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스님─항상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십시요

항상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십시요 혜정큰스님 (법주사 회주) 오늘은 ‘인연’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교 교리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들여야만 하겠습니다. 불교는 어느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요, 마음을 찾아서 깨쳐가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마음’입니다. 이 마음 하나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다, 숙명이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운명과 숙명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요, 우리는 그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늘 거기에 구속받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만 되는 운명적인 존재인가?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확 바꿔야 합니다. 운명론을 능히 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교 교리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길들어져서 질질 끌려 다니고,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자기 일생을 그와 같이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불교는 운명과 숙명을 끌어안고, 산산이 때려 부셔서 다시 창조하고, 또 개조하고 이렇게 해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이 마음 하나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500년 전 이 세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선언하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소조’라고 간단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중생계는 인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때문에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합니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인연이요, 하나는 좋지 않은 인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불어 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인연을 맺되 좋은 인연을 맺고 살아야만 마음도 편하고 서로 도움도 받고, 고민도 없고, 고통도 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지 않은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짊어지고 끙끙거리면서 가야만 되느냐? 운명론을 믿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악한 인연, 좋지 않은 인연을 확 때려 부셔서 창조하고,또 바꾸고 그래서 좋은 인연으로 정립해서 회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노력하면 됩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게 보통 우리 업 많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지금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냉엄하게 사정없이 비판을 하고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게 이해하고 용서하십시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하심하고, 내가 조금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능히 좋지 않은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술~술 뚫려서 좋은 인연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나쁜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는 작업의 하나가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를 늘 안고 계십시다. 부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는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전부 안아서 끝까지, 이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 대자비심을 발휘해서 고통이 다 없어지고 행복하게 살 때까지, 성불할 때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부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뭐좀 하다가 안되면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도 소용없다’ 하고 맙니다.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잡념망상으로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신심과 원력과 정성을 다 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살을 에는 마음으로 피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그 기도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데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바로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것, 이 게으름을 망치로 때려 부셔서 다 내쫓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단히 담금질하는 것. 이것을‘절차’하고 ‘탁마’한다고 합니다. 담금질해서 아직 미완성 자리를 완성되게 만드는 것도 자기 마음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옛날 스님들은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멍이 들어서 피가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와 같이 졸음을 떨치면서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하는 그 정신, 그 신심. 이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는 내가 뭔가를 갈구하고, 소원할 때 그것을 이룩케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도, 주력도, 108배도, 간경도 모두가 기도의 개념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기도, 수행 전체를 개념으로 하는 기도를 지금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향에 맞는 것을 하나 잡아가지고 꾸준히 하되 게으르지 말고, 정성을 다 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꼭 성취됩니다. 여러분,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두견새는 모든 새들이 다 잠이 들고, 모든 짐승들이 잠이 들고, 사람마저 잠이 들고, 천지가 적막하고 오직 달빛만이 밝은 야삼경, 열두시나 한 시경 그 때 웁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 보면 너무나 애절하고 너무나 간절합니다. 무슨 원이 있어서 무슨 한이 있어서, 모든 것이 잠든 적막한 이런 밤중에 홀로 저렇게 우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을 울다가 또 흐느끼며 웁니다. 울다가 목에서 피가 맺히고 그 피가 올라왔다가 다시 넘어 갑니다. 피 맺힌 한이 있어서 그렇게 밤새도록 웁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저 두견새와 같이 한번 해보세요. 간절하게 두견새가 우는 그 마음으로, 낭떠러지에서 밑을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그러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방에서 일주일, 한 달, 석 달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 하는 마음으로, 철야기도를 일주일 또는 열흘 쉬지 않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장좌불와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면 나태해지니까 밥을 한 끼만 먹고 그 졸음을 쫓아가면서 일일일식으로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 그런 지극한 마음으로, 그런 정성스런 마음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극치가 뭐냐.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를 다 얻고, 깨쳐서 모든 것을 다, 아무 구애 없이,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성인이 된다 그 말입니다. 기도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돈이나 건강,애들 입학하는 것 같은 소소한 것들은 조금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그 대신 기도할 때 아주 정성을 다해서 하십시오. 어느 스님이 운문 문언(雲門文偃, ?~949)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했느냐, 여러분은 그 도리를 한번 깊이깊이 참구해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에서 이뤄지고,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혜정스님

께서는“견성성불위해 24시간 화두 놓지말라” “산문 나설땐 시자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내가 있는 속리산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십니다.

매달 16일은 미륵재일이라 철야기도를 하는데 한 번은 법당에 가봤더니 그 모습이 가관이라.

앉아서 기도하는 사람, 서서 기도하는 사람, 벽에 기대 염주 돌리고 있는 사람,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

이게 기도하는 것인지 놀러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혼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따위로 기도해서 뭘 성취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말이야.

정성을 다해서 해도 이뤄질 듯 말 듯 한데….”라고 늘 말씀하신다.

스님의 엄격한 수행 가풍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스님은 출가자들에게는 오직 견성성불을 위해 24시간 화두를 놓지 말라 이르시고 신도들에게는 참선, 간경, 염불 등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할 것을 당부하신다.

그 어느 쪽이나 뼈를 깎고 피 눈물을 흘리는 간절함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수행 가풍은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30여년 주석하고 계시는 법주사 사리각에는 지금도 전화가 없다.

그래서 스님을 만나려면 사리각이나 스님이 정하는 법문 장소를 찾거나 시봉하고 있는 상좌 스님께 전화를 드려야만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다.

아직도 법문을 위해 외출할 일이 생길 때는 혼자 걸망 하나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

1933년 전라북도 정읍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19살 때 수덕사로 출가했다.

1953년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62~8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72년 중앙종회 부의장, 1977년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다.

법주사 주지와 율주 소임을 거쳐 지금은 법주사 회주로 계신다.] – 자료출처:붓다뉴스 –

월호스님─ 당신의 성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당신의 성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월호스님-

일상생활에서 언제든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 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수행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돌이켜 듣는 성품은 어떤 것일 까요? 여기에 한 물건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도 없는 물건입 니다.

이 물건을 바로 보고 듣고 돌이켜 비추기도 하여 보지만,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 모양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육조 혜능스님의 제자인 하택 신회(670-762 당나라 스님)는 이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 이라고 대답하였다가 서자(庶子)가 됨을 면치 못하였 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악 회양 선사(677-744 당나라 스님)는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 (設使一物卽不中)’고 대답함으로써 육조 혜능 스님의 적자(嫡子)가 되었다고 합니다.

닦고 증득함이 없지는 않으나 결코 오염될 수 없는 것, 이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그럼 달리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하나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와 먹으로 이루 어진 것은 아니네.

그래서 펼치면 한 글자도 없건마는 항상 큰 광명을 내 뿜는다네.” 그렇다면 이것이 또 무엇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시비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깨치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다만 ‘이 뭐꼬?” 하고 들어가면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면서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용을 쓰다 보면 머리 쪽으로 열이 오르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므로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줄의 비유와 같이 너무 팽팽하게도 너무 느슨하게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너무 부지런하게 공부하려 하기 보다는 차라리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참선의 요령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하반야바라밀(큰 지혜로 피안의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을 외웁니다.

이때 소리를 내어도 좋고, 마음속으로 읊어도 상관없습니다.

둘째, 그 소리를 듣습니다.

스스로 내는 소리를 스스로 듣는 것입니다.

셋째, 소리를 듣는 이 성품은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반문하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누군가 나를 폄하하는 소리를 듣거나 심지어 상대방이 나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욕됨에 성질내기 보다는 그 욕설을 듣고 있는 이 성품이 ‘도대체 무엇 인가?’ 하고 반문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생활 속의 참선이 실답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당신은 지금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수산스님─사람들이 ‘인과’ 알면 세상은 시끄럽지 않아

고불총림 방장

수산스님

“사람들이 ‘인과’ 알면 세상은 시끄럽지 않아”

새벽 5시 서울을 출발한 차는 아침 출근 시간 전에 전남 영광에 내려놓았다.

좀처럼 가기 힘든 오지(奧地)인데도 새벽부터 서두르면 회사 출근하듯 닿는 가까운 곳이 됐다.

아래로 물러났던 장마가 다시 몰려온다는 기상청 예보를 믿고 서둘렀는데 무더위는 전날보다 더 기승이다.

지난 6월29일 아침 불갑사에 주석중인 고불(古佛)총림 백양사 방장(方丈) 수산지종(壽山知宗)스님을 찾아뵙는 길은 그렇게 한달음에 시작됐다.

사진설명: 스님은 늘 서옹스님을 따라 ‘참사람’을 강조한다.

양심 있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참사람이라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다.

규모가 큰 본사(本寺) 앞 집단 시설지구처럼 양 옆으로 새 단장을 한 식당이 죽 늘어서있고 넓은 잔디밭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경내는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