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스님─`남 탓`말고 서로 존중하라

‘남 탓’말고 서로 존중하라.

-혜국스님-

우리는 역경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 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역경을 극복하고 향상 할 수 있는가? 최소한 역경을 만났을 때 ‘남 탓’ 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생길수록 남 탓을 합니다.

부부가 되어 수 십 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조금 어려운 일만 있 어도 탓을 합니다.

“아이구, 내가 저 영감(마누라) 만나서 신세가 이 모양이야.

당신이 책임지시오.” 이것이 과연 합당 한 태도입니까?

– 수년 전에 아는 분과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밤에 눈이 많이 와서 빙판이 되었지만, 그 분이 꼭 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을 올랐습 니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길이 빙판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많이 미끄러졌습니다.

그 중 사십 가량 되어 보이는 여인도 얼음길에 넘어졌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갑자기 남편인 듯한 사람을 향해 마구 화를 내며 퍼부었습니다.

“하필이면 눈이 온 날 여기를 오자고 해? 나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다쳤잖아!” 자신은 안 가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우겨서 오게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다치게 되었다는 것이 었습니다.

멀뚱멀뚱 듣고 있던 남자는 그녀에게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달래었습니다.

그런데 도 여인은 계속 화를 내면서 남편을 탓하며 절뚝 절뚝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걸음을 잘못 걸어 빙판 길에 미끌어진 것 은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의 부주의로 발을 삔 것입니다.

내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액난과 고통은 내가 지어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을 남편이 오자고 하여 왔기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 정녕 이것이 맞는 이치입 니까? 참으로 사랑스런 아내가 아니라 애꿎은 인 연과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남 탓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를 인정 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노력 보 다는 상대가 내 마음에 맞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이기에 부처님께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한 대부분의 고통은 상대방이 내 마음에 맞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통의 아내들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바 가지를 긁어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아내는 술 먹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래요.

잘 마셨어요” 하면서 박자를 같이 맞추어줍니다.

남편 또한 아내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친구들과 모여 장난 화투를 치고 있 다면 화를 내지 말고,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 화투장을 내리치면서 확 풀어 버리시오.

재미있 게 치시구려.” 하며 맞추어 주십시오.

아들딸이 공부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즐기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십시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추어 간다면, 더 이상 인간관계 때문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든 상대방과 함께 타락의 길로 들어서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 들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긍정 적으로 보고 상대방에게 맞추라’는 것은 함께 타 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애를 먹이고 부부가 서로 속을 썩일 때 불자는 어떻게 생각하며 극복합니까? “지금의 저 모습은 업에 의해 잠깐 보이는 헛것 일뿐, 마음 속에 있는 불성(佛性)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저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는 미래의 부 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거슬리는 모습이나 성깔부리는 모습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부처 기운을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 마음 속의 부처를 보고 함께 다듬어 나갈 줄 아는 것 이야말로 불자의 길이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 이야말로 내가 살아나고 향상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월간 [법공양]3월호-

현진스님─우리 마음속 `긍정의 주파수`

우리 마음속 ‘긍정의 주파수’

-현진스님-

해인사 법보전의 양쪽 기둥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 있다.

“깨달음의 장소가 어디일까? 현재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다!” 우리 속담에도 ‘애 업고 삼년 찾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 가르침은 깨달음의 자리가 멀리 있거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법문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먼 곳에서 따로 구하려 한다면 평생 공부해도 진척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들이 마주하는 현재의 모든 일이 실존을 확인하는 극적인 상황이며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깨달음의 현장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고통-슬픔은 삶 점검하는 시험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본질은, 일상의 상황이나 조건을 주체적으로 바꾸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깨달음의 장소는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복의 영역 같은 것이다.

우리의 인생 또한 주어진 현재의 상황들을 인정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 속에서 깨달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난과 위기가 많을수록 건강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슬픔과 고통은 현재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또 다른 시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역경과 고난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우리의 의식구조에는 긍정적인 주파수와 부정적인 주파수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주파수가 강한 사람일수록 삶의 스트레스가 적으며, 또한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두운 생각보다는 밝은 생각을 많이 하라는 뜻과 통한다.

하늘에 구름에 모이면 비가 내리듯이, 살아가면서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키우면 힘들고 우울한 일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자신에게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밝고 적극적인 사고로 이끌어가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을 유지하면 어떤 일이 잠시 기분을 망치거나 마음을 상하게 했더라도 금세 평상심으로 돌아올 수 있다.

괴로움은 그 상황을 인정하기까지의 갈등이며 그 일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므로 마음의 주파수를 바꾸면 그 자리에서 마음의 상태가 반전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무슨 소리든 만 번만 외우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만 번을 외우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욕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이끌어내는데 그 주문을 다 소비해 버린다.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면서 남의 탓을 1만 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긍정적 마음 키우는 훈련 필요 따져보면, 세상살이는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마음이나 욕심을 가지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한 긍정적인 주파수는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더 선명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의 마음 속 긍정의 주파수는 얼마나 될까? [불교신문]

성수스님─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만 부처님 될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만 부처님 될수 있습니다

-활산성수(活山性壽)스님

“입 손 발등 몸 관리만 바르게 해도 극락 눈 앞에” –

오늘 산승은 여러 대중 앞에서

사바세계의 때를 벗어 던지고 씻어 버리는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이 산승의 말을 듣고 신 잘 벗는 것부터 배웠으면 합니다.

자기가 신는 신 하나 제대로 못 벗는 사람은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도

진리니, 법이니, 설법이니 하는 것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신 하나만 제대로 잘 벗고,

모자 하나만 반듯하게 잘 쓰고 입을 잘관리하면 됩니다.

또 손도 소중한 손, 귀중한 손, 위대한 손인줄 알고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엔 발걸음 한자죽 잘못 내딛으면

3대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걸음 한자죽만이라도 백번을 생각하고 또 해서

한자죽 옮겨 놓을 수 있는 장부가 돼야 합니다.

쫓아가면 다 걷는줄 알지만 생각하고 걷는 것 하고,

생각않고 걷는 것하고 태도와 모습이 천지차이 입니다.

자신의 신체 하나 하나를 잘 관리하지 못한 채

부처님 앞에 절만 꾸벅꾸벅하는 것은 껍데기 불자입니다.

껍데기 불자만으로는 앞으로의 한국불교를 낙관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5백생동안 자기 눈, 입, 손, 발 관리를 잘 하셨기에

3천년 존경받는 산불자가 되셨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승가와 우바새, 우바이도 이것들을 잘 관리해

산불자가 돼야 함을 숙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한국불교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터입니다.

자신의 굳은 심지와 실천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굳은 각오없이는 허사로운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나라 불자치고 정구업(淨口業) 진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실천 수행하는 이들은 미약한 것 같습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이것은 ‘입에 업되는 말을 맑게하고 참말만 하겠습니다’하고

부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발원해 놓고 실행하지 못할 때는

스스로 벌을 설줄 알아야 하고 불제자로서 참회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허물은 걱정않고 남의 걱정과 허물을

들춰내기를 일삼는 불자는 부처님 앞에 합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허물만 꾸짖지 말고 힘써 내 몸을 되살펴 보야야 합니다.

남을 흉보기 이전에 나는 어떤가 하고 먼저

반성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잣대에서 남을 판단하고, 강요하고 하는 것은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고

항상 되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모른 사람이 만일 이렇게 깨달으면 그 때문에

다툼은 길이 쉬어질 것입니다.

장부는 일언이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장부가 전 인류에 살이되고 뼈가 될 수 있는 장부의 말 한마디가

수백년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구업진언을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말만 하겠습니다’하고 아침에 발원하고

저녁에 가슴에 손 얹고 자기하루를 생각해보면

거짓말, 나쁜말도 했고 비겁하고 용렬한 말도 해 하루가,

전 생애가 엉망이 돼 버렸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업을 지어놓고 부처님께 복달라, 명(命) 달라하는 것은

진정한 참불자의 모습이 아닐 터입니다.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고 구복을 일삼는 것은

헛 껍데기에 불과한 불자입니다.

정구업진언 즉 진실한 말, 고운 말, 득이 되고

복이 될 수 있는 말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포부와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살아야 합니다.

천타불만타불, 천등만등 달아 발원하느니 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발원은 그에 대한 업만을 계속 쌓아갈 뿐입니다.

그 다음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을 독송 합니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그 입만 잘 관리해서 득이 되고, 복이 될 수 있는 말만 하면

아들딸, 온 동네가 다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이웃 좋고, 나라 좋고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극락세계가 멀리 있는게 아니고 내 입하나 관리 잘해서

내 마음 편하고 식구모두 편하고 이웃, 나라가 다 편하니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수경에서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다음에

개경게(開經偈)를 말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黴妙法)

가장 높고 미묘하고 깊고 깊은 부처님의 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내가 이제 다행히도 듣고 보고 지니오니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부처님의 참된 뜻을 알아지게 하소서.

천하의 만물이 선(禪) 아닌게 없고,

세상만사가 도 아닌게 없습니다.

그게 법(法)인 것입니다.

그 법을 알고 살다보면

인생이 즐거음을 느껴, 나쁜것도 잊고,

욕심도 잊는 산불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구정물이 맑아지면 저절로 피가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맑아집니다.

그러므로해서 10년, 100년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고

부처님이 왕궁과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이유 또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갈 때 내 마음의 법을 스스로 갖고

절을 찾을 때만이 우리 마음 속에 득실거리는

8만4천 마구니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투철한 각오가 없으면 번뇌마구니에 휩싸여

방황하고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단지 구복을 위해 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자신으로 인해 복을 구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실천수행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5백생동안 자비보시행을 하셨습니다.

자비보시행은 물질적인 보시행 보다

정신적인 보시행에 더욱 중점을 둡니다.

나는 ‘복짓는 것은 삼세의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

물질 복을 짓는다고 한평생 허덕이고,

물질 복을 지어서는 만석꾼이 되어

열쇠로 물질 보관한다고 한생 또 허덕이고.

복 짓는 타령하느라 정신없이 살아 한생을 무의미하게 살게됩니다.

그러니 삼세를 헛 산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질 복을 지을게 아니라

지혜의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 복을 지어 불우한 이웃을 돕거나 유용하게 쓴다면

물질 복을 짓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욕심을 버려

한가지 물건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깨끗이하여

모든 번뇌를 지혜로 돌이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승가든, 재가든

물질을 너무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해서 부정부패가 생기고 세력다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태국 같은데서는 복을 비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태국엔 역사이래로 전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옳바르게 사니깐 전쟁이 있을리 없는 것이죠.

내전에 의해 나라가 망하지 외적의 침입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자기 일 잘하고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교이고 불제자의 도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들이 기도만 하면

부처님이 뭐든 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작복하는 것, 복을 지으라는 것이

물질 복을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복을 스스로 노력해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한테는 어둠이 다가올 수 없듯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이에게는 고(苦)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신이 똑바르면 숨구멍이 트이는 법입니다.

불법을 따르고 실천하면 지혜가 광명이 되어 나옵니다.

물질에 허덕이다보면 눈도 가물가물해지고

정신도 혼미해 지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끊기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눈이 맑아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단번에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실천하고 부단한 수행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요.

성냄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거만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애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정신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 괴로움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 피가 독한 피가 되어 돌아옵니다.

거울을 한번 보십시오.

화낼 때 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느껴보세요.

험악한 얼굴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짜증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싸우지 말고, 자기 자신을 먼저 아낄 수 있는 사랑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독한 얼굴을 하고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부처님 말씀 중에 자살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짓밟지 말고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아끼라고 말씀하신거죠.

내가 수행할 때 효봉스님과 목욕을 해보면

효봉스님은 마치 백일난 애기 동자와도 같았습니다.

물에 꼭 솜뭉치 띄워 놓은 것 같았죠.

그러나 효봉스님의 몸을 만져보면 쇠덩이 만큼 단단했었습니다.

또 해인사 방장하실 때 20일동안 등을

땅에 붙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70노인이 고개도 끄덕않을 정도로 전혀 미동이 없고해서

살짝 옆에가서 장난삼아 가만 들여다보니깐

고개는 들고 숨소리만 색색거리시더군요.

어른을 때릴 수는 없고해서 주장자로 방바닥을 딱 때리니깐

효봉스님이 깜짝 놀래십디다.

그때 잠깐 주무신 모양입니다.

주무셔도 몸은 전혀 움직임이 없으셨던 것이었죠.

그냥 보통 수좌였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죠.

한생 닦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생 닦아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입만 부처라고 말하지 말고

자기를 아끼고 잘 관리하고 실천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산불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어느 것보다도

자기 몸둥이 한번 만나기가 얼마나 힘이 든지 알아야 합니다.

이 몸둥이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몸이 있을 때 좋은 일 많이 하고, 복도 많이 짓고,

수행도 열심히 해서 부처님 근처라도 가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깨우침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진실로 한마음으로 구하면

바로 곁의 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말보다는 실천의 수행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나를 아끼고, 이웃을 아끼고,

나라를 아껴 한마음되어 실천수행하는 것만이

개혁으로 가는 한국불교를 이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무조건 절에 가서 빌고 스님에게 절한다고 해서

복 받고, 잘사는 것 아닙니다.

그것부터 불자들은 인식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불자, 실천하는 불자를 지금의 한국불교는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고 실천수행함으로 해서

옳은 길을 가지 못하는 스님들을 채찍질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신도들 때문에 스님들은 나태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승가는 승가나름대로, 재가는 재가 나름대로

제 모습 찾기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공부하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선(禪)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발전하고 재생하려면 우선 각오와 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왜 불법을 공부하는지,

왜 절에 다니는지,

왜 기도하는지 알고 난 뒤에 절을 찾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가야합니다.

알고 믿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불교를 믿어야

더 이상 한국불교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자를 먼저 세우십시오.

생각이 온전하면 지혜가 생기고

생각이 흩어지면 지혜를 잃는 법.

이 두 갈래 길을 밝게 알아서 지혜를 따르면

도를 이루고 각오가 투철해 집니다.

게으름피지 말고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즐거운 법을 따라 즐거이 나아가십시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