 중에서 정견正見을 가장 앞에 놓고 있습니다.

‘나’를 바로 보아야 업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몸과 마음이 ‘나’일 텐데 ‘나’는 끝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찰나생 찰나멸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인연따라 순간순간 변할 뿐입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현재심現在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재의 마음이 좋아야 뒤의 마음도 좋게 일어납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가 성성하다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다 끊어져버리고 현재심만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으로만 똘똘 뭉쳐져야 지혜가 열립니다.

그래서 어떤 수행법보다도 간화선이 힘차고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적군을 무찌르는 장수보다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용맹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이 찰나생 찰나멸임을 알고 순간순간 새롭게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실체가 없는 ‘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에 매이지도 않습니다.

연기의 도리를 아니까 남을 존경하고 배려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