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스님─육신에 정성다해도 남는 건 한줌의 재

◆육신에 정성 다해도 남는 건 재 한줌 뿐/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스님

◆ 선(禪)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눈을 통해 본다 하지만 마음 없이는 볼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입니다.(주장자 들어 보이며) 그러나 마음 없이 볼 수 없으니 이것(주장자 들어 보이며) 또한 마음입니다.

이 한마디에 알아들었다면 선의 정수를 보았다 하겠습니다.

주장자와 마음을 나눠 놓고 분별하며 보려 하는 사람은 영겁이 지나도‘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주장자를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주장자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따로 있는 한 선은 저 허공에 있을 뿐입니다.

생로병사 거스를 수 없어 나타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보는 주체가 둘이 아닌 자리, 바로 그 자리를 일컬어 우리는 선이라 하고 불법(佛法)이라 합니다.

여기서 불(佛)은 마음이고 법(法)은 물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오랜 무명으로 인해 지수화풍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이것을 두고 ‘참 나’라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중히 여기는 이 몸뚱아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어떤 임산부가 사내아이를 얻고는 경사 났다고 해 이름도‘경자’라 했습니다.

부모님의 정성으로 곱게 잘 자라던 경자가 생후 18개월째 되는 달부터 감기에 걸리며 설사를 하더니 시름시름 앓고 말았습니다.

큰 병원서 진찰해 보니 암이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시련이 갑자기 그 가족에 닥친 것입니다.

또 얼마 전 TV를 통해 맹인이 교사 자격증을 얻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분의 인생담을 들어보니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여고 시절 가벼운 안질환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심하게 돼 대학 시절에는 실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후 결혼도 했지만 결국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 분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공부를 해 교사 자격증까지 땄습니다만 본인이 시력을 잃을 줄 꿈엔들 생각해 보았겠습니까? 또 제가 아는 분 중 한 사람은 좋은 직장을 잘 다니다가 외국 출장 길에서 큰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발가락이 썩어 가더니 발목이 썩고 급기야 무릎까지 썩어 다리를 자르고 말았습니다.

누구든 육신의 병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결국 이 육신은 고(苦) 덩어리입니다.

병만 안 들면 고가 아닐까요? 이 육신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혀 편하게 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삽니다.

고 덩어리인 육신을 위해 더 큰 고를 찾으며 사는 게 우리 인생이란 말입니다.

이 육신 아무리 편하게 잘 보존해도 결국 죽으면 재 한 줌 외에 남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육신을 두고 우리는 ‘ 참 나’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참 나’는 유무를 떠난‘나’입니다.

삶과 죽음, 여자와 남자라는 구분을 초월해 있는 자리입니다.

만상의 근본이요, 만유의 본체가 바로 이‘참 나’자리입니다.

『금강경』에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상을 두고 우리는‘나’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착각을 한 순간에 바로 깨는 것이 선(禪)입니다.

자신의 생사에 매이지 않은 진면목을 깨닫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은 세간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온갖 것이 본디 나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 만물은 ‘본래 나’에서 이뤄진 것들입니다.

본래자리를 볼 수 있는 창을 잠시 열어 보이겠습니다.

만물은 마음에서 발현 마조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가 쓴 『돈오입도요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주 스님은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자신의 깨달은 바를 직접 저술했습니다.따라서 이 책은 깨닫는 방편에 관한한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선사는 “오직 돈오(頓悟)만이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돈오입니까?” “일체 망념을 단박에 깨는 것이다.

돈오란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돈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닦아가야 합니까?” “근본을 닦아가야 한다”.대주 스님이 말씀하신‘근본’은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세계라 하면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지하세계, 수중세계, 동·식물 세계, 나아가 우주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세계는 참으로 신비한 세계입니다.

왜 신비한 것일까요? 우리 마음이 신비하기 때문입니다.백천만억 세계는 중생의 마음이 발현돼 나타난 것입니다.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누진통이 있는데 이런 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마음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요달하면 자타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깨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 작용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만법의 왕입니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 한 송이 들어 보인 것이나, 달마 스님이 면벽 9년을 하신 뜻은 바로 이 마음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 홍주 마조스님에게 두 아들을 보내 고승을 만든 황 거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마조스님 문하에서 열심히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님 은혜로 이생에서 억겁토록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며 환희에 차 아버님을 뵈려 서천 고향을 찾았습니다.

광채가 나는 두 아들을 본 황 거사는 “부처님 잘 오셨습니다”라며 합장하며 말했습니다.

“내 대신 성취했으니 장합니다.

두 부처님께 부탁할게 있습니다.

나를 키워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완성시켜주는 분은 벗이라 했습니다.” 완성이란 내 면목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이지만 자신이 도를 이룰 수 있도록 두 아들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홍주에 주석하고 있던 마조 스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두 아들은 마조 스님에게 사정을 전했고 이에 마조 스님은 법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황 거사가 법당 법석에 앉은 마조 스님에게 예를 올리자 마조 스님이 물었습니다.

“먼길서 오셨습니다.

지금 서천에 있습니까? 홍주에 있습니까?” 마조 스님은 황 거사의 몸뚱아리가 어디 있는지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선문을 듣는 그 놈, 그 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두 아들을 마조 스님에게 보낸 것만 보아도 황 거사의 근기는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조 스님의 선문에 황 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집안에 두 가장이 없고,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없습니다.” 보통 선기가 아님을 간파한 마조 스님이 한 번 더 묻습니다.

“올해 나이가 몇입니까?” “여든 다섯입니다.” “이리저리 계산하는 나이는 몇 살입니까?” 禪 법문엔 큰 공덕 있어 바로 그 말에 85세의 황 거사는 깨달았습니다.

선법문에는 큰 공덕이 있습니다.

황 거사처럼 당장 확철대오 못해도 선법문 듣는 그 근기 만으로도 다음 생에서의 깨달음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선법문에 관심 없는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의 일성이 무엇입니까? ‘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이 마음만 쓰면 곧 성불하리라.

(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입니다.

우주를 흔들고 만고에 빛날 사자후입니다.

청정함이란 무엇입니까? 선악시비취사(善惡是非取捨)가 없는 마음.

구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려 합니까? 다겁생토록 버리지 못한 그 업습을 버리지 못한데 기인합니다.

선악의 마음을 보살의 마음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생긴 지혜광명으로 그 업을 녹여야만 합니다.

부처님 보듯 타인 공경해야 『화엄경』은 깨달음 바를 서술해 놓은 경전입니다.

그 경전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봉은사 법당에 모셔진 이 부처님만을 이릅니까? 아닙니다.

중생은 물론 세상만물이 다 불성을 가진 부처님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 청정한 마음이 자리한 그 곳이 극락이요 정토입니다.그 마음을 전하려 부처님은 물론 옛 선사와 조사가 그토록 많은 방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아니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 정리:채한기 기자 – 이 법문은 3월 12일 봉은사에서 봉행된 ‘선원장 초청 법회’에서 현산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2006-03-29/846호)

지안스님─下心하심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下心하심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지안스님-

나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도와준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금강경에는 사람이 相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상이란 나를 남에게 과시하고 나의 장점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我慢心아만심 따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행에 있어 금물이며 일반사람의 교양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놓아도 그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면 오히려 남에게 미움을 사는 법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한 선행을 스스로 숨기는 것이 더 큰 미덕이 됩니다.

이것을 밀행이라 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도와주는 것을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보체계로 움직여지는 현대사회는 각종의 알림인 선전과 광고의 홍수의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위 PR(Public Relation)시대라고 말하듯이 갖가지 상업광고를 위시하여, 업소나 단체의 이름을 스스로 선전하는 소문내기가 너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매스컴의 발달에 의한 당연한 추세이긴 하지만 어쩐지 찜찜할 때가 있습니다.

이 PR시대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보면 개인이나 단체를 대중에게 알리고 보자는 相내기 운동에 열중합니다.

그리하여 相 을 내지 못할 때는 스스로 소외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져버립니다.

소외와 열등의식은 생활의 기를 꺾어 인간의 의지를 나약하게 하고 어떤 패배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또 남의 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져서 남과 동화되지 못하는 사태를 낳기도 합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기 자존심은 높이고자 함과 세상의 명예를 탐할 때 더욱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하기야 사람에게는 자기의 입장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지는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자존심을 가지고 소신껏 살아가는 주체의식이야말로 인간승리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 相 을 내는 자기 과시가 되어 사람 사이의 충돌과 마찰을 빚어내는 불화의 요인이 되는 수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경쟁사회에서 자기주장을 세우고 관철하기 위해서 입장대결이 생길 때,한 판 승부를 겨루자고 벼르는 독선과 아집은 인간의 착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이기고 보자는 승부근성이 개인의 생존에 필요할 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승리를 얻어내는 방법이 좋아야 합니다.

비겁하고 야만적인 수단을 써서 이기는 것은 승리 자체가 비겁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모여 사는 공동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下心입니다.

모든 도덕적 가치를 세우는 근본도 물론 하심에서 비롯됩니다.

불가에서 대중처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법[入衆五法입중오법]이 있는데, 제일 먼저 하심下心이 나옵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남에게 겸손하고 상대를 더욱 존중해 주는 하심의 정신은 진정한 인격 수양으로 아만을 꺾어 자신을 착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인간상호의 이해타산이 맞물려 움직이는 사회생활 속에서 가끔 자존심 상하는 불쾌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사람이 남에게 무시당하고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존심의 상처는 손가락을 다친 것보다 더 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존심을 치료해 주는 약은 하심下心 밖에 없습니다.

육바라밀에도 인욕바라밀이 나오지만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는 인욕에서 사람의 정신적 무게가 커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자존심은 도덕적 윤리의식과 義의와 勇용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입니다.

아만을 내세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공자는 학문에 있어서 자존심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논어에서 말한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란 말은 배움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자주 상하곤 합니다.

과민한 신경으로 매사를 대하다 보니 한 생각 감정의 실수가 쉽게 터집니다.

예와 의를 잃고 부지불식간에 남의 기분을 해쳐버리는 수가 빈번합니다.

극기의 수양부족 현상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좀 더 下心을 배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광스님─진실된 믿음으로 기도하라

진실된 믿음으로 기도하라

-무광스님-

▶초심자 수행의 길 불자들에게‘불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머뭇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십년 불교를 공부했다고 하는 불자들에게도 쉽고 어려운 것이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가 한 마디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불자들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불교의 궁극에 이르는 길은 수십 갈래,수백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 하나하나를 선택해가는 불자들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최선의 길일 수 있습니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분 자신이 행하는 수행법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제 경험에 비추어 제가 행하고 있는 불교의 수행법과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여러분들의 수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초심자들은 수행을 시작하면 뭐부터 해야 할지 모릅니다.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속에서도 멈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초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찾아 나서야 하며, 부단히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도의 실체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많은 부딪침과 실천을 통해 도의 길에 들어서도록 자신을 담금질 해야합니다.

그에 비해 도에 깊게 들어간 사람들은 도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고 깊이 있게 표현을 잘할 것입니다.

초심자의 분주한 마음과 다르게 투명하게 자신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그대로 잘 봅니다.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에서 도를 봅니다.

세상의 변화, 생사와 많은 변화를 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더욱 성숙하게 만듭니다.

즉 내면과 외면이 서로 화해져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고정된 마음보다 변화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도 곤충에서 나비가 되듯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곤충이 나비가 되듯 속세에서 수행을 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이웃들을 도의 세상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 근기에 가장 맞고 수행하기 좋은 수행법이 바로 관음주송입니다.

관음주송은 외면의 세계를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좋은 수행법입니다.

관음주송은 왜 해야 할까요? 관음주송은 다른 수행법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관음기도를 해서 많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 한 내용이 실린 책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벙어리가 관음보살을 자주 불러 입이 떨어졌다고 하는 신비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즉 관음기도를 해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참으로 신기해 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벙어리 되는 분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찾았을까 생각하니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한의사 한 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경을 많이 쓰고 말도 없으며 속병까지 있으면 건강을 잃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신경을 많이 쓰면 잔병이 오고, 이 신경성 병은 암으로 옮아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려고 하면 관음보살님을 하루 3시간만 부르세요.

일상생활 중에 3시간 정도 관음정진을 하게 되면 체내에 배출되지 못하고 자리를 잡고 있었던 독성과 가스, 나쁜 생각들이 없어집니다.

체내에 배출되지 못한 나쁜 이물질이 나중에 암이 되기 쉬운데 관음기도를 많이 부르면 자신도 모르게 배출됩니다.

관음기도를 하면 가장 먼저 얼굴과 성품이 유해지는 것은 이 같은 까닭입니다.

관음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관음보살님을 정확하게 또렷하게 불러야합니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바로 하면 빨리 말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변음이 나올 때도 자신의 변음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편한 마음으로 웅얼거리듯 부르다 보면 나중에는 변음 내용을 자신이 못 알아 듣는 경우가 있으니, 될 수 있으면 또박또박 정성껏 관음보살님을 부르십시오.

그렇다고 변음이 나와야 좋은 기도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변음이 나오지 않아도 지혜를 얻는데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불교의 최종 목적지는 한곳이지만, 각자 성품대로 각자 길이 다릅니다.

변음이 나온다 해서 다 도에 드는 것이 아니며, 변음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도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가랑비에 옷 젖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는 비에 옷이 젖을리 없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옷이 젖어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인과 중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루 열 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고, 기도할 때 변음을 많이 하고, 불교의 진리를 잘 말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행동이 가식일 때는 그것은 참다운 수행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았다 하지 않습니다.

높은 도에 이른 사람은 스스로 높은 도에 들어갔다 하지 않습니다.

의식하지 않는 행동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옳은 수행자며 깨달은 이입니다.

초심자들은 관음보살을 부를 때 간절히 생각하고 염하고 불러야 합니다.

바른 자세로 바른 음성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보살의 위신력이 나를 올바로 인도해달라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나라는 개념을 비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앉아 기도하면서 내 것을 찾고 내가 이익될 생각을 품을 때는 새로운 것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유충이 몸을 버려 곤충이 되고, 곤충이 자기 몸을 버려야 나비가 되어 세상을 날아오르듯, 자기라는 생각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수록 자신을 잊고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나라는 집착과 욕심이 있다면 기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도하는데는 평등합니다.

그러니 용기를 갖고 시작하십시오.

나이가 많다, 기력이 없다, 힘이 없다,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보다 오늘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하시고 정진하십시오.

기도를 할 때 스스로 마음을 운전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초보자일 때 모든 것이 어렵겠지만 하다 보면 재미가 붙을 것입니다.

그리고 능숙할 때는 쉽고 편해지면서 참다운 불법의 세계에 들게될 것입니다.

관음정진을 하게 되면 얼굴과 음성, 소리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 화내고 성내던 마음이 업장이 물에 녹듯 없어져 버립니다.

흡사 곤충이 허물을 벗어 나비가 되듯, 부처님 좋은 법이 좋은 인연을 만나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게 합니다.

불자 여러분, 불법이 아니면 참다운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실되게 관음정진을 하게 되면 외면과 내면의 세계가 바뀌게 됩니다.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무지했던 과거의 행위와 행동들이 지혜롭게 올바로 변하게 됩니다.

더 열심히 정진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